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새로운 것들에 대한 도전 (1)
새해 첫 조회가 있은 날 이후, 장원의 설비가 대폭 늘었다.
이번엔 김억수가 아니라 왕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설비였다.
애초에 일을 시작할 때 선조의 도움을 받게 되면 실패를 자인하겠노라 약속한 일이 있었던 광해군은 처음엔 거부의사를 밝혔었다.
훗날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면 이번 일을 걸고 넘어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조는 그것은 광해군이 요청할 때의 일이고, 자신이 원해서 주는 것은 상관없이 받으라 명을 내렸다.
전자가 두려웠지 주는 게 싫은 건 절대 아니었으니까.
그 말에 광해군은 냉큼 선조의 선물을 받았다.
이후 군기시의 야장들도 추가로 넘어왔다.
화포를 만드는 이들은 물론이고, 화약기술자들도 대거 장원으로 배치되었다.
그것은 철포에 사용될 화약도 직접 만들 거라는 광해군의 계획을 금부도사에게 들은 선조의 호의였다.
그렇게 넘어온 기술자들의 수가 군기시에서 해당 업무를 보던 인원의 절반에 달했으니 선조가 철포개발을 얼마나 기뻐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광해군이 그들만 믿은 것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선조가 보낸 이들은 관인들이다.
왕의 마음이 변하면 하루아침에 싹 빠져나갈 수도 있는 인원이란 뜻이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광해군은 이이를 통해 꾸준히 실력 있는 대장장이들을 모집했다.
물론 그들의 신분이 대부분 관노비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철제 농기구의 판매 수익이 있었지만 그보다 많은 돈이 연구비와 실험비로 들어가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광해는 여전히 고용비를 지출할 능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이의 말대로 김억수에게 부탁하면 해결되겠지만 광해는 노비들을 고집했다.
나름의 연유가 있었지만 광해군은 이이에게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여하간 그렇게 모은 대장장이들은 군기시에서 넘어온 야장들과 함께 일을 시켰다.
배타적인 야장들이 처음부터 선뜻 기술을 가르쳐줄리 만무했지만 함께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결국 기술을 습득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많은 수의 인원이 늘어난 장원은 매일같이 바쁘게 돌아갔다.
광해군은 그렇게 바쁜 이들 중에서 일부를 추려 하나의 조를 만들었다.
기존부터 광해군과 함께 일하던 대장장이 몇, 처음 넘어왔던 야장들 몇, 새롭게 합류한 야장들에서도 몇을 추리고 거기에 화약제조기술자들 중에서도 몇을 추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조에 광해군은 ‘철포 개량조’라는 명칭을 달았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에게 맡길 일은 철포를 개량하는 일이었다.
광해군은 그들에게 지난 몇 달간 포수들이 심도 있게 논의한 총통 개선 사항들을 전달했다.
거기엔 고쳐졌으면 하는 부분들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어찌 고칠지에 대한 것까지 세세히 적혀있었다.
문제는 그 부분에 차이가 벌어졌다는 점이다.
고칠 건 열 가진데 고칠 방법은 두세 가지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고쳐야할 단점은 분명히 있는데 해결할 방법이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였다.
그걸 놓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던 철포 개량조원들과 포수들에게 광해군이 새로운 과제를 던졌다.
“단점들을 일거에 해결할 신형 철포를 만드세요.”
자신들도 기존 총통이나 철포로는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없는 단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인지 철포 개량조에 소속된 이들은 두말없이 광해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어떤 철포를 생각하시는지요?”
물음을 건넨 이는 모여 있는 이들 중 가장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봐야 기술자를 천시하는 조선의 정책으로 인해 종칠품에 불과했지만.
그런 그의 물음에 광해가 붓으로 삐뚤빼뚤 그려 보인 것은 현대시대엔 홍이포로 잘 알려진 것이었다.
동시대 유럽에서 사용하고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하는 병자호란 때는 청군도 사용한 포였다.
