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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16화 (16/325)

제16화. 새로운 것들에 대한 도전 (2)

물론 화약의 생산이 많아지는 조선 후기로 가면 염초밭이라는 것을 만들어 사용하게 되지만 아직은 그 기술이 없었던 것이다.

그 염초밭에 대해서 광해가 거론하고 나섰다.

“다진 진흙 위에다 재를 덮고, 그 위에······.”

광해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이러면 정말 염초를 얻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해보면 답이 나오겠죠? 문제는 사용되는 소변과 시간이에요.”

염초를 만들어내는 이 방법은 최소 1년이라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충분히 썩고, 그 안에서 화학반응이 일어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모든 반응의 촉매는 분뇨다. 그중에서도 소변.

사람의 대소변이 중요한 퇴비자원이 되는 이 시대에 소변을 모아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걸 거론하는 한 숯쟁이에게 광해가 답했다.

“그래서 대가를 줄까합니다. 지금쯤 육의전의 선전에서 한성부는 물론이고, 가까운 마을에도 소문을 내고 있을 겁니다. 소변 한말을 모아오면 면포 1필을 준다고 말이죠.”

아직까지 조선은 법적 통화가 마련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교환수단으로 현물이 사용되었는데 면포와 쌀, 또는 콩이 주를 이루었다.

물론 전통적으로 금과 은도 사용이 되었지만 대부분 국제 교역에서 통용되었고, 조선 내에서 화폐 용도로 적극적인 사용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 조선의 상황 상 면포 1필은 제법 괜찮은 소득이었다.

실례로 좋은 말 한마리가 면포 5백 필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정도 대가가 제시되면 모르긴 몰라도 너나할 것 없이 소변을 모은다고 난리가 날 터였다.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에게 광해군이 말했다.

“그러니 여러분은 염초밭의 실현에 모든 것을 거세요.”

광해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 속에서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은 어찌 합니까?”

이미 말했지만 조선은 고순도의 유황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유황이 아주 안 나는 것은 아니라서 역사적으로 조선도 유황점(硫黃店)이라는 유황광업소를 설치하여 유황을 채굴해 사용했다.

조선 후기로 가면 전국에서 20여 곳이 넘는 유황광산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으니까.

하지만 조선 초기인 지금은 없다.

그렇다고 왜나 명이 잘 주지 않는 유황을 수입하겠다고 나설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 결과 광해군이 쥐어짜고 또 쥐어짠 기억에 의지해 유황점이 있었다는 지명 하나를 떠올려 김억수에게 전달했다.

진산이라는 지명 하나를 알려준 광해에게 김억수는 모래사장에서 바늘차기라며 불퉁거리긴 했지만 곧바로 사람들을 보내 수소문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또한 김억수는 유황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오는 이에게 면포 10필을 주겠다고 보부상들에게 약속했다.

짭짤한 부수입을 노린 보부상들이 조선팔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유황이 날만한 곳은 모조리 찾아 올 터였다.

재빠른 행동력과 그걸 확대해 내는 역량은 김억수가 왜 조선 제일의 상인이 되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 일들을 떠올리며 광해군이 답했다.

“황은 조만간 해결책을 제시하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지금보다 효율적인 화약의 대량생산 방식을 고안해 주세요.”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의 표정은 다소 회의적이었다.

그럼에도 반론이 없는 것은 그걸 명한 이가 다름 아닌 왕자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임금의 지지를 받는.

그러니 이들은 실제 성공할 수 없을 가능성이 크지만 시키니 만든다, 정도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직전에 보았던 철포 개량조에 비할 수 없이 소극적인 모습이었다.

열성적일 때와 비교해서 연구결과가 더디고 크지 않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저들의 눈에 가능성을 보여준 후 시작하면 시간이 너무 늦기 때문이다.

이제 임진왜란까지 남은 시간은 겨우 10년뿐이었다.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광해군의 운명, 나아가 조선의 운명을 가를 것이었다.

그렇게 화약의 대량 제조 방법에 대해 화약제조기술자들에게 맡겨둔 광해군은 곧바로 다른 별채로 이동했다.

그곳엔 철포 개량조와 비슷한 인적구성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다른 것이라면 이이를 통해 모아들인 목수와 종이를 만드는 지장(紙匠)이 서넛씩 포함되어 있다는 점뿐이었다.

그들이 자신을 주시하자 광해군이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여러분을 ‘소총 개발조’라 부를 겁니다.”

“소······, 총이요?”

“네. 총통의 일종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승자총통과 비슷한 걸 만들 겁니다.”

