제35화. 개발이 시작되다
북위별시위는 광해군의 명에 따라 북상을 거듭해 해서 여진에 속하는 휘발 씨족의 영역 앞에 도착했다.
전향한 여진족장들은 휘발 씨와의 전투를 걱정했다.
대규모의 전사들을 동원할 수 있는 그들의 힘도 문제였지만 휘발 씨족이 해서 여진이라는 점이 주된 이유였다.
휘발 씨가 이 전쟁에 본격적으로 발을 담그면 해서 여진 전체가 움직일 수 있다는 우려를 가진 것이다.
광해군도 그렇게까지 나아갈 생각은 없었다.
이번 전쟁은 야인 여진과, 그것도 함경도 인근의 일부와의 충돌로만 마무리 지어야 했다.
해서 여진으로까지 전쟁을 확대시킬 의향이 없었던 것이다.
그로인해 광해군은 내음타방을 보내 휘발 씨족과 협의를 진행했다.
호이합 씨족의 강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휘발 씨족은 조선군과의 화친을 받아들였다.
그들과의 협상으로 백두산을 기점으로 안도, 온성을 직선으로 잇는 지역을 조선의 영역으로 확정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고구려의 고토를 일부 회복한 것이었고, 현대로 보자면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일부를 확보한 것이다.
대신 휘발 씨는 그 이상으로 조선군이 진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갔다.
호이합 씨족은 그 기선 밖으로 이동해가기로 합의했다.
우스운 건 그렇게 이동하기로 한 호이합 씨족 중 일부 부락이 조선의 영역에 남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척박한 땅으로 나가는 대신 조선의 영역에서 조선의 곡식을 받으며 일하길 원했다.
분노한 씨족장 호이합투발이 보낸 전사들이 들이닥쳤지만 가형 소총으로 무장된 북위별시위 기마대의 모습을 보고는 그대로 물러갔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선조 16년 11월, 이로써 광해군의 1차 만주 정벌이 마무리되었다.
*****
해가 바뀌었다.
어느덧 1584년, 그러니까 선조17년이 되었다.
만주에서 거둔 승리에 한성의 조당은 별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여진족의 준동이 멈추었다는 것 외에는 눈에 뜨이는 이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루기 어려운 야인들의 땅을 확보했다는 것엔 관심도 없었다.
심지어 해당 지역을 조선 땅으로 선포하는 일조차 하지 않았다.
다루기 어려운 이들이 살고, 지키기 어려운 땅이라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선조와 대신들은 명과 사전조율이 없었다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광해군으로써는 억장이 무너지고 울화가 터지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산해와 정철조차 광해군의 뜻에 따를 수 없다는 서신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이이만이 고군분투했지만 좌우로 저어지는 선조의 고갯짓에 그도 좌절해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선조를 비롯한 모든 대소신료들은 광해군이 약속했던 결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광해군이 함경도 서측 일대의 안정화를 원했던 것은 무산의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다.
여진의 땅에 딱 붙어있는 무산에서 안정적으로 철광을 열자면 일대의 안정이 무엇보다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광해군은 전향한 여진족들을 무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조선에서 올라오는 곡식을 조금 더 수월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달았다.
여진족들은 광해군의 이야기에 두말없이 따랐다.
그들의 생각엔 식량상태가 나아지면 다시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생각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광해군은 아무소리도 하지 않았다.
대신 광해군은 그렇게 이주해온 여진족 사람들을 활용해 무산 바로 앞 두만강 건너 그러니까 과거엔 야인들의 땅으로 여겨졌던 지역에 대규모 거주지를 건립했다.
엉성한 모옥이 주를 이루었지만 이전에 여진족들이 주로 사용하던 천막보다는 훨씬 견고하고 단열성이 좋았다.
그 일을 마친 이들에겐 곡식이 주어졌다.
많은 수의 전사들이 칼을 놓고 일을 했다.
삭풍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에도 일은 진척이 되었다.
그렇게 지어진 집에 살기를 원하는 이들을 모집했다.
모두가 낮선 환경에 주저하는 가운데 투삼구의 부족이 거주를 하겠다며 나섰다.