더구나 연철의 함유량을 높이고 탄소의 함량을 낮추어서 잘 깨지지 않는 철을 만든 이상 지금의 조선이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거기에 커다란 수레바퀴를 단 포좌까지 그려 넣자 야장들과 포수들의 표정이 극명하게 바뀌었다.
야전에서의 이동성이 좋아지니 포수들은 좋아했지만 철포의 무게를 생각하면 그걸 버틸 바퀴를 만들어야 했던 야장들의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야장들을 두고 포수들이 몰려 나갔다.
자신들은 새로운 철포의 개발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기술자들만 남자 광해군은 두 번째 그림을 그렸다.
기존 총통이나 철포와는 완전히 달랐고, 방금 전 그려보였던 홍이포와도 달랐다.
포신은 더 길고, 구경은 더 작았다.
길고 작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가볍다는 것을 뜻했다.
하긴 총통도 무거운 무게는 언제나 부담이 되긴 했으니까.
한데 그것만 그려진 게 아니었다.
“이건 뭡니까?”
“강선(腔線)이예요.”
“강선······, 이요?”
“네. 강선이라는 것은······.”
강선.
총이나 포 내부에 선을 파는 것을 말한다.
최초의 강선은 직선이었지만 결국 나선형으로 고착되었다.
총탄이나 포탄이 나선형 강선을 따라 회전하며 발사되어 직진성과 정확성을 높인다.
그로인한 파괴력 증대와 명중률 확대가 강선의 가장 큰 이점으로 꼽힌다.
처음 듣는 원리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들이었다.
특히 기존 총통의 제작에 익숙한 야장들의 표정엔 반감도 적지 않게 보였다.
총통 제조의 가장 큰 어려움은 내구성의 확보였다.
한데 총구 안에 고랑을 파면 당연히 내구성은 더 떨어질게 뻔했다.
사실 그래서 제대로 된 강선포가 나온 것도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선반이라는 공작기계가 발명 된 후, 통자 쇠의 가운데를 파서 포신을 만드는 기술이 정착된 이후였다.
지금의 기술로는 분명 실현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도 광해군은 조선의 기술자들을 믿었다.
유럽에선 다마스쿠스 검이라 칭하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최고의 강도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던 검을 일반 대장간에서 찍어내는 위엄을 토했던 게 바로 이 땅의 대장장이들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이들에게 광해군이 말했다.
“처음엔 이해가 잘 안 될 거예요. 하지만 작은 것을 만들어 실험하다 보면 지금 말이 무슨 뜻인지 곧 알게 될 거에요.”
“그야······, 말씀대로 해보긴 하겠습니다만······.”
여전히 회의적인 이들에게 광해군은 김억수의 동의를 받아둔 정책을 처음 꺼내들었다.
“이걸 개발해 내면 상금이 주어질 거예요.”
상금이라는 자신의 말에 이채를 띠는 이들에게 광해군이 말을 이었다.
“한성부 외곽의 3칸짜리 초가집이 주어질 겁니다.”
3칸이라는 말은 방 2개에 부엌 하나가 딸린 집을 말한다.
일반적인 백성들이 사는 집이다.
아무리 한성부 외곽이라지만 하급 기술자들로써는 거의 평생을 모아야 살 수 있는 큰 재산이었다.
너무 큰 보상이었던지 한 야장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에게 주신단 말씀이십니까?”
“물론이죠.”
광해군의 확인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긴가민가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이들 속에서 노비 신분인 대장장이 한사람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예, 말하세요.”
처음엔 지금 같은 광해군의 말투에 사람들은 기겁을 했었다.
노비에게 일국의 왕자가 존대를 썼기 때문이다.
당장 노비들이 바닥에 엎드려 살려 달라 빌었을 정도였으니 다른 이들의 충격이야 말해 무얼 할까.
하지만 그것도 자주 보면 그러려니 한다.
