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김억수의 고뇌
시장 상황에 가장 민감한 상인들보다는 늦었지만 선조도 그런 흐름을 호조의 관리들을 통해 전달받았다.
한가위 직전에 열린 연회에 대소신료들을 부른 선조가 그 사실을 크게 알리며 기뻐했다.
철제농기구의 보급 초기, 세간엔 왕이 그 일을 묵인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었다.
그건 동인들이 국방의 근본인 쇠를 함부로 써댄다며 왕을 압박하기 위해서 일부러 철화의 소문과 함께 퍼트렸던 것이다.
그렇게 퍼졌던 소문은 그대로 남아 있다 작금에 와선 왕에게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이야기로 둔갑해 버렸다.
이전보다 풍족해진 쌀과 낮아진 가격에 도성인 한성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주상 전하 천세’소리가 심심치 않게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걸 궁궐에 앉아 모조리 듣고 있었으니 선조의 입이 귓가에 걸릴 지경이었다.
애써 감추는 소태 씹은 표정의 동인들과 연신 선조의 업적이라며 찬양해 대는 서인들로 북적인 연회 끝에 선조는 광해군의 공을 치하한다며 그에게 노비 서른을 하사했다.
장원에서 일하느라 바쁜 와중이라 연회에 참석하지 못했던 광해군은 뒤에 그 말을 듣고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지금도 먹여 살려야 하는 노비들과 그 가솔들이 많아서 매일 김억수의 눈치를 보는 중이었는데 책임질 노비가 더 늘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번에 늘어난 노비들은 장정들이긴 했지만 광해가 필요한 기술자들은 아니었기에 더 난감했다.
그런 시기에 이순신의 서신이 광해군에게 도달했다.
천천히 이순신이 보낸 서신을 읽은 광해가 무언가를 결심하고는 이이를 불러 마주앉았다.
“병력 부족이 심각한 모양입니다.”
광해군의 말에 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요. 본디 세종 조에 북방의 사군육진으로 내보낸 백성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죽거나 다쳐서 수가 줄기도 했고요.”
실제는 도망친 이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함경도 북방의 땅은 사람이 살기에 좋은 지역은 아니었다.
기후는 사나왔고, 땅은 척박했다.
그런 상황에서 군역과 노역이 더해지니 버텨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역사를 통해 저간의 사정을 대강이나마 알고 있던 광해는 모른 척 이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면 당장 병력을 늘일 방법은 없는 겁니까?”
“군적에 있는 이들을 모으는 것이 가장 쉽겠지만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것에 응할 백성들의 수가 많지 않고, 특히 병마절도사의 동의가 없이는······.”
사실은 왕의 명이 없기 때문이다.
왕명이 있다면 병마절도사가 병력의 모집이나 동원을 기피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전시도 아닌데 병력 동원을 왕명으로 내리면 민심이 흉흉해진다.
더구나 지금은 한창 일손이 많이 필요한 추수철이었다.
그런 시기에 군역을 지우는 것은 가장 피해야하는 일임엔 분명했다.
“각 병영에 주둔중인 병사들을 동원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함경도 각 진과 병영에 주둔하는 병사들의 수는 많으면 수십, 적으며 십여 명이 되지 않기도 합니다. 지켜야 할 곳은 많고, 병력은 적기에 벌어진 일이지요.”
“그들이라도 쥐어짜면 안 될까요?”
“그들도 농사를 짓습니다.”
둔전병이다.
각 병영에 배속된 병사들은 자신들이 먹을 식량을 그렇게 재배해서 충당한다.
조선의 주요 산업인 농업의 생산량이 적기 때문에 취해진 고육지책이었다.
당연히 그 둔전에서도 이제 추수가 한창 벌어져야 할 시기였던 것이다.
“그러면 군병의 수를 늘일 방법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까?”
“지금으로써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답하는 이이에게 광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니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노비들을 보내면 안 될까요?”
광해군의 말에 이이가 펄쩍 뛰었다.
