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21화 (21/325)

제21화. 하늘의 영기(靈氣)를 받은 자

그렇게 앓는 소리를 내는 김억수에게 광해군이 말했다.

“알아요. 과한 지출이라는 거. 하지만 좀 믿어 봐요. 더 큰 돈을 벌어줄 테니까. 그리고 이번 건 날 위해서도 아니고 나라를 위해서잖아요. 통 크게 좀 쓰자고요. 김 대행수 원래 통 크잖아요.”

어르고 달래는 광해군을 김억수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솔직히 이 어린 왕자와 처음 손을 잡은 것은 그가 차기 왕권에 가깝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건 여전히 마찬가지다.

하지만 들어가는 돈이 너무 많았다.

요즘 들어 선전의 행수들 사이에서도 간간히 말들이 나올 정도다.

철제농기구를 팔아 챙긴 돈이 적지 않았음에도 그런 소리들이 나올 정도로 정말 많은 자금이 들어가고 있었다.

최근 들어 쌀에서 상당한 수익을 거둬서 수하 행수들의 불만이 잦아들었지만 지금 광해의 부탁대로 노비를 사들이면 그 불만은 다시금 터져 나올 것이 분명했다.

자칫 잘못하면 행수들의 집단 반발을 사서 대행수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선전이라는 것이 김억수 개인의 것이 아니라 여러 행수들 공동의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행수들은 현대시대의 주주들과 같았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뒤에 버티고 있는 전주(錢主)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선전의 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결국 돈을 대준 행수를 통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게 그거였다.

그러니 지금 내리는 결정은 김억수가 깔고 앉은 대행수라는 자리는 물론이고, 그가 지금까지 상인으로써 이루어온 모든 성공과 명예의 존폐와도 직결된다.

그러니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돈······, 확실히 많이 벌수 있는 거 맞습니까?”

“그러자고 조 행수를 사신단에 딸려 보낸 거니까요.”

광해군의 답에 지난 6월, 사신단과 함께 명으로 떠난 조필을 떠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다시 여쭙고 싶었습니다. 정말 명이 철을 살 거라 생각하십니까?”

“왜 안 살 거라 생각해요?”

“명은 철의 주산지입니다. 주변국 그 어디보다 많은 철을 생산하지요.”

“물론 그렇지만 우리가 보낸 철정보다 좋은 철은 만들지 못할 걸요.”

그건 사실이었다.

장안에 이름 깨나 있다는 대장장이에게 광해군의 장원에서 생산된 철정을 보여주었더니 이렇게 순도가 좋은 선철이 어디서 났냐면서 속된 표현으로 환장을 했었으니까.

그래서였다.

광해군이 사람을 보내 명에 철의 판로를 뚫어보자는 제의를 했을 때 순순히 따랐던 것은.

그럼에도 역시 불안감은 남는다.

“수송비가 들 겁니다.”

“그걸 감안해도 싸죠. 우리 철이.”

“그건 아직 장담할 수 없죠. 군께서 말씀하신 철광은 아직 확보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니 그걸 위해서라도 노비들은 반드시 보내야 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대행수는 알잖아요. 내가 함경도의 안정을 바라는 진짜 이유를.”

무산 광산 이야기다.

아시아 최대, 세계로 보아도 유수의 노천 철광.

그냥 노천 철광이 아니라 밖으로 산처럼 쌓여 드러난 철광석의 양만도 어마어마한 곳이다.

그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지금시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아니, 인근의 사람들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사용할 엄두는 내지 못한다.

철의 함량이 사할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들이는 품에 비해 거두는 철의 양이 극히 미비하니 알아도 버려두는 것이다.

하지만 광해군의 장원이 가진 기술을 사용하면 그곳은 말 그대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된다.

광해군으로부터 과거 그에 대한 이야기를 살짝 들었던 김억수는 한참을 갈등했다.

그렇다고 광해군의 이야기를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광해군이 벌인 일들의 결과를 놓고 보면 안 믿는 것이 바보일 정도니까.

문제는 그걸 이루는 과정이 이번엔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여하간 전쟁을 통해 안전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곳에서 안정적인 철을 얻기 위해 광해군이 세워둔 계획들까지 생각하면······.

한참을 갈등하던 김억수는 눈을 꾹 감았다.

“정확히 필요하신 수가 몇입니까?”

“내게 아바마마께서 내려주신 노비 서른이 있어요. 그러니 추가로 395명만 더 있으면 되요.”

다시 들어도 많은 수였던지 눈을 감고 있던 김억수의 입에서 신음부터 흘러나왔다.