더구나 일부러 괴롭히려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자 사람들은 광해군의 말투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간혹 그런 광해군의 말투를 뒤에서 비웃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거나, 나이가 어려도 하대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친분을 쌓지 않은 이들이라면 광해군은 신분에 관계없이 존대를 사용했다.
그것은 그가 한때는 대한민국 사람이었다는 마지막 증표 같은 것이었다.
물론 이십대 중반인 환관 알지에게만은 하대를 사용했다.
그는 존대를 써서는 상대가 불가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광해군의 존대를 마주한 노비처럼 바닥에 바짝 엎드려서는 무슨 말을 해도 꼼짝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나절을 싸우고서야 광해군은 두 손을 들었고, 유일하게 나이가 많으면서도 광해군의 하대를 듣는 사람이 되었다.
여하간 광해의 허락에 손을 든 대장장이가 주변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저희 같은 천것들에게도 주십니까요?”
대장장이의 물음에 사람들의 표정에 비웃음이 담겼다.
시킨 일을 마무리 했다고 노비에게 대가를 주는 주인은 없는 법이다.
그럴 거라면 먹이고, 입혀 가며 노비를 둘 필요가 없을 테니까.
한데······.
“당연하죠.”
광해의 답에 물었던 당사자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의 눈도 함께 부릅떠졌다.
그런 이들에게 광해군의 말했다.
“초가집은 이미 말했듯이 상금이에요. 보수(報酬)가 아니라는 소리죠. 또 하나, 이건 여러분에게 나쁜 소식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쁜 소식이라는 말 때문인지 대번에 긴장하는 표정이 되는 이들에게 광해군이 말을 이었다.
“······. 비슷한 개발을 다른 조도 시작할 거예요. 당연히 상금은 먼저 개발하는 쪽이 갖는 거죠.”
“그럼 나중에 개발하는 쪽은 어찌 됩니까?”
불안한 표정으로 묻는 이에게 광해군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개털. 그리니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거죠, 뭐.”
아무것도 주는 게 없다는 뜻이다. 그걸 사람들은 제대로 알아들었다.
“어, 언제부터 시작합니까?”
“지금······.”
광해군의 말은 채 맺지도 못했다.
“야! 종이 가져와. 도면, 도면부터 그린다.”
가장 직책이 높다던 이의 외침에 눈빛이 변한 이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그런 이들에게선 직책이니, 신분이니 하는 차이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 집인가?’
하긴 한국 사람에게 집은 재산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었으니까.
쓴웃음을 지은 광해군이 분주한 철포 개량조의 별채를 나섰다.
광해군이 활강포인 홍이포를 개발하면서 동시에, 활강포에 비해 관통력이 부족한 강선포를 원하는 것은 정확도 때문이었다.
먼 거리에서 누구보다 정확한 포격을 가할 포병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의 계획을 향해 한걸음 더 나아간 광해가 또 다른 별채를 향해 움직였다.
이번에 방문한 별채엔 최근 군기시에서 넘어온 화약 화약제조기술자들과 광해가 데리고 있던 노비 숯쟁이들 중 일부가 모여 있었다.
그중 화약제조기술자들의 수는 십여 명이 조금 넘어서는 정도였는데 이들은 군기시에서조차 화약제조의 달인이라 불릴 만큼 완숙의 경지에 이른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광해가 맡긴 부분은 화약의 대량 생산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사람들은 처음부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목탄이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겠습니다만 염초와 황은 다릅니다.”
그랬다.
사실 조선 초기만 해도 염초와 황은 거의 대부분이라 해도 좋을 만큼 명과 왜에서 수입을 해서 충당했다.
고(高)순도의 황이야 조선 땅에서 나는 것이 드물다 알고 있었으니 당연하다 생각했지만 염초까지 그랬다는 것은 좀 의외였다.
사실 이때만 해도 조선은 염초를 자연 상태에서 생겨난 것만 채취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