그들이 들어오자 새로 건립된 부락에 연기가 올랐다.
함께 건설에 참여한 노비군들의 손에서 완성된 아궁이에 불이 때지고 구들에 열기가 공급되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따듯함과 안락함에 투삼구의 부족들이 크게 기뻐했다.
하긴 천막 안에 모닥불을 피워 얻는 따듯함과 뜨끈뜨끈한 구들장에 몸을 지지는 느낌은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까.
더구나 밖엔 삭풍이 몰아치는 한 겨울이었다.
천막 안에 아무리 모닥불을 피워도 아랫목에서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투삼구의 집에 놀러왔다 그 경험을 한 호정이 족장의 성화로 그의 부족이 추가로 들어왔다.
일차로 지은 거주구가 꽉 들어찼다.
그들이 겨울 내내 어찌 사는지 지켜본 여진인들 사이에서 새롭게 모옥을 짓는 이들이 생겨났다.
광해군이 원해서도, 지으라 명해서도 아니었다.
여진인들 스스로가 지은 모옥이었다.
그곳에 구들장을 놓을지 몰라 애를 먹는 여진인들을 위해 광해군이 노비군을 보내 도왔다.
이내 수십 채로 시작한 여진인들 스스로 지은 모옥이 수백채로 늘어났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짓게 두지는 않았다.
나름 광해군의 계획에 의해 집들이 들어섰다.
아직은 흙바닥이었지만 도로를 두고 집들이 마주했고, 공터로 남아있었지만 상업시설이 들어설 곳과 추가로 지어질 관아들이 들어설 공간들이 마련되어있었다.
특히 재래식에 불과했으나 집집마다 화장실을 만들어 오물을 길바닥에 버리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그렇게 모인 배변은 중요한 자원이 될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천막을 치고 살아가는 여진인들과 모옥을 짓고 사는 여진인들 사이에서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알지가 끓인 물로 광해군이 씻는 것을 목격한 투삼구가 크게 걱정했다.
괜한 일로 병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하긴 씻은 후 제대로 관리가 안 되면 이 혹독한 날씨에 곧바로 감기가 걸리긴 할 터였다.
그래도 광해군은 계속 씻었고, 말끔한 상태로 여진인들을 상대했다.
가끔 김억수가 치중대를 통해 보내준 향신료를 넣고 목욕한 날이면 향긋한 냄새까지 나는 광해군을 여진인들은 신기하게 바라봤다.
그게 길어졌다.
아직도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2월 어느 날, 투삼구가 광해군을 따라 몸을 씻었다.
그날 부로 투삼구가 감기에 걸려 고생을 했다.
그런 그에게 광해군이 감기약을 보냈다.
맛이 고약한 탕약을 억지로 며칠 먹고 나서야 투삼구의 병세가 나아졌다.
모든 여진인들이 그런 투삼구가 다시는 목욕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병이 낫자 다시 목욕을 했다.
목욕한 후의 그 깔끔한 느낌을 좀처럼 잊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번엔 광해군의 조언에 따라 잘 말리고 따듯한 차를 마시는 등 관리를 잘했다.
그렇게 말끔해진 투삼구는... 광해군이 봐도 훤칠했다.
부족의 처녀들이 그런 투삼구의 집 앞을 서성였다.
초원에서 일부다처제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일이다.
필요하다면 죽은 형이나 동생의 안사람을 아내로 맡기도 하는 것이 그들의 풍습이었으니까.
웃긴 건 그런 일이 있은 후, 투삼구의 부족 청년들이 목욕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종래엔 광해군을 따라 이까지 닦는 여진인들이 굉장히 많아졌다.
어느새 모옥으로 지어진 거주 지역에선 목욕하지 않고, 이를 닦지 않는 이들을 유행에 뒤떨어진 이들로 받아들였다.
재미있는 건 ‘더럽다’ 가 아니라 ‘유행에 뒤 떨어진다’ 라는 인식이었다.
여진에게 있어 광해군을 통해 전해지는 조선의 문물은 훨씬 발전된 것이었다.
그것도 조선 왕실의 고급문화로 인식되었다.
