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훈융진 전투 (1)
선조15년 12월 눈이 내리던 날.
잔뜩 상기된 표정의 정철이 장원으로 광해군을 찾아왔다.
“제가 함경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습니다.”
정철의 그 말에 광해군이 흠칫 굳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내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한동안 실제 역사와 달리 흐르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던 것이 한방에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애써 담담한 척 답하는 광해군에게 정철이 반례를 취했다.
“소신이 무례했습니다. 용서 하십시오.”
정철이 딱히 광해군에게 무례하게 군것은 없었다.
그저 도승지로 제수되던 9월 이후 광해군의 말에 신빙성을 두지 않았던 것뿐이니까.
하지만 결국 광해군의 말이 맞게 되었으니 그렇게 믿지 않았던 몇 달간의 행보를 사과하는 것이다.
그런 정철에게 광해군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지금이라도 제자리를 찾았으니 다행입니다.”
“하면 여쭙지요. 이제 제가 어찌 하면 되겠습니까?”
이후로 이어진 긴 대화에서 정철은 여진 야인들의 침입에 대한 대비로 시작되는 광해군이 세운 일련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했다.
광해군과 대화를 나눈 정철은 장원을 떠나 사가로 돌아갔다.
정철이 임지에 도착해야 하는 날짜는 새해, 그러니까 선조16년 1월 말까지였다.
겨울철 북방 길의 험난함이 크기에 정철은 설날, 조상에 차례를 지내고 곧바로 한성을 떠나기로 되어있었다.
*****
과거 4군 6진을 개척한 전후로 여진의 부족 중 조선으로 귀화한 이들을 번호(番胡)라 불렀다.
그들의 족장에겐 별정직이긴 해도 벼슬도 주고, 식량의 지원 등 혜택도 주었다.
그런 번호들을 세종 조 때 완성한 4군 6진 주변에 살게 하며 다른 여진족들과의 완충지역으로 삼았다.
하지만 세조 연간 이후, 변방의 번호들에 대한 관리가 소홀해 졌다.
번호들은 이전과 같은 혜택이나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로인한 번호들의 불만이 팽배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의 조정은 그런 번호들을 그저 방치해 두었다.
여진부족들의 상황이 계속 나빠지고 있었다.
여진족들이 키우던 조와 수수의 작황이 최악의 수확량을 기록했고, 알 수 없는 병과, 바짝 마른 풀들로 인해 거의 모든 부족들의 양과 소가 떼죽음을 당했다.
결국 버티다 못한 번호 중 하나인 우을지가 조선의 관부에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그의 요청을 받은 함경도 도호부(都護府)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유는 결정권자인 함경도 관찰사의 부재였지만 실상은 누구도 그들의 일에 개입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관찰사의 부재로 함경도 관내의 조선군은 물론이고, 예하 수령들에 대한 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함경도 병마절도사의 무관심이 주된 원인이었다.
사실 이때 함경도 병마절도사는 여진족의 기근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훨씬 이전부터 함경도 훈련원 봉사로 재직 중인 이순신을 통해 위험이 닥칠 것이니 대비하라는 광해군의 경고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자신들, 동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오욕을 안겨준 광해군의 경고 따위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번호 우을지의 지원 요청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설사 조선이 지원에 나설지라도 식량이 부족한 여진족을 모두 먹일 수는 없었다.
그런 만큼 여전히 식량이 부족한 일부 여진부족은 평소처럼 약탈에 나설 것이라고 함경도 병마절도사는 생각했다.
그러니 어차피 벌어질 약탈, 그냥 두자는 생각이었다.
평소처럼 약탈이 일어나면 막아내면 그만이고, 그러다보면 봄이 오고, 먹을 게 늘어나면 이전처럼 흐지부지 원상태로 돌아갈 것이라 막연하게 판단했던 것이다.
그랬던 상황이 조금 더 나빠진 것은 1월 중순경 우을지가 전사들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부터였다.
함경도 병마절도사는 번호 우을지의 부족과 가까운 아산보에 명을 내려 여진족의 내정을 살피도록 했다.
병마절도사의 명을 받은 아산보는 곧바로 해당 지역 토병(土兵)으로 꾸려진 정찰대를 편성해 두만강 너머로 투입했다.
