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훈융진 전투 (2)
6진 일대의 변란 소식을 접한 한성의 조당은 병으로 출발이 늦어지고 있던 관찰사 정철의 출행을 독촉하고, 함경도 병마절도사에게 일대의 군병을 모아 적을 격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울러 한성 일대의 경군에 비상을 발령하는 등 만일에 대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준비를 갖춘 경군을 북방으로 올려 보낸다던지, 추가로 함경도에서 군역을 모집하는 일련의 추가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실제로 한성 이남으로 내려가면 북방에서 변란이 벌어졌다는 것을 모르는 곳도 수두룩할 정도였다.
이러한 정책을 펼친 것은 주로 선조의 선택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치세가 태평성대로 기록되길 갈망했다.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자의 아들로 왕위에 올랐다는 출생의 트라우마가 깊이 자리한 그는 자신이 조선의 그 어떤 군왕보다 훌륭했다는 소리를 듣고자했다.
그것이 전란의 확대를 두려워하게 만들었고, 전국적인 대비에 소극적인 자세를 갖게 만들었다.
그런 선조의 성향에 편승한 한성의 조당은 각자의 정치 파벌에 따라 자신들의 실책을 숨기고, 실익을 챙기는데 혈안이 되어있을 뿐이었다.
그런 일련의 상황으로 인해 북방, 함경도의 조선군은 오로지 자신들의 힘만으로 여진족의 준동을 막아내야만 했다.
사실 이것은 저들의 군세나 약탈 범위, 조선 백성의 피해 정도를 축소 보고한 함경도 고위지휘부의 잘못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개전 초기 자신들이 벌였던 실책들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감추는 것에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변란 초기 한성의 조당은 경원성에서 벌어진 백성들의 피해를 제대로 보고받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
훈융진에 배치된 이후로도 이순신부대의 훈련은 지속적으로 실시되었다.
강 건너와 중간, 요새 측 강변 등 여러 지역의 탄착점을 확인하고, 거리를 재고, 도강에 걸리는 시간을 확인했다.
그렇게 확인된 자료들을 가지고 포격훈련이 연일 이루어졌다.
장전과정의 숙련도와 발포 절차에 대한 숙련이 주된 훈련목표였다.
물론 포성은 울리지 않았다.
실제 사격 직전까지만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훈련에 매진하고 있는 조선군을 바라보는 이순신의 표정엔 걱정이 묻어났다.
훈련을 시켰다고는 해도 실사격 훈련은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철포는 함흥 군영에서 2번 쏴본 것이 다였다.
승자총통을 다루는 이들은 1번 쏴봤을 뿐이고, 사전총통 50문으로 구성된 화차는 단 한 번도 실제 사격을 해본 적이 없었다.
50문이 일제히 발사되는 까닭에 화약의 사용량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화약을 아껴야 할 정도로 조선은 아직 화약의 생산에 제한을 받고 있었다.
물론 실제 발사만 하지 않았을 뿐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발사 직전까지의 모든 과정을 완벽하게 숙달시켜놓고 있었다.
실전이 벌어진다면 그 효과가 온전히 나타나길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광해군의 장원에서 함께 구르며 다수의 철포 발사 경험을 가진 고참 포수들을 각 포로 흩어 화포장으로 삼아 두긴 했다.
이순신은 그들이 전군의 발포 경험 부족을 메워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부족함을 훈련으로 메워가며 훈융진의 네 째 날도 저물었다.
*****
여진은 부락단위의 생활을 영위한다.
같은 부족이라도 부락이 다르면 경계하고, 다툼이 일어나면 죽고 죽이는 일도 망설이지 않았다.
살아가는 땅이 척박하기 때문에 갖게 된 생활 방식이었다.
그나마 과거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에 정착해 사는 이들이 농경을 영위해 제법 기틀을 갖췄는데 이들을 건주여진이라 불렀다.
이들은 지리적인 관계로 명과의 교류가 활발하여 봉속되거나 반발하여 싸우기도 하였다.