“지금 노비들에게 창칼을 쥐어주자는 말씀이십니까! 말도 안 됩니다.”
이것이다.
광해군이 선뜻 시작하지 못하고 이이를 불러 설득작업을 벌이고자 한 이유가.
어느 시대나, 어느 지역이나 노비들, 그러니까 노예가 무장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는다.
힘을 갖춘 그들의 위험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창칼이 아니라 철포인데요.”
“그러니 더 안 된다 말씀드릴 수밖에요!”
완강한 이이의 모습에서 그도 어쩔 수없는 조선의 권력자라는 것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지금의 시대가 갖는 특성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다고 뻔히 보이는 위험을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광해의 말에 이이가 물었다.
“군께선 정말로 여진의 야인들이 조선의 땅을 침범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들의 땅에 기근이 들었어요. 당연히 부족한 식량을 채워야 하는데 저들의 입장에서야 명보다는 조선이 쉽겠죠.”
“기근······, 확실한 겁니까?”
조선은 유례없는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풍년은 아니었다.
평년작에 비등했을 뿐. 다만 소출량이 늘었을 뿐이다.
철제농기구가 거둔, 그리고 소작농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거둔 결실이었다.
철제농기구를 통해 단위시간당 들어가는 효율이 높아지니 재배면적이 늘고, 같은 작물도 평년이라면 한번 손이 갈게 두 번, 세 번이 갈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 덕에 벌어진 일이다.
기후적 조건으로 벌어지는 풍년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다만 그것의 차이를 조선의 사람들은, 이이는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다보니 풍요로운 조선의 상황에 묻혀 여진 야인들의 땅에 기근이 들었다는 것을 좀처럼 믿지 못 하는 것이다.
“사람을 보내서 확인하세요. 그것이면 되겠습니까?”
광해군의 제의에 한참 생각해보던 이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일은······, 다시 상의하시지요.”
그 말을 남겨둔 이이는 마치 도망치듯 장원을 떠났다.
괜히 미적거리다 광해군에게 설득 될 자신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건 이이가 무장한 노비들의 변란보다 백성들의 안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광해군이 빙긋이 웃고 있었다.
*****
여진의 주식은 조와 수수, 그리고 유목민족이 대부분 그렇듯이 양을 먹는다.
일부에서 소를 식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여진족에게 기근이란 조와 수수의 경작량이 줄어드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초원의 풀이 잘 자라지 않아 양이 굶주려 죽거나, 아니면 알 수 없는 병이 돌아 많은 수의 양이 죽어나갔을 때다.
올해는 그 세 가지가 모두 겹쳤다.
비가 제대로 내리지 않아서 조와 수수의 작황이 좋지 않았다.
더불어 초원의 풀이 말라 양들의 먹이도 줄었다.
거기다 알 수 없는 병까지 돌면서 각 부족이 가진 양들의 절반가까이가 죽어나갔다.
이대로는 당장 여진의 각 부족들이 겨울을 나기가 어려웠다.
서둘러 족장들이 모여 사태 해결을 위해 머리를 맞대야 했지만 고질적인 질시와 신뢰부족이 단결을 방해했다.
그 상태에서 여진의 상황은 점점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북방의 관인들과 지인들에게 서신을 보내 그와 같은 여진의 상황을 파악한 이이가 광해군과 다시 자리를 한 것은 9월 초순의 일이었다.
“기근······, 들었더군요.”
“그러니 대비해야 합니다.”
광해군의 말에 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걸 어찌 알았냐는 둥의 말은 필요 없었다.
지난 시간 광해군이 벌인 일들 중에 놀랍지 않은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어찌 이런 걸 다 아느냐는 이이의 물음에 광해군은 매번 ‘그럴 거 같았거든요’라 답했다.
이번이라고 다를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 쓸데없는 답을 듣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수는 얼마나 생각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며칠 후에 보낼 철포를 합해 백문이에요. 거기다 승자총통과 화차도 운용한다니까······. 병사들의 수가 최소한 7백은 되어야 해요.”
