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목숨을 맡다 (2)
니탕개의 여진족 전사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꼬리도 잡지 못한 채 벌써 4천이 넘는 전사들을 잃었기 때문이다.
결국 니탕개의 여진족 전사 전체가 광해군의 회령구원군을 잡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1만1천의 니탕개의 여진족과 1천 가형 소총병을 태운 조선군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만주 벌판에서 벌어졌다.
그렇게 양쪽이 정신없이 말을 달리길 일각.
느닷없이 출현한 전향 여진족의 기습에 후방이 무너졌다.
그러자 도주하기만 하던 가형 소총병을 태운 조선군 기마대가 반전해 좌로 돌아들어오며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그들을 요격하기 위해 방향을 틀었던 니탕개의 전사들을 향해 숨어있던 오백 승자총통병이 일제사를 퍼부었다.
전후좌우 포위된 상황이었다.
수가 더 많은 니탕개의 군대였으나 사방에서 총과 싸움이 벌어지자 혼란에 휩싸였다.
특히 자신들과 같은 여진족의 공격에 완전한 패닉에 빠졌다.
결국 과중한 피해와 혼란을 견디지 못한 니탕개가 전투를 단념하고 퇴각했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니탕개 휘하의 여진족 전사들의 수는 고작 7천에 불과했다.
4천을 전투에서 잃은 것이다.
그에 반해 전향해 조선군에 협력한 여진 전사들은 2백 남짓만을 잃었을 뿐이다.
니탕개 군대의 혼란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결과였다.
니탕개로써는 조선군과 처음 접촉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를 때까지 한 시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의 전투로 반절이 넘는 병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퇴각하는 니탕개의 여진족 전사들을 조선군은 곧바로 쫒지 못했다.
먼 거리를 달려야 했던 가형 소총병을 태웠던 말들이 너무 지친 까닭이다.
과거처럼 달리면서 말을 갈아 탈수 있었다면 조금 달랐겠지만 기수와 승마총병이 등을 맞댄 채 안전벨트로 묶여있는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자칫 잘못 움직이면 낙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각기 10발 이상을 쏜 가형 소총의 정비도 필요했다.
광해군이 일각의 휴식을 명령했고 승자총통병들과 전향한 여진 전사들이 경계를 서는 가운데 가형 소총병들의 총기 정비가 진행되었다.
총구에 빡빡하게 맞아 들어갈 정도로 천을 감은 활대에 기름을 먹여 총구를 닦아냈다.
여러 번을 닦아냈지만 탄매가 여전히 묻어나왔다.
그걸 또 다시 몇 번씩 반복해서야 총기 정비가 끝났다.
그런 가형 소총병들과 전향한 여진족 전사들이 물 몇 모금과 치중대가 준비해주었던 주먹밥을 나누어먹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광해군은 상당히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전향한 여진족 전사들은 광해군의 지시를 두말없이 잘 따랐다.
흔들리지도 않았고, 제멋대로 굴지도 않았다.
솔직히 이정도로 깨끗하게 전향하리라고는 광해군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몇몇은 이탈하고, 또 몇몇은 명령과 달리 돌진하거나 니탕개의 여진족에 투항 할 거라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광해군은 출발 전, 가형 소총병들과 승자총통병들에게 밀명을 내려놨었다.
함께 말을 달리는 여진 전사가 도주하거나 니탕개에게 투항하려한다면 가차 없이 쏴 죽이라고.
또한 총을 파기하고 자결하라 명해 두었다.
그런 광해군의 명령을 가형 소총병들과 승자총통병들은 두말없이 수긍했다.
니탕개의 여진족에게 사로잡힌 포로의 처분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북위별시위 본대를 떠나던 가형 소총병 1천과 선발된 5백 승자총통병들은 죽음을 각오한 상태였다.
그것은 조선군 5백 기마병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종성에서 벌어졌던 일을 거울삼아 자존심 센 북방의 기마병이 아니라 경군과 오위에서 보내준 이들로 구성되어있었다.
그런 이들을 천천히 둘러보던 광해군이 주먹밥을 먹고 있던 투삼구에게 다가섰다.
“한 가지만 묻죠.”
“말해라.”
“맹세를 어기는 이들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요?”