작금에 와서는 명의 지방조직처럼 대우를 받고, 벼슬을 내려 받는 등, 명의 지원도 함께 받고 있었다.
물론 그런 일련의 일을 통해 명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여진부족들을 통제하려 하고 있었다.
그보다 동쪽에 사는 이들은 주로 목축에 종사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과거 여진이 세웠던 금나라의 직계라 하여 자존심이 강했다.
사람들은 이들을 해서 여진이라 칭했다.
그들은 자존심은 강했지만 생활양식은 명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건주여진보다 뒤떨어져있었다.
농경은 소수의 부족에서만, 그것도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목축은 부족끼리의 잦은 분쟁으로 인해 대형화 되지 못했다.
소출이 적고 물산이 희귀해서 굶주리는 일이 많았고, 그런 부족함을 서로를 약탈해 채웠다.
그들보다도 동남쪽, 송화강(松花江) 인근 지역에 거주하며 목축과 어업으로 생계를 일군 이들을 야인 여진이라 불렀는데 여진의 세 부류 중에서는 가장 곤궁하고 미개하게 여겼다.
실제로 조선과 가장 빈번한 충돌을 일으키고 많은 피해를 입힌 것은 이들 야인 여진이었다.
특히 야인 여진 중에는 조선에 귀의한 이들이 많았는데 오히려 이들로 인한 분란이 적지 않았다.
여하간 지난 1월부터 조선의 두만강 일대에서 준동을 벌인 것은 이들 중 바로 야인 여진이었다.
물론 전체가 참여한 일은 아니었다.
조선 국경일대에 살던 번호를 중심으로 일부 부족들이 참여한 일이었다.
그것도 경원성 회전 뒤로는 소강상태에 머물러있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물러가지도 않았고 두만강 너머로 자주 여진의 무리가 보였다.
그런 까닭에 경원성은 인근의 병력을 집중시켜 방어를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파열음도 여기저기서 나왔다.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임무를 가진 북도우후(北道虞候)가 겁에 질려 종군하지 아니한 채 숨어 다니고, 후방의 길주 목사는 겁을 집어먹고 명령에 불복종해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그런 혼란함 속에서 경원성 예하 각 요새들은 여진족의 이동 상황을 감시하느라 분주했다.
이순신의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훈융진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훈융진은 야인들의 땅 쪽으로 불룩 솟은 곳이라 저들이 두만강을 넘기 위해 접근한다면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렇기에 이순신은 밤낮없이 관측병을 두어 여진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했다.
*****
선조16년 2월 9일 이른 아침.
관측병의 고함소리에 성벽으로 달려 올라간 이순신이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강 건너에 모습을 드러낸 수십 정도의 여진족 전사였다.
하지만 그 수는 이각도 되지 않아 수백으로 불어났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이순신이 진내에 비상을 걸어 전 병사들을 성벽으로 불러올렸다.
그렇게 훈융진이 완전한 전투태세를 갖추었을 때 두만강 건너에 모습을 보인 여진족의 수는 물경 1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여진의 전사들은 모두가 기마병이다.
북방초원의 부족들이 모두 그렇듯이 여진 또한 어릴 때부터 말과 함께 자란 까닭에 상당한 기마술을 보유한데다 사냥을 자주해 무기만 쥐어주면 완벽한 전사의 모습으로 돌변한다.
그런 이들 1만이 훈융진 맞은 편 두만강 건너에 집결했다.
훈융진 앞을 흐르는 두만강은 굽이쳐 흐르는 물결에 실려와 쌓인 토사로 인해 수심이 그리 깊지 않았다.
하지만 폭은 일대에서 가장 넓다.
도강을 하기에 그다지 좋은 여건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연유로 경원성의 조선군 지휘부도 이쪽 방향으로 여진이 도강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간 여진족과 전투를 벌였던 경원성 인근의 강이 훨씬 좁고, 유속도 느려 대규모 기마대가 강을 건너기에 이상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도 경원성은 높게 쌓은 반면에 이곳 훈융진의 요새는 성벽보다는 망루의 기능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그런 훈융진의 맞은편에 모여든 여진족 무리가 뭉치기 시작했다.