함경도에 오래 살아 여진인들과 접촉이 잦은 토착민, 또는 여진인의 피가 흐르는 조선인, 조선으로 귀화한 여진인들로 구성되는 토병은 모두 여진족의 말인 만주어에 능숙했고, 그들의 생활 방식에도 능통했다.
그렇기에 정찰이나 접촉, 잠입정탐 등에 주로 동원되고는 했다.
그런 토병 셋으로 구성된 그 정찰대는 하지만 두만강을 넘은지 이틀 만에 우을지의 전사들에게 발각당해 포로가 되었다.
조선이 자신들을 돕지는 않고 감시만 한다고 판단한 우을지는 조선과 싸워 원하는 것을 채우기로 결정했다.
그는 지원군을 얻기 위해 조선군 포로들을 조선에 적대적인 성향의 여진부족에게 보냈다.
조선이 여진의 부족들을 향해 군사행보를 시작했다는 거짓정보와 함께였다.
이후 부족의 전사들을 추린 우을지는 곧바로 아산보로 향했다.
선조16년 1월 28일.
아산보가 번호 우을지의 공격을 받았다.
그 소식을 접한 경원부사 김수가 아산보를 구원하기 위해 급히 출병했으나 크게 패하고 다시 경원성으로 물러났다.
여진족 우을지가 조선군과 싸워 승리를 거뒀다는 소문이 여진부족들을 휩쓸었다.
불만과 불안감, 식량 부족이라는 현실적 문제에 부딪쳐 있던 여진부족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이틀 만에 1만으로 세를 불린 여진족이 도호부가 있던 경원성으로 들이닥쳤다.
당시 경원성 예하의 총 병력은 4백여 명을 살짝 넘기는 수준이었다.
그 병력을 휘하의 각 보에 흩어 배치한 까닭에 경원성에 남아있던 병사들의 수는 2백 남짓이었다.
경원부사 김수와 제장들이 그 적은 수의 병사들로 방어에 돌입했다.
처음엔 잘 막아냈으나 서문을 지키던 만호 이봉수가 여진족의 규모에 겁을 먹고 도주하고 말았다.
결국 서문이 뚫렸고, 전투는 성 내로 확대되었다.
부족한 병력을 감안한 경원부사 김수는 곧바로 병력을 둘로 나눠 무기고와 식량창고에 집중시켰다.
그렇게 두 곳에 방어병력을 집중시킨 채 분전한 결과 날이 저물 때 까지 간신히 지켜낼 수 있었다.
김수를 비롯한 조선군의 분전도 한몫했지만 사실 여진군의 목적이 약탈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무기고와 식량창고를 에워싸고 죽기 살기로 버티는 조선군을 상대하며 피해를 입기 보다는 경원성으로 들어선 대다수의 여진족들이 수월한 먹잇감인 주변의 민가로 흩어져 약탈을 일삼는 걸 선택했던 것이다.
날이 어두워지자 공격과 약탈이 원할 하지 않다고 판단한 여진족이 물러났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조선군의 수는 백여 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경원부사 김수가 그들을 추려 여진족의 내습에 대비했다.
다음 날 여진족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전날과 달리 김수는 방어가 아니라 역습으로 치고 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계를 느낀 김수가 이판사판으로 나온 것인데 그 기세가 워낙 거세서 여진족들이 애를 먹었다.
다행히 전투 중간, 온성 부사 신립이 북방 조선군의 자랑인 기마대를 이끌고 도착하면서 여진족이 물러갔다.
추적격멸을 주장하는 신립을 김수가 간신히 말렸다.
아군의 수가 여진의 수에 비해 너무 적었기 때문이었다.
이때가 되어서야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함경도 내 전 조선군에 비상을 발령했다.
훈련원의 이순신도 이때 병마절도사의 명을 받아 출병하게 되었다.
훈련원 최고지휘관과 교관들은 남아 훈련원을 지키기로 하고, 그간 훈련시키던 병사들과 광해군이 보내주었던 노비군을 이끌고 이순신이 훈련원을 나선 것은 경원성 전투가 있었던 날로부터 며칠이 지난 선조16년 2월 3일이었다.