소총이라는 생경한 명칭에 당황했던 이들은 승자총통이라는 익숙한 이름에 다소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광해는 직전의 철포 개량조에게 그러했듯이 삐뚤빼뚤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광해군이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한 것은 화승총의 역사를 바꿔놓은 드라이제 바늘 총이었다.

최초로 볼트액션 방식을 채용한 이 소총은 르네상스 시절, 독일 내 여러 나라들 중 한곳인 프로이센에서 19세기 초, 정확히는1836년에 개발한 것이다.

여전히 흑색화약이 사용되던 시절에 만들어진 총이었기 때문에 몇몇 난관만 해결하면 충분히 생산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총이 중요한 이유는 비로소 추진화약과 탄환을 일체형으로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 시대처럼 구리로 된 탄피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종이로 화약과 탄환을 감싼 형태다.

격발 방식도 현대 탄환과 유사한 구조를 가졌다.

탄의 제작 방법은 그리 복잡하지 않아 전장에서 병사들이 직접 만들어 쓸 수 있었을 정도였다.

구조가 그만큼 간단하기 때문이다.

종이로 싸인 탄환과 추진 화약 사이에 구리로 만든 작은 뇌관을 두어 기다란 바늘이 파고들면서 격발, 추진화약에 불을 붙이는 방식이었다.

탄의 장전 방식은 후장식.

총구 앞으로 화약과 탄환을 넣어 다지는 전장식에 비해 상당히 빠른 장전속도를 가졌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분당 6발 정도다.

이 시대 화승총의 장전시간이 30초 내외인 것을 감안하면 비교할 수 없이 빠른 속도다.

또한 장전을 하려면 일어서야 하는 전장식에 비해 엎드려서도 장전이 가능한 장점도 가졌다.

거기다 이 방식을 취하면 비와 함께 화승총의 가장 큰 취약점으로 여겨지던 바람의 영향에서 만큼은 완전하게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물론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단점도 있다.

가장 취약한 부분은 격발장치인 바늘 형 공이의 내구성이다.

뾰쪽한 바늘처럼 생긴 공이로 탄 안의 뇌관을 두드려야 하기 때문에 사용할수록 바늘 형 공이의 끝이 무뎌지는 것이다.

이로 인해 최악의 경우엔 공이가 탄 안의 격발장치를 때리지 못해 불발탄이 발생하기도 한다.

전성기엔 200발당 한번 교환이 이루어질 만큼 발전했다지만 초기엔 10여발을 쏜 다음엔 바늘 형 공이를 바꾸어야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또 하나, 기술발전이 완전히 이루어진 다음에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약실과 노리쇠 사이의 밀폐가 부족해서 가스 누출현상을 빚었다.

그로인한 탄속의 감소는 사거리의 손실로 이어졌지만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사실 이것은 금속제 탄피가 나오기 이전의 모든 후장식 소총이 겪은 문제다.

이걸 보완하기 위해 개량형 소총들에서 수도 없는 방법이 사용되었으니 광해군은 조선이 개발하는 드라이제 바늘 총에서도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앞서 말한 문제들은 일정부분의 기술개발로 보완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기술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안고 있었다.

일단 간단한 구조의 기초적인 화승총보다 상대적으로 복잡한 기계장치로 인해 제작비가 비쌌다.

그래서 광해군도 처음엔 미니에탄을 사용하는 전장식 라이플을 다른 선택지로 놓고 고민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실전 상황에서 후장식이 갖는 효과를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더구나 드라이제 바늘 총은 화승총의 패러다임을 바꾼 총기로 수세기 앞선 기술이다.

뭐, 솔직히 이것보다 더 발전된 볼트액션 식 소총이 없는 건 아니다.

프랑스가 개발한 샤스포 소총같이 기술적으로는 드라이제 바늘 총과 별반 차이가 없으면서도 더 간단한 구조, 더 높은 명중률과 더 긴 사거리를 가진 것들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광해군이 드라이제 바늘 총을 선택한 이유는 그나마 원리를 알기 때문이다.

‘광해’ 라는 이름을 달기 며칠 전, TV에서 화승총의 발전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시청했던 것이다.

그 프로그램에서는 화승총에서 현대적인 소총으로 변화하는 계기로써 드라이제 바늘 총에 대해 중점적으로 소개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막연하나마 원리와 주요 장치들에 대한 지식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발전은 아이디어에서 시작된다지 않던가.

그러니 세세한 제작 기법을 몰라도 아이디어는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야장과 대장장이들에게 아무것도 알려준 것이 없이 만들어내라고 요구한 게 아니라는 소리다.

물론 그렇다 해도 그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은 조선의 기술자들이겠지만.

