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효과가 시작되다
사신단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억수같이 쏟아 붓던 장마가 끝이 났다.
그 끝에 장원은 이전보다 더 분주했다.
특히 화약제조를 맡은 기술자들의 움직임이 더 바빴는데 그건 장마로 인해 습기를 먹은 화약을 말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걸 바라보며 광해군은 흑색화약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사실 흑색화약이고, 무연화약이고 간에 화약이 습기에 약한 것은 동일했다.
단지 기술이 발전하면서 습기에 영향을 덜 받는 보관 방법이 개발되었을 뿐이다.
특히 구리로 만들어진 금속제 탄피의 개발은 습기에 대한 영향에서 상당부분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이 되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종이 탄피로의 개발을 진행했던 것은 조선의 기술로 쉽게 따라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금속제 탄피를 만드는 것은 지금의 기술로도 가능은 했다.
탄두와 그 탄두를 탄피에 완벽하게 밀폐시키는 기술도 마찬가지다.
실제 현대시대엔 수동으로 탄환을 조립하는 간단한 장비도 존재했었으니까.
문제는 탄피의 제작에 소요되는 시간, 다시 말해 생산성에 있었다.
공작기계들이 충분한 현대에서야 순식간에 찍어내는 탄피지만 지금 조선의 기술로 만들자면 그거 하나 만들자고 상당한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할 테니까 말이다.
더구나 금속제 탄피를 사용하는 탄은 후방 생산기지에서 무조건 보급을 받아야만 한다.
하지만 종이제 탄피로 만든 탄은 필요에 따라 전장에서 병사들이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었다.
이것은 보급 체계나 수송 체계가 발달하지 않은 지금의 시대상 상당한 이점을 부여할 것이 분명했다.
사실 유럽에서 초기 금속제 탄피를 기피한 이유도 이와 비슷했다.
그래도······.
여전히 잘 떨어지지 않는 유혹을 애써 누르며 일어선 광해군이 향한 곳은 화약제조기술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곳이었다.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니라 움직일 때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광해군이 화약제조기술자들을 도와 습기를 머금은 화약을 말리고 있을 때 그로부터 천리 떨어진 곳에서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
너른 마당에 화약 가루를 널어 습기를 빼는 작업을 지휘하는 이순신의 턱밑으로 땀이 떨어져 내렸다.
화약의 특성상 햇빛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것은 피하면서 말려야 했기에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사실 습기에 젖었어도 이 정도로 많은 화약을 구한 것이 기적이었다.
함경도 훈련원으로 부임하자마자 이순신이 한 것은 함경도 전역에서 승자총통과 사전총통을 모아들인 것이다.
그나마 천지현황으로 대변되는 대구경 총통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병기목록에는 버젓이 적혀있는데 실제 병기고에는 제 수를 채워두지 않았던 것이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깨지거나 금이 간 것들이 다수고, 제대로 된 것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변경임에도 불구하고 총통을 녹여 동을 팔아먹는 행위가 기승을 부렸기 때문이다.
이순신으로써는 변경에까지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고 있다는 것에 큰 우려를 느끼게 되는 계기였다.
광해군의 장원에서 가져온 철포가 아니었다면 큰 우환을 안고 시작해야 했을 터였다.
다만 다행히도 크기가 작아서 상대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인지 상당수의 승자총통과 사전총통이 각지의 병기고에 남아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화약이 문제였다.
양은 둘째 치고,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는 화약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함경도 각지에 만들어진 군영들 중 한곳인 아산보의 군관인 이억이란 자가 관리하던 화약이 제법 잘 보관되어 있어 큰 위안이 되었다.
사실 지금 마당에 널어 말리고 있는 화약들도 그 이억이란 군관이 함경도 관내의 여러 병기고를 돌며 쓸 수 있는 것들을 추려온 것이었다.
“저것만 잘 말려도 적지 않은 힘이 될 거 같습니다.”
