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승패병가지상사(勝敗兵家常事)
훈융진에서 벌어진 전투로 1만 여진족 전사들 중 3천이 죽고, 그보다 많은 수가 다쳤다.
부상자들 중엔 중상을 입은 이들이 많아 사망자의 수는 지속적으로 늘어가고 있었다.
또한 전투의 와중에 선봉에 섰던 번호 우을지가 포살(砲殺)되었다.
그로인해 여진족의 움직임이 둔화되었다.
이 놀라운 전과에 조선군 지휘부는 환호가 아니라 당황했던 모양이다.
멈춰버린 여진족만큼이나 조선군도 움직임을 멈추고 어쩔 줄 몰라 했다.
하긴 버린 패 취급하며 내돌린 이순신의 부대가 전세를 뒤바꿀 정도의 승전을 거두었으니.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몇몇 제장들은 이순신부대의 빛나는 승리가 오히려 자신들의 개전 초기 실수들을 부각시키게 되었다는 것에 크게 당황했다.
그 결과 자신들의 실수를 덮고 한성 조정에 보고할 전공을 가장 빨리, 크게 만들어야 한다는 조급함에 휩싸였다.
결과적으로 함경도 병마절도사는 경원성에 모여 있던 방어부대 중 일부를 내어 강 건너 여진의 부락들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표면적으로는 경원성에서 죽어간 백성들의 복수이자, 여진족들에 대한 경고였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실수를 덮을 만큼의 전공을 만들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그렇다보니 너무 과했다.
여진이 조선에서 벌인 짓과 다름없는 무차별적인 학살과 방화, 약탈이 여진족의 부락에서 벌어졌다.
우을지의 준동에 협력한 곳, 하지 않은 곳 가리지 않고 수백 개의 여진 부락이 불탔고, 수천이 죽었다.
베어내 한성으로 보내진 수급만 수백 급이었으니 그 참혹함은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런 일련의 일들이 일어나는 과정 속에서 훈융진의 이순신 부대는 버려져 있었다.
죽어나간 살수들의 수를 채우기 위한 병력 증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소모된 화약조차 보급 받지 못했다.
오죽하면 강 건너로 쏘아낸 철환과 장군전을 회수해 재사용 가능한 것들을 선별해 채우고, 망가진 것들을 수리하느라 분주했다.
대체로 포수들은 초보적인 대장장이이자 숙련된 목수였고, 석공이었다.
철을 녹여 포탄으로 사용되는 철환을 만들기도 하고, 수시로 쪼개지거나 부서지는 격목을 주변 나무들을 깎아 만들었다.
때론 부족한 철환의 개수를 채우기 위해 주변의 돌을 깎아 둥그런 석환을 만들기도 했다.
훈융진의 이순신 부대 포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진 재주를 모두 부려 망가진 격목을 만들고, 철환을 정비하고, 부족한 포탄을 채우기 위해 돌을 깎아 석환을 만들었다.
저물어 가는 노을 아래서 그런 병사들을 바라보며 서있는 이순신에게 이억이 다가왔다.
“오늘도 지원군은 오지 않을 모양입니다.”
이억의 말에 이순신이 경원성이 있을 남쪽을 바라봤다.
“그쪽도 바쁘겠지.”
“강을 건널 병력은 있고, 이곳에 보낼 병사들은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억의 분노는 이해한다.
그가 지휘했던 살수들 중 서른이 죽고, 스물이 크고 작은 부상으로 전투를 치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남은 살수들의 수는 겨우 90명.
그들로는 이전과 같은 전투가 벌어진다면 결코 성벽을 지켜낼 수 없을 터였다.
그렇다고 그와 함께 경원성의 지휘부를 씹어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다려 보세. 무언가 생각이 있겠지.”
솔직히 이순신은 지금 경원성에 머물고 있는 조선군 지휘부의 방법에 동의하지 않았다.
경원성에서 벌어진 약탈에 대한 보복과 조선군의 위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지만 그 범위가 너무 크고 무차별적이었다.
베어져 보내온 수급들을 정비해 한성으로 보내는 과정에서 버려지는 어린 아이와 여인들의 수급이 한성으로 보내지는 성인 남자들의 수급보다 훨씬 많을 지경이었다.
