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33화 (33/325)

제33화. 목숨을 맡다 (3)

니탕개는 조선의 천둥군 속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한필의 말을 노려봤다.

검은 색 안장에 검은 색 깃발을 꽂은 말은 분명 저들의 대장이었다.

흰 천을 내보이고 있으니 전투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자를 공격하는 것은 여진족도 수치로 삼는다.

결국 조선군 대장이 할 말이 있다는 뜻이니 겁먹은 쥐새끼처럼 수하들 속에 묻혀있을 수는 없었다.

전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니탕개가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섰다.

그런 그를 두 명의 심복 전사가 따랐다.

못마땅했지만 조선군 쪽에서도 두 명을 태운 한필의 말이 따라 내려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양측이 대치한 중간쯤에서 광해군과 니탕개가 마주했다.

사나운 인상의 니탕개는 들창코가 심했다.

그런 그의 거친 만주어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시선이 광해군이 아니라 투삼구라는 것에서 그 내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해 투삼구는 담담한 표정으로 무어라 대꾸했다.

그리곤 자신을 바라보는 광해군에게 조선말로 설명했다.

“날 배신자라 욕하기에 가족을 위해 곡식을 받고 그대에게 내 목을 맡겼을 뿐이라고 답했다.”

투삼구의 통역이 끝나기 무섭게 니탕개의 물음이 던져졌다.

시선의 방향으로 보아 이번엔 광해군을 향한 것으로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투삼구가 통역해주었다.

“정말 곡식을 주었냐고 묻는다.”

“그래요. 한 섬씩 주었죠.”

고개를 끄덕이는 광해군의 답을 투삼구가 통역했다.

한데 그 통역이 좀 길었다. 손짓도 몇 가지가 따르고.

행태로 보아선 한 섬이라는 도량형을 만주어로 해석할 말이 마땅치 않았던 모양이다.

투삼구가 해댄 손짓과 몸짓들이 말에 실리는 곡식의 양을 설명하는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그 설명을 들은 니탕개가 무어라 말했다.

니탕개의 그 말을 투삼구가 이번에도 설명했다.

“거짓말이라는군.”

피식 웃은 광해군이 언덕에서 서있는 조선군을 가리키며 말했다.

“맞아요. 거짓말. 그 거짓말에 속아서 저기 몇 천씩이나 되는 여진족 전사들이 서있죠.”

광해군의 뜻을 얼른 알아차리지 못해 자신을 어이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투삼구에게 광해군이 말했다.

“그냥 그대로 통역해요.”

고개를 갸웃거린 투삼구가 광해군의 말을 전했다.

그 말을 듣고 배를 잡고 웃던 니탕개의 표정이 점점 변하더니 종래엔 웃음을 잃고 소태 씹은 표정이 되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광해군이 피식 웃었다.

“지도 아는 모양이네. 거짓말로 저 정도 인원이 돌아설리 없다는 걸 말이야.”

광해군의 중얼거림을 듣고서야 투삼구는 광해군이 거짓말이라고 인정한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사실이라고 우기며 말싸움을 벌이는 대신 니탕개 스스로 광해군의 말이 사실임을 깨닫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걸 한 발 늦게 깨달아 찬탄을 머금은 투삼구에게 니탕개가 무언가를 묻고, 답을 듣더니 또 몇 가지를 더 물었다.

그리고 광해군을 바라보며 니탕개가 무어라 물었다.

그걸 투삼구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통역했다.

“니탕개가 묻는다. 자신들의 목도······. 맡아 줄 수 있느냐고.”

“어째 표정이 믿지 못하는 것 같네요?”

광해군의 물음에 투삼구가 고개를 저었다.

“저들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다. 저들도 조상과 신에 맹세하면 나처럼 지킬 테니까.”

“한데 표정이 왜 그래요?”

“그대의 방법이 먹혔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그런다.”

투삼구의 말에 다시 피식 웃어 보인 광해군이 니탕개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맡아줄 수 있어요. 당신들이 투삼구처럼, 저 위의 다른 여진족 전사들처럼 나를 위해 싸워준다면 책임지고 부족을 먹여 살리죠.”

