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쇠 사업
선조의 허락을 받은 광해군은 함경도로 나가있는 정철에게 서신을 한 장 띄우고, 김억수를 앞세운 채 충남 보령으로 내려갔다.
보령의 작은 산인 고만산으로 향한 광해는 그곳 기슭에 움집을 짓고 시묘 살이 중인 이산해와 마주했다.
“그대가 요새 다른 주인을 모신다는 소리를 들었어도 믿지 않았더니 진정이었던 모양일세.”
광해군을 안내해온 자신을 향한 이산해의 차가운 음성에 김억수가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대감.”
이로써 자신의 그늘을 벗어났음을 인정하는 김억수에게서 시선을 돌린 이산해가 광해군을 바라봤다.
“상(喪) 중입니다. 상중에는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떠나간 부모를 기리는 것이 법도. 군이 그도 모를 리는 없을 터. 어이 이리 찾아오셨는지 모르겠으나 돌아가십시오.”
야멸찬 이산해의 말에 광해군이 답했다.
“가라니 가긴 하겠습니다만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부모를 잃은 이가 무얼 더 후회하겠습니까? 상관치 않을 겁니다.”
“그러시다면야. 정철 대감에게 서신을 띄우는 내게 김 대행수가 하도 서인만 위하지 말라 청해서 찾아왔더니 괜한 걸음을 한 모양입니다.”
그 말만 던져놓고 두 말없이 신형을 돌리는 광해군의 뒷모습에서 미련이 없음을 읽은 이산해의 시선이 김억수에게로 향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산해에게 김억수가 말했다.
“광해군께서 큰 사업을 하려하십니다. 소인이 보기에도 어마어마하게 큰 것이라, 그 이익이······.”
“뭐하나. 얼른 오지 않고!”
이미 저만치 내려간 광해군의 부름에 당황한 표정의 김억수가 이산해에게 깊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서둘러 따라 내려갔다.
그렇게 석양을 등지고 산을 내려가는 광해군과 김억수를 움집에서 나와 선 이산해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산을 내려오자 날이 저물어 길을 떠날 수 없었던 광해군은 보령 관아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물론 그러라고 시간을 맞춘 것이기도 했다.
“오겠습니까?”
걱정 어린 김억수의 물음에 광해군이 빙긋이 웃어보였다.
“옵니다. 그냥 던져진 이익이었다면 외면할 수도 있겠지만 서인이 거론 되었으니 동인의 영수라 불리는 이산해 대감은 절대로 외면하지 못할 겁니다.”
광해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에서 보령 현감의 음성이 들려왔다.
“광해군 마마. 이산해 대감이 찾아오셨습니다.”
상중인 사람이 시묘 살이 중인 움집을 벗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결심이 확고하다는 뜻이었다.
놀란 눈을 뜨는 김억수에게 다시금 빙긋이 웃어 보인 광해군이 밖을 향해 답했다.
“모시세요.”
광해군의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열리고 상복 차림의 이산해가 들어섰다.
그런 그를 보고 조용히 일어선 김억수가 고개를 조아려보이곤 물러갔다.
보령 현감도 문을 닫고는 들어서지 않았다.
그렇게 단 둘만의 자리가 되자 광해군이 자리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그 권유에 자리에 앉은 이산해가 광해군을 바라봤다.
“사업을 하려 하신다고요?”
“그러려 합니다.”
“무슨 사업입니까?”
성리학을 공부한 왕자가 재물을 멀리하지 않고 사사로이 사업이나 벌이려 하느냐는 따위의 말이 없어 좋았다.
하긴 그럴 사람이었다면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긴 했다.
그래서 광해군의 답도 빙빙 돌리지 않고 곧바로 나왔다.
“쇠입니다.”
그간 광해군이 벌인 쇠에 관련한 소식은 모두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디의 어떤 쇠를, 어떤 사업으로 일으키려 하시는 것입니까?”
“함경도에 무산이란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제가 원하는 쇠가 있습니다.”
“철맥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좋은 철맥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부정적인 이산해의 말에 광해군이 어깨를 으쓱였다.
“맞습니다. 좋은 철맥은 아니지요. 아마 다른 이들에겐 전혀 쓸모없는 곳일 겁니다.”
“그 말은 다른 이들과 달리 광해군께는 쓸모가 있는 철맥이라 들리는군요.”
“아실 텐데요. 설마 아직 모르십니까?”