여하간 그렇게 완성되기만 하면 수세대를 앞선 아이디어로 제작된 기술이다.

당연히 다른 나라가 따라오려면 설사 조선이 만든 총기를 확보한다 해도 짧은 시간으로는 어렵다.

그만큼 조선은 긴 시간, 상대적으로 전장에서 우월한 지위를 누릴 수 있다는 소리였다.

거기다 이 방식을 조금만 더 발전시키면 현대의 소총과 비슷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당장은 해결하기 어려운 기술적 난점들이 있지만 차차 조선의 기술이 발전하면 이 기술을 가지고 있던 조선은 결국, 그 어떤 나라보다 먼저 현대식 소총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될 거라는 소리였다.

앞선 기술을 보유한 나라의 이점이다.

그 이점이 앞서 쟁취한 우월적 전장 지위를 조금이라도 더 긴 시간동안 조선에게 부여해 줄 것이라 믿었다.

그렇기에 광해군은 기술적 우위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총열 제작 방법도 단통권성(單筒捲成)의 형태를 요구했다.

말이 어려운데 그냥 쇠막대기에 쇠 판자를 감아서 총열을 만드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사용되는 대장기술은 당연히 두들겨 펴서 만드는 단조다.

이걸 굳이 거론하는 이유는 실제 역사에서 초기에 조총을 만들 때는 두 쪽으로 만든 총열을 붙이는 작업을 통해 총열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내구도는 단통권성 형태로 만든 것 보다 떨어진다.

솔직히 광해군의 마음 같아서는 K2 자동소총이라도 만들고 싶었지만 지금의 기술력으로는 이게 한계치였다.

사실 후장식을 선택한 것도 일종의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걸 알면서도 밀어붙인 것은 조선의 대장장이들이 제일 잘하는 단조로 총열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몇 시대를 앞선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자신감 때문인지 광해군은 철포 개량조에 했던 것처럼 강선을 추가로 요구했다.

강선은 동일한 화약, 동일한 총으로도 더 멀리, 더 정확하게 사격할 수 있게 해준다.

이미 언급했지만 제대로 된 강선은 산업혁명 이후 프레스와 선반 등, 공작기계의 등장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이다.

하지만 기초적인 강선은 지금의 기술로도 구현이 가능했다.

실제 역사에서도 15세기 말 유럽에선 강선을 파는 수동기계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고, 16세기 초에 벌어진 잉글랜드 내전에선 강선 머스킷으로 무장한 부대가 일반적인 활강 머스킷으로 무장한 부대를 박살낸 사례도 있었다.

그러니 불가능한 건 아니다.

이 시기 유럽이 했다면 조선도 가능했다.

단지 그걸 만들 생각을 하고 방법을 찾느냐 아니냐의 차이뿐이다.

다른 건 몰라도 손재주와 머리 하나는 타 민족에 절대 뒤지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이니까.

그거 하나를 믿고 광해군은 난색을 표하는 기술자들을 밀어붙였다.

물론 철포 개량조와 마찬가지로 당근을 제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집이요!”

철포 개량조에 속한 이들만큼이나 놀라는 이들에게 광해는 약속했다.

“먼저 만들어내는 조에 속한 이들에게 신분이나 직책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모두 1채씩 지급할 겁니다.”

그 말에 사람들의 눈빛이 불타올랐다.

시작하라는 소리도 없었지만 광해군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개발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던 광해가 장원이 확장되기 이전의 건물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로운 포와 총을 개발하느라 바쁜 이들이 있었다면 기존의 발명품을 만들어 내느라 분주한 사람들도 있었다.

다수의 대장장이들이 또 다른 야장들의 지휘 하에 이미 개발에 성공한 철포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며칠 안에 10문을 만들어 금군으로 들여보내기로 했다.

이미 총통부대를 갖추고 있는 금군이었기에 그걸 운용할 포수들도 보유하고 있었다.

왕성 수비가 주 임무인 금군에 철포를 보내면 선조가 그것의 시험 발사를 관람할 것이다.

지금도 선조는 그 날을 학수고대 중이었다.

그렇게 10문의 제작이 끝나면 곧바로 정철에게 주기로 약속했던 100문의 철포를 만들어야 했다.

더구나 그가 함경도 관찰사로 가는 시기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광해군의 계획에서 함경도는 상당히 중요한 지역이다.

그 지역이 안정화 되어야 광해군의 첫 번째 단추인 철의 대량생산에 이은 보편화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걸 위해 필요한 부분들을 몇날 며칠 장원에서 먹고 자며 하나하나 채워가는 일에 정신이 없던 광해군을 금부도사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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