광해군의 답을 투삼구를 통해 들은 니탕개의 표정이 한층 무거워졌다.

그런 그가 무어라 말하자 투삼구가 물었다.

“그걸 약속할 수 있는 그대는 누구인지 묻는군.”

“왕자. 조선의 왕자인 광해군이에요.”

광해군의 답에 통역 중이던 투삼구의 눈이 커졌다.

어린 사내가 숱한 제장들을 젖히고 나설 때부터 무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조선의 왕자이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진족 전사들은 조선군들이 광해군을 마마라 부르는 걸 들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마란 호칭이 누구에게 붙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여진의 성향에 비춰 권세 높은 가문의 아들쯤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투삼구에게 광해군이 말했다.

“뭐해요. 통역 해야죠.”

광해군의 재촉에 정신을 차린 투삼구가 니탕개에게 말했다.

반응은 투삼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놀라는 것도 잠시 니탕개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어라 말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군. 자신을 이긴 사람이 그저 그런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속이 빤히 보이는 니탕개의 말에 광해군은 그저 작게 웃어보였을 뿐이다.

그런 광해군을 바라보며 몇 마디를 더 남긴 니탕개가 말을 돌렸다.

“기다려 달란다. 다른 부족장들과 결정을 내어 다시 온다고.”

투삼구의 말에 광해군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니탕개에 무리에 속한 여진족은 모두 22개. 부족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부락이라 말하는 것이 옳을 터였다.

여진족 말로 어머니 부족을 뜻하는 씨족으로 가르면 3개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 3개의 씨족도 모두 유수의 부족은 아니다.

뭐랄까 명문 씨족이 아니라고 할까? 아님 중심 씨족이 아니라고 할까.

야인 여진의 명문 씨족인 와집(窝集), 호이합(虎尔哈), 와이객(瓦尔喀), 내음(內陰) 씨족은 이번 준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규모가 큰 그들은 주변의 군소 부족을 약탈해 자신들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번 준동에 참여한 이들은 부족한 가운데 또 그렇게 큰 부족에게 빼앗기고 정말 죽기 직전으로 내몰린 이들 뿐이다.

여진의 기상을 살려 주변을 정복한다는 둥 고상한 의미로 뭉친 것이 아니란 의미였다.

한마디로 먹고 살기 위해 나선 이들이란 소리다.

당연히 니탕개가 가져온 소식에 22명 부족장들이 난리가 났다.

난상 토론이랄 것도 없었다.

부딪치면 패하는 천둥군을 마주하고 곡식을 얻는 일이었다.

더구나 대상은 조선의 왕자였다.

승복하는데 부담이 없었다.

니탕개의 무리에 속한 여진족 족장들의 결정이 내려진 직후, 난데없이 회령구원군은 벌판에서 취사병이 되어야 했다.

그들이 가진 비상식량을 모조리 꺼내 굶주린 7천의 여진 전사들을 먹여야 했기 때문이다.

사흘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니탕개의 무리는 정신없이 먹어댔다.

타고 다니는 말을 잡아먹지 않은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광해군과 함께 북위별시위의 숙영지로 돌아온 니탕개의 무리를 바라보는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군 제장들의 눈이 놀람으로 크게 벌어졌다.

하지만 그들의 놀람은 기둥에 묶인 채 그들을 보고 있던 여진 포로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향하지 않고 애써 버틴 것이 바보짓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선택이 어떠할 지는 뻔했다.

남아있던 포로 9천과 새로 합류한 7천.

도합 1만 6천의 여진전사들이 광해군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겠노라고 조상과 신께 맹세했다.

직후, 그들 중 3천의 전사들이 먼저 곡식을 가지고 돌아갔다.

나머지는 2차 치중대가 도착하길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리길 8일.

니탕개를 비롯한 남은 부족장들의 눈빛에 불안감이 들어섰을 때쯤 도착한 2차 치중대는 1차의 배는 될법한 벼를 실고 있었다.

나머지 5천의 전사가 곡식을 가지고 자신들의 부족으로 돌아갔다.