군열을 짜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저 행동이 끝나면 조만간 강가로 몰려들어 일제히 도강에 나설 것이 분명했다.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집단 도강은 여진족이 잘 사용하는 방법이다.
강 건너에서 지키는 조선군의 활이나 총통으로 제대로 막을 수 없을 만큼의 다수가 도강해서 막아서는 조선군을 유린한다는 일종의 전격전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기마를 잘 활용하는 여진족다운 전술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는가 싶더니 여진족의 무리들이 강을 바라보며 도열을 시작했다.
그것은 도강 직전임을 뜻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이순신이 고함쳤다.
“철포 포수들은 방포를 준비하라!”
이순신의 명에 철포를 담당하는 포수들이 서둘러 움직였다.
화약을 재워 다지고 격목을 넣고 또 다진 후, 철환을 넣었다.
그리고 그 위로 흙을 넣고 또 다졌다.
포구가 아래로 향할 경우 탄이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렇게 장전이 끝나자 화포장들이 불이 붙은 횃불을 들고 일제히 철포 옆에 붙어 섰다.
이제 이순신의 명령만 떨어지면 점화가 이루어지고 곧바로 철포들이 불을 뿜을 것이었다.
“어찌 하려 하십니까?”
곁으로 다가서 물은 이는 이억이었다.
아산보의 군관이었던 그는 이번 여진의 준동에서 아산보가 가장 먼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에 큰 상심을 하고 있었다.
아산보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 그가 훈련원에 나와 있던 까닭에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죄의식 때문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이순신이 답했다.
“도강이 시작되면 일제히 방포하여 최대한의 피해를 강요할 생각일세.”
“탄이 도달 하겠습니까?”
실사격 모습을 두 번밖에 보지 못한 까닭에 가지는 불안감이다.
더구나 그 사격도 발사훈련이었지 실제 도달 거리에 대한 포격은 아니었다.
그것에서 오는 불안감을 잘 이해하는 이순신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8백보는 확실하고, 간혹 바람만 잘 타면 그 이상까지도 날아가네. 5백보인 이곳의 강폭을 생각하면 저들의 강가엔 확실하게 탄을 꽂아 넣을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게.”
“몇 발이나 쏠 수 있을까요?
“도강 시간을 감안하면 2발? 많아야 3발정도 이겠지.”
백문의 철포가 모조리 성벽위에서 두만강 너머를 조준하고 있으니 3번을 쏘아도 3백발이다.
그것으로 1만을 넘기는 여진족들을 막아낼 리 만무했다.
그 말은 3번의 사격이후, 훈융진은 여진족들과 난전에 들어감을 뜻했다.
요새라고는 해도 훈융진의 성벽은 말 등을 밟고 뛰면 손쉽게 올라설 수 있을 정도로 낮았다.
그러니 여진족이 성벽아래에 도달하면 진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시간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게 난전으로 들어가면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
이억은 회의적이었다.
7백 중 6백 가까이가 죽어라 철포의 사격훈련만 받은 이순신의 부대였다.
특히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비군의 경우엔 창이나 칼을 잡아본 경험도 없었다.
훈련만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예 무기류는 보급조차 되지 않았다.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그들의 철포 훈련을 눈감아 주는 대신 창칼은 절대로 쥐어주지 않는다는 약조를 받아간 까닭이었다.
그런 이들이 야수처럼 날뛰는 여진족과 뒤엉키는 난전에서 살아남을 리 만무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걸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괜히 시작하기도 전에 병사들에게 공포를 심어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뭐, 최악의 경우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말이다.
어차피 아산보를 지키다 죽었어야 할 목숨, 여기서 신나게 칼춤이나 추다 먼저 간 동료들을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칼을 움켜쥐는 이억의 눈빛에 결사의 각오가 섰다.
그때였다.
“온다.”
이순신의 음성에 이억의 시선이 두만강 건너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