“흐으음······. 언제까지 마련해 두면 되겠습니까?”

김억수가 결심을 굳혔다는 걸 알아차린 광해가 되물었다.

“언제까지 되겠어요. 알죠? 우리 시간 되게 없는 거.”

광해의 말에 김억수가 눈을 떴다.

“최대한 서둘러서 9월이 가기 전에 마무리 짓겠습니다.”

김억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광해군은 그길로 선전을 떠났다.

그렇게 떠나간 광해군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억수가 일어섰다.

결정했다면······. 흔들리느니 그 일이 이루어지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김억수의 방식이었다.

그러니······.

“여봐라. 행수들을 모두 모이라고 일러라!”

김억수의 음성이 크게 울려나오고 있었다.

김억수의 음성이 흘러나오는 선전을 떠난 광해군은 장원이 아니라 한 대궐 같은 집 앞에 당도했다.

한데 모양이 눈에 익었다.

맞다.

과거 이이가 전해준 명단을 들고 금부도사와 함께 가장 먼저 방문했던 전 공부판서 최산지의 사가다.

지금은 그의 증손자인 최목중이 주인으로 있는 바로 그 집.

“이리 오너라.”

자신의 눈짓에 문을 두드리는 알지의 음성을 들으며, 역시 사람 부르는 것엔 금부도사의 목청이 제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그때처럼 슬쩍 문을 연고 고개를 내민 노복이 알아본 덕에 광해군은 곧바로 사랑채로 안내되었다.

잠시 후, 최목중이 사랑채로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광해군 마마.”

반례를 취하는 최목중의 시선이 재빨리 주변을 훑는다.

금부도사의 존재를 찾는 것이다.

그로써는 금부도사의 존재가 왕의 의중이 서려있고 없고의 차이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금부도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자리에 앉는 최목중의 표정은 처음보다 편안해 보였다.

그런 최목중에게 광해의 물음이 던져졌다.

“잘 지냈나요?”

“네. 그럭저럭.”

고개를 끄덕이는 최목중에게 광해군이 말했다.

“다행이네요. 난 또 어렵게 산다는 소리를 들어서 걱정을 해죠.”

“어······, 렵게요?”

무슨 의미에서 하는 말인지 몰라 조심스러운 최목중의 물음에 광해군이 답했다.

“네. 파직당한 정인홍도 그렇고, 여러 대소신료들이 그렇게 말하던데요.”

정인홍의 이름이 거론되자 최목중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광해군이 거론하는 이야기를 알아들은 것이다.

<본디 소량의 철제 농기구를 팔아 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백성들이 이번 일로 큰 피해를 본 것을 아십니까?>

정인홍이 왕 앞에서 광해군을 몰아붙일 때 한 말이다.

철화가 동인의 패배로 끝이 나던 조회 말미에 광해군이 그 말을 잠시 거론했었다고 들었다.

물론 끝까지 물고 늘어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분명 여차하면 문제를 삼을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그걸 못 알아들은 동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돈을 대는 최목중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편하던 최목중의 자세가 슬그머니 바로세워지고, 표정도 긴장으로 물들었다.

그런 그에게 광해군의 말이 이어졌다.

“잘 산다니 다행이긴 한데······. 난 최 진사가 계속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누구처럼 가시나무에 둘러싸여 아무도 못 만나면서 생을 마감하지 않고.”

삭탈관직 당하여 고도(孤島)로 위리안치 된 전 경상 관찰사 유상현을 빗댄 이야기다.

말인즉슨 까불면 확! 발라버린다는 뜻이다.

“여,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마마.”

바짝 엎드리는 최목중의 표정과 음성은 과거 금부도사와 찾아왔을 때보다 더 낮고, 떨렸다.

그런 그에게 광해군이 말했다.

“난 최 진사와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모두 그랬으면 좋겠어요.”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망극만 하지 말고 다 같이, 널리 알려서 잘 살라 그 말이에요.”

동인들 전체에 경고를 하는 것이다.

그걸 알아들은 최목중이 몸을 더 낮췄다.

“명심, 또 명심 하겠나이다.”

그렇게 바짝 엎드린 최목중을 두고 광해군은 두말없이 떠났다.

그렇게 광해군이 떠나자 최목중이 집사를 불렀다.

“철회에 속한 이들에게 전해라. 광해군이 무언가를 획책한다. 하나 모른 척 덮어두라고 말이다. 지금은······. 그냥 두어야 할 때라고. 그러니 돈을 대는 모든 이들을 자중시키라고 말이다.”