어린 왕자의 도발에 잠시 눈가를 찌푸렸던 이산해가 답했다.
“저품질의 철광석에서 쇠를 뽑아내셨다더니 그곳에서도 하려 하시는 군요.”
고개를 끄덕인 광해군이 답했다.
“조만간 그 기술이 완벽해 질 겁니다.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다는 소리죠. 그걸 그곳에서 쓰려합니다.”
“굳이 그곳이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저품질의 철광은 남쪽에도 꽤 있는 걸로 압니다만.”
“대감께서 내려오신 고만산보다 더 큰 철맥이 땅위로 드러난 곳입니다. 캐기에 그보다 쉬운, 또 그보다 많은 철맥이 있다면 그리 하지요.”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만한 철맥이라면 자신조차 욕심이 날 테니까.
“하지만 크고 쉽다 해도, 그걸 얻기는 어렵지요. 함경도란 땅이 그리 녹록한 곳은 아니니 말입니다.”
“그럴 겁니다. 얻기 위해선 피가 흘러야 하니까요. 해서 제의를 하는 겁니다. 피를 내라. 그럼 대가를 주겠다.”
직접적인 광해군의 말에 잠시 그를 바라보던 이산해가 말했다.
“누구의 어떤 피를 얼마나 달라는 것인지, 또 얼마큼의 대가를 주겠다는 것인지가 중요하겠군요.”
“설마 동인들의 소중한 자제들의 피를 내놓으라 요구하겠습니까?”
“하면······?”
이산해의 물음에 광해가 빙긋이 웃으며 답했다.
“노비를 주십시오. 그 대가로 무산 철광이 완비되면 그곳에서 나오는 수익을 드리지요.”
“얼마큼의 수익이 주어질지는 여전히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아직 짐작이 되지 않아서요. 명의 상단 서른 곳이 우리가 만들어낸 철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한정으로 구입하겠다고 하더군요. 아시죠? 무산. 명과 참 가까운 거.”
“명은 철의 주산지입니다. 그런 명의 상단이 조선의 철을 사겠다고 했단 말입니까?”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는 군요. 명에 아시는 분들 좀 있으신 걸로 압니다. 알아보시면 답이 빠르겠군요. 물론 그 와중에 서인이 모두 차지하게 되긴 하겠습니다만.”
그것으로 입을 다무는 광해군을 지그시 바라보던 이산해가 물었다.
“어느 정도나 원하시는 겁니까?”
“피가 많이 흐를 겁니다. 적당히 흐르다 멈추면 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피만 보게 되겠죠.”
“여진과의 큰 싸움을 생각하시는 군요.”
“처음엔 피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나중엔 힘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리라 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규모의 병력이 필요함은 분명했다.
“수가 적어도 만 단위는 되어야 한다는 소리신데, 그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아십니까?”
“일전에 내가 노비군을 만들어 함경도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들었던 소리와 같군요. 혹시 그렇게 보낸 노비군이 어찌 싸웠는지는 들으셨습니까?”
광해군의 반문에 이산해는 답을 하지 못했다.
그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는지, 그럼에도 왜 그들의 공이 묻혔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걱정을 거두지 않았다.
“그 수가 일만과 비할 바는 아니지요.”
“같을 겁니다.”
“어째서요?”
“제가 새로 뽑은 노비군을 데리고 간 날, 그 앞에서 살아남은 노비군을 면천시킬 거거든요.”
광해의 답에 이산해의 눈이 커졌다.
그런 그에게 광해군이 말을 이었다.
“그리곤 데려간 노비군들에게도 말 할 겁니다. 보았냐? 목숨을 걸어야 하겠지만 이기고 살아남으면 면천이 될 거다. 왕실의 이름으로 내가 약속한다. 라고 말이죠.”
“왕실의 이름을 거론 하는 것은······.”
“주상 전하의 윤허가 있어야 하는 일이지요.”
그 말을 하는 광해의 표정상······.
“허락······, 하셨군요.”
“예. 그러니 제가 움직이기 시작했겠지요.”
그 말은 선조도 광해군의 사업에 동참했음을 뜻했다.
그건 동인이 불참해도 이 사업은 시작 될 거란 소리였다.
그런 상태에서 동인이 빠지고 서인만 참여한 채로 사업이 정말로 성공한다면······.
“흐음······.”
침음을 흘리는 이산해에게 광해군이 말했다.