족장들은 광해군을 위해 싸우기로 한 전사들과 함께 모두 남았다.

니탕개, 호정이, 투삼구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런 일련의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군도 강화되었다.

치중대와 함께 노비들이 충원되었고, 그들 속엔 지난 시간 광해군의 장원에서 쉼 없이 만들어낸 조선철포와 가형 소총, 그리고 다량의 화약이 포함되어있었던 것이다.

화약은 김억수가 목숨을 걸고 밀무역을 통해 확보한 다량의 황과 드디어 생산을 시작한 장원의 염초밭에서 거둔 염초로 화약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할 수 있게 되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물론 밀무역의 특성상 언제 끊어질지 모른다는 점에서 황의 수급은 여전히 불안 요인이기는 했지만 북위별시위의 고질적인 화약 부족 상황은 타개가 되었다.

또한 새롭게 지원된 조선철포의 경우엔 커다란 바퀴를 가진 포가(砲架)에 얹혀 있는 형태로, 말에 묶어 이동이 훨씬 자유로웠다.

포를 쏠 때도 말에서만 풀어내 포가에 얹혀둔 대로 그대로 쏘면 되었기에 방열과 이동 간 시간이 크게 단축되었다.

이렇게 새로 보급된 철포와 가형 소총으로 인해 북위별시위가 가진 무장은 철포 1백문, 조선철포 2백문, 포가형 조선철포 2백문, 승자총통 1천문, 가형 소총 3천정, 사전총통화자 10문, 신기전 20문이 되었다.

추가로 지원된 노비군으로 확충된 조선군의 수도 1만5천으로 늘었다.

여기에 전향한 여진족 기마병 1만2천이 포함되었다.

이로써 북위별시위의 총 군세는 2만8천에 달했다.

그 대규모 군세가 3차 치중대가 도착한 직후, 숙여지를 벗어나 북상하기 시작했다.

처음 여진족이 조선의 국경을 침탈하는 사태엔 야인 여진의 일부만 참여했다.

이미 언급했던 대로 야인 여진의 중요 씨족들은 발을 담그지 않았다.

이 침탈이 조선군의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불러왔고, 몇 번의 대회전 끝에 봉기한 여진족이 패배했다.

물론 여러 개의 부족 중 일부만 패배한 일이니 다른 부족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조선군이 두만강 인근의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북상해 안도(安图)를 거쳐 둔화(敦化) 주변으로까지 진출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야인 여진의 가장 큰 씨족들 중 두 곳인 내음과 호이합, 두 씨족이 대규모 군세를 갖춰 조선군에 맞서왔던 것이다.

5만에 달하는 기마대가 송화강의 지류를 후방에 두고 배수의 진을 쳤다.

그에 맞선 북위별시위는 1만5천의 조선군을 중군으로 삼고, 투삼구와 니탕개를 비롯한 전향 여진족 기마병 1만2천을 둘로 나누어 양쪽 날개로 삼았다.

철포 5백문을 길게 배치한 북위별시위는 여전히 건재한 9천의 살수들을 3개로 나누어 그중 하나를 포대 앞에, 나머지 둘을 포대 뒤에 두었다.

그리고 맨 선두에 가형 소총병 3천을 세우고, 그 양옆 사선으로 승자총통병 1천을 5백씩 나누어 배치했다.

개전은 역시 모두가 기마병인 여진이 시작했다.

자그마치 5만의 대병력이 온 만주벌판을 가득 메우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작전도, 진형도 아무것도 없는 돌격이었다.

하긴 병력도 우세하고, 화포의 제약도 있으니 저들에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다.

그런 이들을 향해 북위별시위의 철포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천지를 진동시키는 포격음이 만주벌판을 가득 채웠다.

1백문씩 나누어 5백문이 차례차례 포격하는 동안 달려오던 여진족들이 무수히 쓰러져갔다.

그럼에도 이전처럼 소리에 놀라 도주하고 엉키는 기마들은 적었다.

그들도 말의 귀를 틀어막아 소리를 감소시키는 방법을 취한 것이다.

여전히 말이 움찔 거리기는 했지만 이전처럼 말을 들어먹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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