이억의 말에 이순신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가 60문의 철포와 함께 가져온 화약의 양은 10회 발사 분이었다.
다시 말해 60문의 철포가 열 번씩 쏘면 모두 소진되는 양이란 뜻이다.
얼추 적은 것 같지만 그 양만도 750근, 수레로 2대 분량이다.
아직 화약의 대량 생산체제를 완비하지 못한 광해군의 장원은 이걸 만들기 위해 거의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군기시에서 기존에 만들어 오던 화약의 양에 영향을 주지 않은 상태에서 유황과 염초를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걸 위해 선전의 대행수인 김억수가 들인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명과 왜를 통한 밀무역에까지 손을 댔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그 화약을 만드는 동안 김억수, 그 대상인의 살이 8근이나 빠졌을까.
여하간 적은 양은 아닐지라도 충분한 양도 아니었다.
그것이 이순신이 화약을 서둘러 모아온 연유였다.
그것으로 그는 승자총통과 사전총통을 운영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운영병들도 육성 중이다.
운이었는지, 아니면 필연이었는지 이순신이 맡아온 관직이 바로 함경도 훈련원 봉사, 그러니까 훈련소 교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병력이 많은 건 아니었다.
훈련원 기존의 병력 열둘에다 신병 스물을 합쳐 모두 32명.
거기다 광해군의 장원에서 함께 훈련하다 데려온 포수 20명을 합쳐 55명을 채웠다.
총통 1문에 5명이 배치되는 것이 조선군의 편제였으니 그걸 그대로 준용하면 철포 11문을 사용할 수 있는 병력이었다.
터무니없는 숫자였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병력을 늘일 방법도 없었다.
병적 자원의 소집권한은 병마절도사에게 있었고, 그는 이순신을 통해 전달된 광해군의 서신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나마 이억이 조산보의 병사 서른 중 스물을 동원하는 것을 문제 삼지 않는 선에서 타협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확보한 병력이 고작 75명이다.
철포 60문, 승자총통 50문, 사전총통150문으로 만든 화차 3량을 갖췄으면서도 정작 그걸 운영할 병력이 모자랐던 것이다.
그나마도 몇 안 되는 훈련원 군관들이 이순신을 못마땅해 했다.
기본적으로 조선 병사의 무기는 창과 칼이다.
북방의 기병이 강하다지만 그것도 고급 병종이다.
일반 백성들에게서 군역으로 모집된 병사들로 기병을 키우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훈련원에서 가르치는 것은 창술과 검술이다.
한데 그걸 다 무시하고 오로지 총통의 사용법만 가르치니 불만이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군관들에게 고위 지휘관이 말했다.
“내버려 두어라. 저러다 실전을 겪으면 알게 될 터이니.”
그 말에 훈련원 군관들의 비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들의 눈엔 북방전선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철부지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런 이들의 냉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의 준비는 착실하게 진행되어갔다.
함경도의 고위 장수들 중 그런 이순신을 유심히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함흥 병마절제사인 이용이었다.
병마절제사는 일종의 지역 사령관으로 도 단위의 군대를 지휘하는 병마절도사를 보조하는 역할을 맡는 고위 장수였다.
고위 지휘관들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이순신의 모습에 감명을 받았던지 어느 날, 그가 돕고 나섰다.
자신의 휘하인 함흥의 군영에서 병사들을 뽑아 훈련원으로 보낸 것이다.
물론 도병마사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기에 부족한 기본기를 닦는다는 명목을 달았다.
그렇게 보낸 이들의 수가 2백. 함흥 절제사 휘하의 군병 4백중 절반에 달하는 수였다.
그로써 이순신의 휘하에 모인 병력은 2백 75명이 되었다.
그렇다 해도 그가 운영할 수 있는 철포의 수는 55문에 불과했다.
승자총통과 화차를 위해 병력을 나누면 그 수는 더 떨어질 것이 뻔했다.