“정말로 김 대행수가 사정해서 왔다니까요.”
이건 거짓말이다.
아마 이산해도 알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거절하기 어려운 사업이라는 것도 알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면 김억수를 계속 도와야 한다는 무언의 동의도 하게 된다는 것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알기에 이산해의 갈등이 깊었다.
그런 이산해를 바라보는 광해군은 느긋했다.
절대로 포기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광해군은 예정대로 한성으로 떠났다.
그렇게 떠나는 광해군의 표정은 떠오르는 햇살처럼 한없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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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 한성에 도착했을 때 장원에는 선조가 보내준 화약 1만2천근과 승자총통 1천 문이 도착해 있었다.
조선 팔도의 화약과 승자총통 대부분을 모아온 것이라는 금부도사의 말이 아니어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양이었다.
화약이 도착한 장원에서 한때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가형 소총을 만들며 강선을 완성해낸 ‘소총 개발조’ 전원에게 사전에 약속했던 대로 집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부러워하는 철포 개량조에게 광해군이 약속했다.
<기회는 이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수많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것이고, 그때 또 어마어마한 상금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니 기대해도 좋습니다.>
광해군의 약속에 풀이 죽어있던 ‘철포 개량조’ 사람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저 단순히 격려차원에서 하는 소리가 아님을 그들도 알기 때문이다.
평소 광해군이 이것저것 물어보고 준비하고 있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 잔뜩 있음을 그들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 기대 속에 ‘화약 개량조’가 발을 담갔다.
화약의 대량생산 기술이 완성되고 차후 화약의 성능 개량이 성공하면 그들에게도 큰 상을 주마 약속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모든 이들의 기대 속에 장원이 활기로 채워졌다.
그런 이들과 달리 상을 탈 기회를 얻지 못한 다른 장인들에게 광해의 말이 건네졌다.
<지금부터 한 달 안에 내가 원한 물량을 만들어 내세요. 그렇다면 집은 아니지만 일인당 면포 50필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면포를 부담하게 될 것이 분명한 김억수의 눈이 크게 부릅떠지는 가운데 장원 전체가 환호성으로 떠나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내 장원 전체가 미친 듯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동인과 서인들이 모아 준 노비들의 수는 물경 1만2천에 달했다.
하긴 성종 연간에 조선의 인구가 100만호 360만 명, 대장에 기록된 노비가 150만 명이라 하였다.
아마 대장에 기록되지 아니한 노비들까지 계산한다면 그 수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 1만2천이란 숫자에 놀랄 필요는 없었다.
병조판서가 된 이이의 끊임없는 설득으로 선조가 광해군에게 보내준 관군의 수는 1천, 오위에서 뽑은 병력 2백에, 경군 3백, 그리고 각지에서 뽑아 올린 병력 5백 이었다.
그들을 지휘해 온 이는 무장이 아니라 호조정랑(戶曹正郎)이었던 권률이었다.
나라의 호구(戶口)와 공부(貢賦), 전량(田糧), 식화(食貨) 등의 업무를 관장하는 호조의 관리가 책임자로 나온 것으로 선조와 조정이 이 일을 어찌 바라보고 있는지 극명하게 알 수 있었다.
여하간 그 덕에 또 한명의 신화를 마주할 수 있게 된 광해군은 떨리는 가슴을 애써 가라앉혀야만 했다.
그 사이 장원이 만들어낸 조선철포는 2백문, 가형 소총의 수는 1천 정이었다.
가히 잠자고 똥 싸는 시간도 아껴가며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 덕에 그들은 광해군의 약속대로 면포 50필씩을 상으로 받았다.
그렇게 환호하는 이들을 데리고 광해군은 동인과 서인이 모아준 노비들에게 가형 소총 탄환을 만들도록 했다.
3일을 교육과 생산을 병행한 결과 출발 당일 수레에 실린 가형 소총 탄환의 수는 모두 10만발이었다.
물론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함흥에 도착해 훈련과 탄환 생산을 병행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굳이 노비를 시켜 탄환을 만든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들이 야전에서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훈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화포를 지급받지 못하게 될 인원들이 쓸 창칼은 함흥의 군영으로 곧바로 보내졌다.
가지고 출발했을 경우 일어날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렇게 준비를 갖춘 광해군의 군대가 한성을 떠난 것은 무더위가 한창인 선조16년 7월 하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