“예. 대감마님.”

답을 한 집사가 서둘러 나가자 최목중이 중얼거렸다.

“지금은 그냥 두마. 하나 길지는 않을 것이다.”

홀로 중얼거리는 최목중의 표정은 좀 전에 광해군 앞에서 벌벌 떨던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

광해군이 395명의 노비가 다 준비되었다는 김억수의 전갈을 받던 날, 조정에서는 일부 신료들에 대한 인사 발표가 있었다.

개중에는 도승지를 제수 받은 정철이 끼어있었다.

일전에 함경도 관찰사로 나갈 거라던 광해군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에 정철은 꽤나 실망한 모습이었다.

물론 함경도 관찰사란 자리가 좋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난 몇 달간 광해군이 벌인 일들의 결과를 보면서 혹, 그의 말대로 함경도 관찰사로 나아가 자신이 공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하지만 기대는 거품처럼 무너졌다.

그것이 정철이 광해군에게 갖고 있던 관심을 급속도로 꺼트렸다.

처음엔 그 일이 있은 후 광해군도 꽤나 당황했다.

자신의 기억이 잘 못 되었거나 이곳의 상황이 광해군이 알고 있던 역사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던 광해군은 곧바로 다시 움직였다.

정철에게 약속했던 100문의 철포 중 나머지 40문과 분량의 화약, 거기다 김억수를 통해 사들인 노비들에다 선조에게서 하사받은 노비들까지 합쳐 이순신에게 보냈다.

물론 그 과정엔 금부도사의 도움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정철이라는 큰 톱니바퀴가 빠졌지만 그렇다고 계획을 바꿀 수는 없던 광해군의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렇게 어렵게 다시 이어진 광해군의 계획은 이제 오로지 그, 이순신의 역량에 달려있었다.

*****

선조15년 11월. 명으로 갔던 사신단이 돌아왔다.

그들은 종계변무를 바로잡겠다는 명 조정과 황제의 확답을 가지고 왔다.

이전에도 몇 번 약속이 있었지만 황제가 약속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에 선조의 기쁨이 컸다.

사신단에게 큰 연회를 열어주고, 가장 공이 컸던 홍순언을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관에 책록하고, 중인에서 면천시켜 자헌대부 당성군(唐城君)에 책봉하였다

아직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님에도 그렇게 과하다 싶은 상을 내릴 정도로 선조의 기쁨은 큰 것이었다.

그날, 광해와 김억수도 선조만큼이나 기쁜 소식을 전해 들었다.

“모두 다 동의했다는 말인가?”

놀랍고 기뻐하는 김억수의 물음에 조필이 답했다.

“예. 대행수. 제가 제본으로 가져간 철정을 본 이들은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우리가 제시한 가격이라면 수량에 관계없이 구입할 의사가 있다는 상단이 서른 곳도 넘었습니다.”

말하면서도 그 때의 흥분이 떠오르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조필의 답에 김억수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 김억수와 달리 이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담담하기만 한 광해군은 후속 조치들을 부탁하고는 서둘러 선전을 떠났다.

최근 들어 소총 개발조가 강선에 관한 기술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장원을 비워두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게 온통 마음이 장원에 있던 광해군이 서둘러 선전을 떠나자 조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 일에 홍순언 영감의 노고가 많았습니다. 제가 사신단과 함께 명의 황도에 도착했을 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상단들의 수가 10곳을 넘었던 것도 다 홍순언 영감이 미리 준비해 둔 덕이었습죠.”

“다행이군.”

고개를 끄덕이는 김억수에게 조필이 말했다.

“한데 홍순언 영감께 들으니 그 또한 이전에 명으로 갈 때 광해군 마마께서 미리 지시해 둔 일이었다고······. 그걸 위해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였었다고 하던데요.”

“그랬었다던가? 그건 나도 잘 모르는 일이다. 그땐 속을 터놓고 대화하는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김억수의 답에 조필의 물음이 조심스럽게 이어졌다.

“광해군 마마는 도대체 어찌 그 모든 것들을 이역만리 조선에 계시면서 꿰뚫어보신 걸까요? 홍순언 영감의 말대로 정말 하늘의 영기라도 받으신 걸까요?”

조필의 물음에 김억수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그렇게 미신으로 치부할 사항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필의 말마따나 그런 게 아니면 또 설명이 되지 않는 사람이 바로 광해군이기도 했다.

더구나 광해군의 지금 나이는 8살 이었다.

“흐음······.”

미신과 상관없다는 생각이 자꾸 흔들리는 김억수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