그래도 이전에 비해 훨씬 많아진 숫자에 나름 만족하며 이순신은 병사들의 훈련에 매진했다.
그러는 가운데 8월이 왔다.
*****
여름의 끝물,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면서 남쪽에서부터 추수가 시작되었다.
8월은 민족의 명절인 한가위가 포함된 달이다.
평상시 한가위 전으로 곡물가격과 과일 가격은 폭등한다.
찾는 사람은 많고 수는 적기 때문이다.
과일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가격이 치솟기 시작했다.
한데······.
곡물, 특히 쌀 가격이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를 파악하던 이들은 상당히 놀랄 만한 결과를 받아들었다.
전체적인 조선의 소출이 늘어난 것이다.
이유는 명확했다.
대지주들을 중심으로 해서 소규모로 사용되던 철제 농기구의 사용이 확대된 것이 주요 원인이었던 것이다.
조선 농토의 8할을 차지하는 지주들이 거의 모두 철제 농기구를 소작농들에게 쥐어줬다.
그 결과 생산량이 이전 해에 비해 이 할이나 늘었다.
그것이 오히려 쌀 가격을 끌어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다만 아직 전국적인 추수가 완전히 진행되지 않아서 그 하락폭이 작았던 데다 한가위라는 명절의 수요량 증가가 하락폭을 받아내고 있었기에 시장에선 보합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전에 광해군으로부터 언질을 받아 다른 때와 달리 곡식을 사들이지 않았던 김억수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그와 달리 이전 해의 상황만 믿고 이번도 사전에 대량의 쌀들을 사들였던 대상들은 당황했다.
쌀값은 제대로 오르지 않았고, 자신들이 물량을 풀지 않았음에도 시장엔 쌀이 제대로 공급되었다.
소출이 늘어나 대상들이 모조리 살 수 없었던 쌀들이 결국 시전에 나온 까닭이다.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쌀의 매점매석이 실패한 것이다.
조선 제일의 거상인 김억수가 손을 대지 않은 것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전체적인 매점매석 량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그 상태로 시간이 흐르자 모조리 쌀의 매점매석에 돈을 묶어두었던 대상들에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여러 상품을 거래하는 대상들의 특성상 쌀에만 돈을 묶어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버티다 못한 이들이 상대적으로 자금의 여유가 컸던 김억수를 찾았다.
그들은 느긋한 김억수의 상술에 말려 자신들이 산 것보다 훨씬 싼 값에 쌀을 넘기고 자금을 만들어 돌아갔다.
그렇게 확보한 쌀을 김억수가 시전에 풀었다.
시전에 형성된 가격에 비해 조금 더 싼 가격으로 내놨지만 그보다 싼 가격에 인수한 덕에 돈은 오히려 남았다.
그렇게 되자 쌀 가격은 더 떨어졌다.
김억수를 통해 낮은 가격에 대량의 쌀이 풀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쌀을 매점매석했던 대상들의 입장에서 더 난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들도 김억수를 찾았다.
당금의 시기 그들의 쌀을 사줄 수 있을 만큼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조선에서 그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결국 대부분의 대상이 김억수에게 쌀을 넘겼다.
자신들이 들였던 돈의 3분지 1가량을 날렸지만 오히려 다행이라 말할 정도였다.
김억수가 아니었다면 파산할 수도 있을 만큼 위기로 몰렸던 대상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일로 조선 대상들 사이에 매점매석의 위험성이 제대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대상들의 위기와 상관없이 싼 가격에 쌀을 팔았음에도 김억수는 상당한 이익을 남겼다.
그것에 기뻐한 김억수가 장원을 직접 찾아 그 소식을 광해군에게 전했다.
한데 김억수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광해군은 시큰둥했다.
당연한 이야기로 시간 빼앗지 말라고 면박까지 주었을 정도다.
그럼에도 김억수는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