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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18화 (18/325)

제18화. 명으로 종계변무사를 보내다

그 소식을 가장 먼저 받은 것은 환관인 알지였다.

그가 오늘도 기술자들과 토의로 여념이 없던 광해군에게 다가섰다.

“궁에서 전갈입니다, 마마.”

“전갈? 무슨 전갈?”

“이순신 공에게 함경도 훈련원 봉사의 직이 제수되었으니 즉시 임지로 임하라는 어명이옵니다.”

알지의 말에 광해군이 토의 중이던 별채 창문을 통해 저만치서 포수들과 함께 훈련에 여념이 없는 이순신을 내다봤다.

드디어 그가 다시 관직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것도 광해군의 기억대로 함경도로.

이제 계획의 가장 큰 획을 긋기 위해 본격적인 움직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광해군이 기술자들에게 계속해서 토의를 시켜놓고 이순신을 만나기 위해 별채를 벗어났다.

선조15년 5월, 이순신이 함경도 훈련원으로 부임하기 위해 장원을 떠났다.

그는 광해군과 금부도사의 도움으로 장원에서 함께 훈련했던 포수 20명을 데리고 갔다.

실제 사격 훈련이 거의 없던 조선군에서 장원의 포수만큼 실사격 훈련을 많이 해본 포수들은 찾기 어려웠다.

그들이 이순신과 함께 장원에 머문 몇 달간 매일같이 하루 한차례 이상은 포를 쏘아댔기 때문이다.

아직은 화약이 부족한 조선의 현실상, 그것은 어디서도 쌓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런 포수들에다 60문의 철포, 그리고 분량의 화약도 함께 가지고 갔다.

그것을 위해 동원된 수레만 서른 대에 호위병사만 30명이 추가되었다.

수레는 김억수가 동원했고, 호위병사는 국왕의 허락을 얻어 금부도사가 한성부에서 차출한 병사들이었다.

그렇게 이순신이 함경도로 떠난 다음날, 광해군은 반가운 이를 맞이할 수 있었다.

지난해 9월, 명으로 떠났던 홍순언이 돌아온 것이다.

8개월만의 귀환이었다.

“고생 했습니다.”

광해의 치사에 홍순언이 고개를 조아렸다.

“모든 것이 군 마마의 은덕입니다.”

그리 답하는 홍순언의 행색이 허름하지 않았다.

그것에 기대를 건 광해군의 물음이 던져졌다.

“어찌 되었습니까?”

광해군의 물음에 홍순언이 답했다.

“모두가 군 마마의 말씀대로 되었나이다.”

홍순언의 답에 광해군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

홍순언이 돌아온 날 밤, 광해는 과거의 그때처럼 홀로 선조를 찾았다.

이번에도 그날처럼 책을 덮은 선조가 광해를 바라봤다.

“어쩐 일이더냐?”

이전보다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그런 선조에게 광해가 말했다.

“명으로 종계변무사를 보내주시옵소서.”

광해군이 말에 선조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아직 네가 명에서 무엇을 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만.”

“사람을 보냈었습니다.”

“사람을 보냈었다?”

“예. 아바마마.”

광해의 답에 선조는 언뜻 폐출되었던 역관 1명을 명으로 보냈었다는 금부도사의 옛 보고가 떠올랐다.

“하면 그가 무슨 답이라도 가지고 왔더냐?”

묻는 왕의 음성에 기대가 없다. 하긴 기껏 보낸 이가 죄를 지어 조정에서 폐출된 역관 나부랭이였으니까.

한데······.

“예. 정식 사신을 보내면 공식적인 확답을 해주기로 하였나이다.”

광해군의 답에 선조의 눈이 커졌다.

“무, 무어라 했느냐? 명이 공식적인 확답을 해주기로 하였다고 했느냐?”

“예. 그러하옵니다.”

“누구의? 누구의 언질을 받았다더냐?”

선조의 다급한 물음에 광해군이 답했다.

“예부시랑 석성의 확답이옵니다.”

예부시랑이면 조선으로 치면 예조참판, 그러니까 외무부 차관이다.

그 정도 인사의 말이라면 믿어도 좋았다.

다만······.

“확실한 것이더냐?”

선조의 물음에 광해군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소자의 목을 걸겠나이다.”