그건 두려움보다는 반발을 불러올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이 이순신의 생각이었다.
그런 이순신에게 이억이 물었다.
“며칠 전에 드디어 관찰사 영감이 도착했다던데······. 들으셨습니까?”
“듣긴 했네만······.”
“조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억이 기대할 만도 했다.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다수의 함경도 고위 지휘부는 동인 출신의 문관들이다.
그것이 동인과 척을 진 광해군의 지지를 받는 이순신을 밖으로 돌린 연유였다.
하지만 정철은 자타공인 서인의 거두였다.
동인과 서인의 정치적 대결 양상을 보면 이순신이 동인들의 배척을 받는 다는 것만으로도 서인의 지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 이억의 기대에 이순신은 그저 좀 전과 같은 말을 해줄 뿐이었다.
“기다려 보세.”
그런 이순신을 답답해 할만도 하건만 이억은 꽤나 순순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알겠습니다. 기다리라 말씀하시니 따르겠습니다.”
지난 전투 이후, 이억은 이순신이란 자의 용병술에 완전히 매료되어있었다.
솔직히 이억은 이순신이 전방에 모든 철포를 배치할 때 잘못이라 생각했다.
아마 제 정신을 가진 장수라면 모두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다만 적을 코앞에 둔 적전이었기에 지휘관의 명을 두 말없이 따랐을 뿐이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 결정으로 인해 큰 우환을 맞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전투를 치르고 난 이후의 결과는 이순신이 맞고 이억, 자신이 틀렸다는 게 증명되었다.
만에 하나 이억이 지휘관이었다면 요새 사방으로 철포를 배치했을 것이고, 이전과 같은 전투의 결과는 결코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마 월성한 적에게 휩쓸려 지금쯤 모조리 까마귀밥이 되어 있겠지.
그것만 생각하면 이억은 모골이 송연했다.
그래서 전투 이후, 이억은 이순신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일단 믿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그저 기다려 보자고만 하는 이순신의 말을 두말없이 따르는 이유였다.
*****
이억의 기대가 옳았을까?
정철이 관찰사로 부임하고 얼마 안 있어 훈융진으로 일단의 살수들과 화약이 보급되었다.
1백 정도의 살수와 50명 남짓한 기마병, 그리고 3백 근 가량의 화약에 불과했지만 이순신에겐 천군만마보다 더 소중한 보급이었다.
훈융진에 보급이 이루어진 것은 다행이었으나 조선군 전체로 보면 오히려 혼란이 커졌다.
월강 전투를 금하고 여진을 달래 주변의 안정을 꾀하려는 정철과 달리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기존의 함경도 고위지휘부는 지속적인 월강 전투를 요구했다.
그 파열음이 결국 한성의 조당에 닿았다.
수많은 설전이 조정에서 벌어졌다.
마치 사생결단이라도 내려는 듯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동인과 서인들의 고성으로 가득 찼던 조정은 이이가 서인의 손을 들어주면서 급변을 맞았다.
선조가 이이의 주청을 받아들여 개전초기의 실책을 문책하여 기강을 바로 세우고 대대적으로 함경도 북방의 방어를 강화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파직되어 귀양보내지고, 새로 무과출신의 무장인 김우서가 병마절도사로 제수 되었다.
아울러 경원성과 일대의 초기 방어실패의 책임을 물어 경원부사 김수와 판관 양의사의 참수가 결정되었다.
*****
그 소식이 전해진지 얼마 되지 않아 광해군은 이순신의 서신을 받았다.
한참 그 서신을 읽은 광해군이 이이를 찾았다.
“김수를 살려주라고요?”
“예.”
“하지만 그는 조선의 방비를 어렵게 만든 이로 그 책임이 가장 무거운 자입니다. 동인들조차 그의 구명에 나서지 않았을 정도랍니다.”
“동인들이 나서지 않은 것은 그를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들에게까지 화가 오는 것을 막으려 들었기 때문이겠지요.”
“그건······.”
부정할 수 없었던지 그에 대해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이이에게 광해군이 말을 이었다.
“김수의 초기 대응이 미숙했다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열심히 싸운 자라는 건 부정 할 수 없죠. 실제로 경원성의 무기고와 식량창고를 지켜낸 공도 있고요.”