거주구의 유행이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집하던 여진인들 사이에도 유행처럼 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특히 깨끗하게 목욕을 한 여인들을 안아본 사내들이 크게 반겼다.
때로 꼬질꼬질하고 몇 달씩 제대로 씻지 않아 냄새나는 여인들과 살을 부대끼고 살던 사내들이 깔끔하게 목욕을 한 여인들을 대하고는 그것이 어떤 차이인지 확연하게 깨달은 것이다.
변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깨끗한데 더럽고 냄새나는 사내를 반겨할 여인들은 없다.
씻지 않는 남자들을 기피하는 여인들이 늘어가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씻는 사내들이 늘어났다.
3월에 접어들고 날씨가 조금씩 풀려가자 그 기조가 확연하게 자리를 잡았다.
덕분인지 여진족 사이에서 잔병치레를 하는 이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광해군은 그것이 위생환경의 변화로 인한 결과가 아닐까 추측했다.
얼었던 강물이 녹자 광해군이 그간 대장장이들과 계획하던 일들을 시작했다.
철산 배후단지 건너 조선 땅에 두만강을 따라 물레방아들이 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의 마을 어디나 가도 쉽게 볼 수 있는 물레방아다.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지간한 노비군들 모두가 짓는 방법을 알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것에 광해군은 몇 가지 신문물을 끼워 넣었다.
톱니바퀴다.
물론 현대시대에 보던 그런 톱니바퀴가 아니라 둥글게 만든 중심 틀에 나무막대를 끼워 만든 초보적인 톱니바퀴다.
그것을 활용해서 세로 운동방향을 가로 운동방향으로 조금 더 쉽게 만드는 방법을 도입했다.
거기다 방아가 위치할 자리에 쇠망치를 달았다.
곡식을 빻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철광석을 부수기 위한 장비였다.
이걸 만들기 위해 한성 인근의 장원에서 일단의 대장장이들이 오랜 연구를 했다.
그 결실이 천리가 넘게 떨어진 무산의 두만강가에서 실현을 보았다.
군기시의 야장들을 제외한 모든 장원의 대장장이와 숯쟁이, 목수가 무산으로 넘어왔다.
본격적으로 쇳물을 얻기 위한 로와 숯을 만들기 위한 가마가 이주 여진인들의 집단 거주지와 마주한 두만강 건너 조선 땅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때가 완연한 봄으로 들어서던 선조 17년 4월이었다.
5월로 접어들자 광해군이 이름붙인 무산 철산(鐵山) 배후단지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노비군들과 전향 여진인들이 거주하는 모옥 수천 채가 줄지어 들어선 모습이었다.
그런 마을을 장정 키의 두 배는 될법한 높이의 목책이 둘러쳐지고, 그 목책을 따라 눈빛을 형형히 빛내는 여진의 전사들이 경계를 섰다.
그런 무산 철산 배후단지 안에는 북위별시위의 지휘부와 여진 족장들의 협의체가 회의를 여는 관아와 관아에서 선발한 전사들로 꾸린 포청, 그리고 북위 별시위의 주둔지까지 마련되어있었다.
또한 조선의 상인들이 연 시장, 조선의 군의들이 근무하는 의원과 광해군이 강력히 주장해서 만들어진 방화소(防火所)란 곳도 들어서 있었다.
여진인들이 사냥해 얻은 모피와 가죽을 시장에서 조선 상인들과 곡식이나, 옷감, 양초 같은 생필품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했다.
나중엔 배후단지에 살지 않는 여진 부족들까지 찾아와 가죽을 팔고, 곡식을 얻어가는 일이 생겼다.
아프면 여진인이고, 조선군이고 가리지 않고 의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쯤 철산 배후단지라 명명 된 여진족 집단 주거지 강 건너 조선의 땅에 물레방아와 로, 숯가마가 즐비하게 늘어섰다.
이 지역엔 광해군이 철산 제철단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날, 광해군은 약속대로 북위별시위에 소속된 전 노비군을 면천시켰다.
눈앞에서 불살라지는 자신들의 노비문서를 바라보며 그들은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