그 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최근 벌어진 일들만 보아도 광해군의 말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대번에 밝아지는 선조의 입가엔 크게 만족한 미소가 걸렸다.

“이 아비가 내일 그 일을 처리할 것이다.”

선조가 공적인 일에 사사로운 호칭인 ‘아비’를 입에 담았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

다음 날 열린 조회에서 선조의 명으로 종계변무사를 주축으로 하는 사신단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사신단을 보낼 때는 상인들도 함께 따르는 것이 관례다.

일종의 관무역이 병행되기 때문이다.

기존의 관례에 따라 관무역을 허락받은 상인들이 다투어 한성으로 몰려들었다.

교역이 허가된 물품의 수량과 품질을 확인받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그 준비에만 시일이 한 달 이상 걸렸다.

그런 저런 연유로 사신단이 명으로 출발한 시기는 한성에서 장마가 막 시작되던 6월 말이었다.

그 사신단엔 당연히 홍순언이 참가해 있었다.

그의 직책은 종계변무사인 황정욱을 보필하는 종계변무부사였다.

일개 중인을, 그것도 죄를 지어 폐출되었던 자를 부사로 삼을 만큼 선조의 기대와 기쁨이 컸음을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떠나는 사신단엔 수전의 행수인 조필도 끼어있었다.

그는 철물전의 행수로 자리를 옮긴 나석과 함께 김억수가 가장 신뢰하는 수하들 중 한명이었다.

사실 이번 사신단엔 수전의 자리가 없었다.

관무역 거래권을 획득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럼에도 조필이 끼어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수전의 행수로써가 아니라 광해군의 시부름꾼으로 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홍순언은 광해군의 특명을 가지고 가고 있었다.

광해군이 강조하길 ‘이 일에 조선의 국운이 걸렸다.’고 했었다.

그 안에 숨겨진 뜻을 모두 알진 못했지만 조필은 반드시 성사시키겠다는 일념으로 무장되어있었다.

그렇게 잔뜩 긴장한 조필에게 홍순언이 다가왔다.

“눈에서 불이라도 튀어나올까 두렵구려.”

자신의 긴장을 빗대어 말한 홍순언에게 조필이 겸연쩍게 웃어보였다.

“광해군 마마의 명을 꼭 성사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꽉 차서······. 그런데 부사 영감은 걱정이 안 되시는 모양입니다. 얼굴이 편안하십니다.”

조필의 궁금증에 홍순언이 빙긋이 웃었다.

“걱정할게 무어겠소. 내 광해군 마마의 말대로 해서 안 되는 걸 보지 못했소. 천리 밖, 한성에 앉아서도 명의 일을 다 꿰고 계신 분의 명이니 그대로 따르면 모든 것이 무탈하게 다 이루어 질 것이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홍순언의 말에 조필이 물었다.

“어찌 그리 철석같이 믿으십니까?”

“내가 겪은 것이 그러니 어찌 믿지 않겠소.”

“직접······, 겪으셨단 말입니까?”

“당연히. 그러니 이리 평안하게 가는 게 아니겠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러십니까? 제게 귀띔 좀 해주시면 아니 되시겠습니까?”

조필의 사정에 홍순언이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그게 그러니까 말이오······.”

홍순언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사신단의 관인들은 물론이고, 상인들, 그리고 정사인 황정욱까지 슬그머니 귀를 열었다.

그렇게 모든 사신단 사람들이 집중하는 가운데 홍순언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

홍순언이 명의 황도인 북경에 도착한 것은 한성을 출발한지 한 달 만이었다.

광해군이 이이를 통해 마련해준 국경 통행증을 가진 덕에 국경을 넘는 것에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정이었다.

그렇게 북경에 도착함과 동시에 홍순언은 광해군이 시킨 대로 소문을 내었다.

소문을 내는 방법도 광해군이 넌지시 알려준 그대로였다.

아이들에게 당과를 사주고 조선의 홍역관이 돌아왔다는 노래를 부르게 시킨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만든지 사흘이 되었을 때, 북경 저자의 한 객잔에 머물고 있던 홍순언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예부시랑의 집사라 소개한 이를 따라 으리으리한 한 저택으로 안내된 홍순언은 생각지 못한 사람을 마주할 수 있었다.

과거 자신을 옥사로 이끌었던 바로 그 기녀를 만난 것이다.