“그러나 그때 입은 경원성 백성들의 피해가 말로 할 수 없이 극심했습니다.”
“성이 뚫린 건 서문을 버리고 달아난 만호의 책임이라 들었습니다.”
“실무는 그럴지 모르나 여하간 지휘 책임자는 부사인 김수였으니까요.”
“그렇게 보면 제 소임을 내팽개치고 도망 다닌 북도우후와 명령을 어기고 병력을 보내지 않은 길주 목사도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 그건······.”
자신의 말에 당황하는 이이에게 광해군이 말했다.
“그들이 서인이기 때문에 머뭇거리는 것입니까?”
“군 마마!”
“압니다. 제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인 편에 서게 된 대감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서인들은 그러하겠지요.”
곧바로 이어진 광해군의 말에서 자신에 대한 오해는 없음을 확인한 이이가 다시 담담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을 거론하고 나서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 될 겁니다.”
“김수를 그들처럼 그냥 둬 달라는 것은 아니에요. 책임을 물어 파직해요. 대신 목숨만 살려달라는 겁니다. 그래, 맞다. 백의종군. 그거 시켜서 이순신 밑으로 보내주세요.”
다시 말해 그걸 조건으로 서인 출신인 북도우후와 길주 목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겠노라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들 서인이 제 말을 들을지 모르겠습니다.”
“안 듣는다면 제가 직접 아바마마를 찾아뵙고 북도우후와 길주 목사를 탄핵 할 것이라 말해주세요.”
“군 마마!”
“알아요, 그렇게 되면 서인들과 척을 지게 될 거라는 거. 하지만 그전에 저들이 물러설 거예요. 진짜로 탄핵이 벌어지면 그들을 암중에서 보호했던 서인들도 죄를 피할 수 없을 테니까요.”
과격하긴 했지만 광해군의 말도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결국 자신이 잘 처리해보겠다면서 이이가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오후, 경원부사 김수의 참형이 취소되었다.
대신 그는 봉사 이순신의 밑에서 공을 세워 죄를 씻으라는 백의종군의 명이 떨어졌다.
우스운 건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순신에게 아무런 상도 내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광해군은 미처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이순신의 공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은 그가 광해군의 사람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 결과를 만들어 낸 이도 의외였다.
왕, 그러니까 선조가 이순신의 승차를 건의한 병부의 상소를 받고도 모른 척 넘어가버렸던 것이다.
아마 선조가 광해군을 견제하기 시작한 첫 사례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광해군도, 또 김수를 살리느라 바빴던 이이도 미처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참형직전에 살아난 김수는 훈융진의 이순신 휘하로 배치되었다.
“봉사께서 살려 달라 청원했다 들었습니다.”
김수의 말에 이순신이 담담히 답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라. 패배를 딛고 최선을 다해 싸운 장수에게 너무 가혹하다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로인해 제가 살았으니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김수는 나이로도 직급으로도 이순신보다 윗줄의 관리였었다.
문관 출신이라고는 하나 가진 무용도 제법 괜찮았고, 특히 활을 잘 쏘기로 유명했다.
문관 출신 장수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군사에 대해 잘 몰라 방비에 서툰 것이 단점이었긴 했으나 김수의 용맹은 무과 출신 장수들에 못 지 않았다.
여진족에 맞서 경원성의 무기고와 식량창고를 지켜낸 것도 그런 용맹에서 나온 결과였다.
그런 김수가 이순신의 휘하로 편입되었다.
고위 지휘부가 개편되고, 과오에 대한 처벌이 있은 후, 함경도 북부일대의 조선군은 크게 증강되었다.
한성에서 훈련이 잘 되어있는 경군(京軍) 일부가 파견되어 보강되기도 했다.
조선군이 강화되는 동안에도 여진족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느새 야인들의 땅에도 봄이 찾아 왔지만 가뭄은 여전했고, 먹고 살 곡식도 없었다.
특히 우을지의 침공 직후, 조선군이 두만강을 건너 일대의 여진족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불태운 까닭에 북쪽으로 도망치듯 피난한 여진 부족들이 많아서 여진족들끼리도 분란이 생겼다.
그걸 지켜보던 여진의 번호 중 하나였던 율보리가 들고 일어난 것은 선조16년 5월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