7백으로 이루어진 이순신의 부대는 인근에선 단위 부대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당연히 적과 전투를 치르고 여전히 대치중인 경원성으로 배치될 것이라 예상했지만 함경도 병마절도사는 이순신에게 훈융진으로 가 방어에 임하라는 명을 내렸다.
훈융진은 두만강 강가에 세워진 요새로 여진 땅 쪽으로 불룩이 튀어나온 지역에 세워져 있었다.
지리적으로 보면 최북단인 온성과 경원 사이 쯤 이었다.
당연히 경원성 남쪽에서 올라오던 이순신의 부대가 훈융진으로 가기 위해선 경원성을 지나쳐가야 했다.
군령은 지엄한 것이기에 이순신은 두말없이 경원성을 지나 훈융진으로 향했다.
이순신이 도착한 훈융진은 1백여 명이 살짝 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순신의 부대가 도착하기 무섭게 훈융진을 떠나 경원성으로 향했다.
부족한 경원성의 병력을 충원하기 위한 병마절도사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병력의 증원이 필요했다면 이미 경원성을 지나쳐와야 했던 이순신의 부대를 경원성으로 보내는 것이 더 사리에 맞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아무런 반발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훈융진의 방비에 나설 뿐이었다.
훈융진은 강가에 세워진 요새치고는 제법 큰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하긴 경원성 관할에 속한 요새로는 세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요새도 돌로 제법 탄탄히 지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성벽이 너무 낮았다.
그로인해 꾸준히 증축이 요구되어왔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히 망루는 요새에서 가장 안전한 한 가운데에 높게 지어져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훈융진이 무엇에 중점을 두고 지어졌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철포는 어찌 배치할까요?”
함께 따라온 군관 이억의 물음에 이순신이 답했다.
“전방 성벽에 모든 철포를 올리게.”
“좌와 우, 후면은 어찌하고 말입니까?”
“적은 정면에서 올 걸세.”
“하지만...”
불안해하는 이억에게 이순신이 말했다.
“적은 무리의 힘으로 우리를 타 넘으려 할 걸세. 그만큼 조밀하게 다가오겠지. 우리도 조밀해야만 막아낼 수 있네.”
이순신 부대의 유일한 강점은 철포의 집단운용이 가능하다는 것뿐이었다.
그걸 최대한 살리려는 이순신의 의중을 이억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면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방향을 비워두라는 명령은 결코 옳은 결정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것을 다시 말하려던 이억은 꽉 다물린 이순신의 입과 굳게 굳어진 눈매를 보고는 포기했다.
저런 입매와 눈매일 때 이순신은 자신의 결정을 뒤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지난 몇 달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은 적전(敵前)이었다. 잘못된 명이라도 지휘관의 명을 거부하는 것은 이롭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못마땅한 표정의 이억이 복명하고 내려가자 이내 대기하던 철포 포수들에 의해 100문의 철포들이 모조리 전면 성벽으로 올려 지기 시작했다.
이억의 불만을 모르는바가 아니나 이순신은 확신했다.
적은 결코 좌우로 흩어져 오지 않는다.
훈융진 외의 길로 들어섰다면 굳이 약탈할 물자가 적고, 군병만 모여 있는 훈융진을 노릴 이유가 없었다.
조선의 땅을 침탈한 여진족의 목표가 점령이 아니라 약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들이 이곳 훈융진으로 온다면 결국 그것은 강을 건널 길목으로 택했을 때뿐이다.
설사 이억의 걱정처럼 요새를 포위하려 해도 결국은 훈융진 앞의 강을 건넌 후가 될 것이다.
알려진 바로는 준동하고 있는 여진의 수는 1만 내외.
만에 하나 적의 도강을 허락하면 좌우와 뒤로 병력을 나누었다 해도 겨우 7백인 자신들의 병력으로는 결코 막아낼 수 없다.
그러니 훈융진이 살아남을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적을 반드시 강가에서 괴멸시켜야한다.’
훈융진의 성벽에 올라 두만강 너머, 야인들의 땅을 바라보는 이순신의 표정에 긴장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