그것도 예부시랑의 부인이 되어있는 그녀를 말이다.

“아니 기녀가 예부시랑 씩이나 하는 고관의 아내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툭 불거져 나온 물음은 사신단 행렬에 속한 한 상인의 것이었다.

잘 나가던 이야기의 맥을 끊는 질문이었지만 그를 타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그 부분에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현실로써는 감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던 까닭이다.

그런 상인의 질문에 응해 홍순언이 그녀와의 첫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사실 홍순언이 그녀를 만난 것은 수년 전 사신 행렬에 역관으로 따라갔을 때였다.

긴 여정의 피곤도 풀겸 동료들과 기루를 찾았을 때 그 기녀를 만났다.

그날 처음 기녀로 나섰다는 그녀는 술자리에서 구슬피 울었다.

다른 이들은 재수 없다며 역정을 냈지만 홍순언은 왠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결국 자리를 옮겨 왜 그런지 물었다.

그 물음에 기녀가 내놓은 답은 꽤나 식상한 것이었다.

아비가 빚만 남기고 죽어 그 빚을 갚을 돈과 아비의 장례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을 팔아 기녀가 되었다고 말이다.

그게 가여웠던 홍순언은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내어주어 그녀가 기녀를 면하고 아비의 장례도 다 치를 수 있게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그때 여인이 홍순언의 신분을 물었을 때 그는 그저 ‘조선에서 온 홍역관이다.’ 라고만 알려줬다.

사정이 딱한 기녀를 도운 것이었기에 대가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홍순언의 이야기에 사람들, 특히 주루의 출입이 빈번한 상인들의 눈빛이 묘했다.

뭐랄까. 겨우 그것에 속았냐는 비웃음 정도.

솔직히 당시 홍순언의 동료들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기루에서 기녀들이 돈 많은 상인들을 알겨먹을 때 주로 쓰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집안의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뭐 대부분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건 처음 발을 들여놓을 때의 일이고 나중엔 그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는 기녀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홍순언은 그때 내어주었던 돈에 공금이 섞여 있었다.

나중에야 그걸 알고 당황했지만 그땐 이미 사안이 커질 때로 커져버린 후였다.

그것이 사신단의 공금을 횡령했다는 죄목으로 홍순언이 파직되고 옥살이를 한 발단이었다.

여하간 그 이후로 이어진 홍순언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렇게 빚을 갚고 아비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왕래가 뜸해졌던 아비의 친구가 찾아왔단다.

그는 삶이 곤궁해진 그녀가 안타까워 자신의 집으로 들여 병중에 있던 아내의 간병을 맡겼다나.

그렇게 맡게 된 간병을 지극정성으로 하는 것을 보고 그 아비의 친구가 깊은 감명을 받았단다.

그래서 결국 아내가 죽은 후, 그녀를 후처로 삼았다는 것에서 홍순언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자신의 이야기에 탄성을 금치 못하는 이들을 일별한 홍순언이 잠시 과거로 샜던 앞 이야기를 다시 이어갔다.

그렇게 만난 그 기녀의 남편이 바로 석성. 명의 예부시랑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평소 그녀에게서 홍순언의 이야기를 들으며 감명을 받았다며 자신의 부인에게 대가없이 베푼 은혜를 갚겠다면서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 모든 과정과 대화 내내 이루어졌던 일들이 대부분 광해군의 언질과 같았다는 홍순언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찬탄을 터트렸다.

그런 이들을 바라보며 홍순언이 말했다.

“그러니 걱정할 게 없단 소릴세. 이번 일도 광해군 마마의 말대로만 하면 다 잘 풀릴 거란 소리라, 그 말이지.”

홍순언의 말엔 확신이 가득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조필은 제발 그의 말대로 되길 빌었다.

솔직히 조필은 자신이 받아가는 임무의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이 풍부한 명에 철의 판로를, 그것도 대량의 판로를 뚫어오라는 지시를 받았던 까닭이다.

그래서인지 등에 짊어진 보쌈의 무게가 유난히 무거웠다.

사실 그의 보쌈에는 명의 상인들에게 보여줄 제본(製本)의 목적으로 가져가는 2근짜리 철정(鐵鋌)이 3개나 들어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는 자신에 차서, 누군가는 걱정과 긴장에 찬 채, 사신단은 길게 꼬리를 이으며 명으로, 명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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