“이유는 알고 있던 게 아닌가?”
“조상과 신께 맹세한 걸 어기면 죽어서 조상들의 땅에 들 수 없다는 거 말인가요?”
“그렇다.”
“단지 그거 하나 때문에 맹세를 지킨다고요? 자신의 죽음이나 내세의 편안보다 여진의 명예를 소중히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요?”
“이상하군. 맹세를 어기는 것이 명예라 생각하다니.”
투삼구의 답에 광해군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질문을 했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런 광해군에게 투삼구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말뜻을 안다. 걱정대로 눈앞의 이득에 그 맹세를 어길 놈이 나올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째서요?”
“부족이 그대의 곡식에 기대어 살고, 연명한다. 그게 흩어지면 부족은 죽는다. 니탕개는 그대처럼 곡식을 주지 못했다. 답이 되었나?”
말인즉슨 곡식을 안정적으로 제공하는 한 광해군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니탕개가 곡식을 공급할 수 있게 된다면 광해군과의 맹세를 깨는 이들이 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광해군의 생각을 그의 표정에서 읽어냈던지 투삼구가 말했다.
“그래도 맹세를 깨는 이들은 굉장히 적을 것이다. 우리에게 맹세란 신성한 것이니까. 물론 그대가 부족을 먹여 살릴 때의 일이겠지만.”
“그거야 뭐······.”
솔직히 그건 걱정하지 않는다. 애초에 여진족을 품겠다는 계획을 세웠을 때 그 정도는 감안하고 있었다.
광해군도 아무런 이득도 없이 여진족이 조선에 협력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니까.
“······ 걱정하지 마요. 당신들이 내게 협력하는 이상 굶게는 두지 않을 테니까.”
이어진 광해군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걸 위해 지금쯤 김억수가 보낸 2차 치중대가 함흥을 출발했을 터였다.
뿐인가, 3차, 4차, 5차. 지속적으로 치중대가 들어올 것이었다.
물론 그것으로 모든 여진족을 먹여 살리지는 못한다.
야인 여진. 그중에서도 일부만 가능하다.
김억수의 계산대로라면 다음 추수 때까지 10만 내외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양이라 했다.
부족의 장정이 모두 전사인 여진족의 특성을 생각하면 3만에서 4만 가량의 전사들이 조선군에 합류할 수 있게 된다.
그 정도가 한계였다.
더구나 광해군은 그들을 모두 전사로 쓸 생각도 아니었다.
그런저런 생각이 깊어지는 광해군을 투삼구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간단한 식사와 휴식이 끝나자 조선군 회령구원대가 다시 말에 올랐다.
직전 전투에서 사용된 말이 아니라 함께 끌고 다니던 조금 더 생생한 말이었다.
일각을 쉬었다지만 둘을 태우고 미친 듯이 달렸던 말의 피로가 아직 제대로 풀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
니탕개는 고민했다.
목표인 회령 앞에 있는 두만강이 코앞이었다.
하지만 도강을 하려다 직전에 마주쳤던 조선의 천둥군에 뒤를 잡히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천둥군.
여진족들이 화포로 무장한 조선군에게 붙여둔 별명이었다.
솔직히 화포를 가진 조선군을 여진족은 적지 않게 겪어보았다.
4군6진을 개척하던 세종 조부터 조선군이 화포로 무장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처럼 대량의, 그리고 성능이 뛰어난 화포로 무장한 이들은 없었다.
끊임없이 천둥소리를 내며 벼락을 치는 저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진족 전사가 없었다.
사실 여진족 전사에게 조선군의 화포는 상당히 골치 아픈 조재였다.
화력도 문제지만 천지를 떨어 울리는 그 포격음이 더 큰 문제였다.
여진족 전사들이 전부 말을 타는 기마병이었기 때문이다.
소리에 민감한 말을 타고 달리며 싸우는 이들이다 보니 조선군 화포소리에 제대로 싸움을 이어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그 천둥군의 이동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에 착안해 이번 작전을 만들었는데 다수의 천둥군이 따라오며 실패했다.
그나마 이번에 따라온 천둥군은 소음이 큰 것은 아니었지만 거리가 문제였다.
자신들의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여진족을 무참히 사살했기 때문이다.