지금 이순신의 휘하에 있는 군병의 수가 2백 75명이다.
그러니 광해군은 지금 4백이 넘는 이들을 보내야 한다 말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건······, 불가능한 수치입니다.”
노비의 수가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다.
한성 안에서 단시간 안에 그렇게 많은 노비를 사들이면 일시적인 품귀현상이 벌어지면서 가격이 오르긴 하겠지만 못 구할 수는 또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많은 수의 노비가 움직이면 당연히 관부의 시선을 잡아 끌 게 된다.
그렇게 노비들이 군병으로 사용되기 위해 북방으로 이동하는 걸 알게 되면 그걸 그냥 둘 사대부는 조정에 아무도 없었다.
그 부분을 거론하는 이이에게 광해군이 답했다.
“그러니 대감의 활약이 필요한 것이겠지요.”
“예?”
얼른 이해하지 못한 이이에게 광해군의 설명이 이어졌다.
“명목은 일손이 부족한 북방 병영에 일꾼으로 보내는 거예요. 무장과 훈련 이야기는 쏙 빼자는 거죠.”
“길게 속일 수는 없을 겁니다. 당장 훈련을 시작하면 말들이 나올 테니까요.”
“그땐 유사시에 대한 대비라고 둘러대야죠.”
“신료들이 무슨 유사시냐고 물을 겁니다.”
“그땐 지금 알아보신 걸 말씀하시면 되지 않을 까요?”
그렇게 쉽게 설득될 이들이 아니라는 걸, 그 말을 하는 광해도, 듣고 있는 이이도 안다.
그 탓에 선뜻 답하지 못하는 이이의 입에서 침음이 새어나왔다.
“흠······.”
그런 이이에게 광해군이 말했다.
“서인들과 친하시잖아요. 그들을 설득하세요. 겨우 5백도 안 되잖아요. 그 수로 뭘 하겠어요.”
광해군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이이가 가진 영향력 상 그가 나서면 서인들은 눈을 감아줄 수도 있었다.
물론 자신이 서인을 지지하겠다는 약속이나 실천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쯤이야······.
그러니 광해군의 말대로 5백을 넘지 않는다면 서인은 설득할 수 있다.
하지만······.
“동인들은 제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겁니다.”
이이의 걱정에 광해군이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들은 제가 맡을 게요.”
무슨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몰랐지만 이이는 그런 광해의 말을 믿었다.
이년간은 무조건 믿겠다던 약조가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인을 설득할 이이가 장원을 떠나자 광해도 곧바로 김억수를 찾아 선전으로 향했다.
노비를 구하자면 돈이 들고, 광해에게 돈이 나올 구멍은 여전히 김억수뿐이었기 때문이다.
쌀로 인한 이득으로 기분이 좋았던 김억수는 광해군의 방문에 급격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노비 장정 한명에 얼마인줄은 아십니까?”
“나야 모르죠.”
당연하다는 듯이 답하는 광해의 모습에 김억수는 절로 악물어지는 이를 애써 풀어야만 했다.
“면포 5백 필입니다. 좋은 말 1마리 값과 같지요.”
“그렇군요. 그럼 19만7천5백 필의 면포만 있으면 되겠군요.”
재빨리 계산해내는 광해군의 능력에 놀라는 것도 이젠 하지 않는다.
시큰둥한 표정의 김억수가 말했다.
“제가 평상시에 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금이 대략 면포로 20만포 정도 됩니다.”
“우와, 딱 맞네요. 잘 되었어요. 언제 시작할 거죠?”
“군 마마. 이건 솔직히 너무 과한 지출······.”
“저번에 장원에 와서 뭐라고 했더라······. 쌀로 벌어들인 돈이 면포로 30만포도 더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거 다 내덕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자신의 반대를 중간에 가로막는 능청스런 광해군의 말에 김억수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흐으으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