그런 천둥군에다 배신자들까지 붙었기에 부담이 컸다.
그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니탕개에게 수하가 달려왔다.
“왜?”
묻는 니탕개에게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수하가 언덕 위를 가리켰다.
그곳엔 빌어먹을 그 조선의 천둥군이 와 서있었다.
“전투준비!”
비상을 알리는 니탕개의 명에 쉬고 있던 여진족 전사들이 모조리 말에 올랐다.
한데 그렇게 말에 오른 니탕개의 여진족 전사들이 달려 나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광해군의 조선군이 달려 내려오지도 않았다.
그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병력적 열세인 광해군의 조선군이 니탕개의 여진족에 돌격을 감행할리 없다.
당연히 달려 내려가도 반전해서 니탕개의 여진군을 뒤에 달고 달리면서 총을 쏘며 전투를 치러야 하는데 그러자면 내려가서 반전해야 한다.
알겠지만 말을 달리다 반전하는 것은 상당한 기술과 거리를 요한다.
기마술이야 여진족 전사는 물론이고 조선군 기마병도 뛰어났다.
문제는 반전하기 위한 거리다.
자동차도 유턴하자면 큰 회전반경이 필요한데 말은 그보다 훨씬 큰 회전반경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연히 속도도 줄어든다.
가뜩이나 한명씩 탄 니탕개의 여진군에 비해 둘씩 탄 조선군의 기마가 가속에 불리한데 속도까지 줄였다간 여지없이 뒤를 잡힐 것이다.
그러니 서서 기다리다 저들이 달려오면 이전처럼 뒤돌아 도주하면서 총을 쏘아대는 것이 광해군이 세운 기본 전술이었다.
그에 반해 따라가면 무조건 자신들이 손해라는 걸 아는 니탕개의 여진군도 달려들지 못했다.
그렇다고 뒤를 보이고 도주할 생각도 못했다.
맨 처음 접촉했을 때처럼 주변을 따라 달리며 쏘아대면 그 역시 여진족 전사들이 불리할 테니까.
그런 양측의 입장이 부딪치며 서로 멀뚱히 말에 올라 버티는 시간이 길어졌다.
가을이라지만 한낮의 땡볕은 꽤나 강렬했다.
그 아래에서 버티고 서있자니 양측이 다 고욕이었다.
하지만 조선군 보다는 니탕개의 여진족이 더 힘겨워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서있던 여진족 전사들 속에서 스르륵, 말에서 떨어지는 이들이 보였다.
무슨 이유지 몰라 어리둥절한 광해군에게 뒤에 가형 소총병을 태운 채 곁에 서있던 투삼구가 말했다.
“굶주렸기 때문이다. 니탕개의 전사들은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광해군은 무언가 돌파구가 생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말위에 올라있는 7천의 여진족을 죽이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말이다.
잠시의 고심 끝에 광해군은 매복해 있던 전향 여진족 전사들을 불러 조선군과 함께 언덕위에 세웠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온 태평이란 조선군 기마 군관을 곁으로 불렀다.
“내가 저들에게 갔다 올 것이니 이곳에서 병사들과 함께 기다리세요.”
“마, 마마!”
화들짝 놀라는 태평에게 광해가 말했다.
“만에 하나 돌아오지 못한다면 기존의 작전대로 진행하세요. 괜히 구한답시고 달려오거나 하면 차후에 그 죄를 물어 목을 벨 것이에요. 이건 군령이에요.”
그 말 하나로 놀란 눈을 크게 뜨고 있는 태평의 입을 다물린 광해군이 투삼구를 바라봤다.
“따라와요.”
그 말을 던진 광해군이 품에서 하얀 무명천을 꺼내 흔들며 언덕 아래로 말을 몰았다.
광해군이 움직이자 전향한 여진족 전사들이 모두 말을 몰아 내려가려했다.
“멈춰서 기다려라! 우리의 목을 맡긴 자의 명이다.”
자신의 외침에 전향한 여진전사들이 멈춰 서자 그걸 확인한 투삼구가 서둘러 저만치 내려간 광해군을 따라 달렸다.
애꿎게 덩달아 딸려가게 된 투삼구의 뒤에 탄 승마총병의 표정이 울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