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대비를 시작하다
정인홍의 파직, 그리고 경상 관찰사 유상현의 삭탈관직(削奪官職)과 위리안치(圍籬安置)로 새해 첫 조회는 막을 내렸다.
처음 이 문제를 들고 나왔던 유상현에게 일반적인 파직과 유배가 아니라 관직을 지냈던 이들의 명부에서까지 이름을 지우는 삭탈관직에다 아예 외부의 접근을 차단하는 위리안치의 처분이 내려진 것은 그만큼 선조의 분노가 크다는 방증이었다.
그렇게 자신들의 이익에 도전하는 광해군을 희생양 삼아서 정국의 주도권을 쥐려던 동인들의 시도는 오히려 그들 스스로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기고 끝났다.
힘없이 어깨를 늘인 채 대전을 나서는 동인들을 바라보던 정철의 시선이 저만치 왕과 함께 걸어가는 광해에게로 향했다.
“잠룡(潛龍)에서 이젠 비룡(飛龍)이 된 겐가······.”
정철은 선조와 함께 멀어져가는 광해를 바라보며 어제, 자신의 사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밤도 아닌 이른 아침부터, 그것도 이이나 금부도사가 아니라 환관 알지만을 앞세운 광해의 방문에 정철은 꽤나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군께서 이 이른 아침에 제 집까지는 어인 일이십니까?”
정철의 물음에 상석에 앉은 광해군이 답했다.
“대감을 도우려고요.”
“절······, 돕는다고요?”
“예.”
“무엇을 도와준다는 말씀이십니까?”
“조만간 함경도로 가실 겁니다.”
광해군의 말에 정철의 시선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정철의 현재 관직은 전라 관찰사다.
솔직히 정조하례와 모든 신료가 참여하는 새해 첫 조회만 아니었다면 지금 한성엔 있지도 않을 사람이란 소리다.
그런 자신을 찾아온 것도 예상외인데 광해군은 뜬금없이 정철이 관직을 옮길 것이라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혹, 주상 전하의 언질이라도 계셨던 겁니까?”
물으면서도 그건 아니지 싶었다.
선조는 사전에 친절하게 누군가에게 자신의 뜻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대신들의 충돌 속에서 왕의 권리를 지키고, 왕실의 이익을 취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왕자를 보내 미리 언질을? 그거는 아니라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런 정철에게 광해군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직 아바마마는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시게 되실 겁니다.”
광해의 말에 정철은 혼란을 느꼈다. 그 혼란들 중 한 조각을 정철이 내어보였다.
“그럼 혹시 대사헌 대감이 그걸 돕겠다, 그 말을 하시는 겁니까?”
“그 꽉 막힌 양반이요? 숙헌 대감이 그렇게 유연한 사람이었다면 제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요.”
광해군의 말 대로면 이번일은 이이와 무관하다는 뜻이다.
왕도 아니고 이이도 아니라면······.
“그럼 누구의 뜻입니까?”
직접적인 정철의 물음에 광해군이 답했다.
“누구의 뜻이 아니라 상황이 그렇단 소리에요.”
“상황······, 이요?”
“예. 북방, 그중에서도 함경도 지방이 소란스럽다죠.”
“북방이야 야인들의 준동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니까요.”
세종 때 4군6진을 건설하여 두만강과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은 이후로 여진과의 싸움도 그 주변에서 벌어졌다.
척박한 땅에 사는 여진은 식량이 항상 부족했고, 손쉬운 식량 수급지역으로 조선을 꼽았다.
당연히 소란과 사고가 끊이지 않는 지역이었다.
벼슬아치에게 좋은 지역은 아니라는 소리다.
처리할 일은 산더미인데다 자칫 잘못 일을 처리하는 경우엔 그 책임을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감이 가게 될 거란 말입니다. 느슨하면 사고가 터지는 곳이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정철이 왜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는지 광해는 잘 모른다.
정확한 근무일자도 알지 못하고, 단지 선조16년에 일어난 여진족장 니탕개의 난 이 벌어졌을 때 함경도 관찰사였다는 것만 안다.
그러니 광해의 계획엔 정철이 필요했다.
군 지휘관은 아닐지라도 함경도 전체를 관장하는 관찰사였으니까.
“제 성격이 모가 났다는 소리로 들립니다만.”
“모가 났다, 라기 보다는 꼼꼼하고 완벽하다, 정도로 이해해주시면 좋겠는데요.”
느물거리는 답에 정철은 눈앞에 앉아있는 광해군이 여덟 살의 아이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해서 제게 정확히 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설마 함경도 관찰사로 나아가는 것이 제게 좋은 일이라 말하시지는 않을 테고 말입니다.”
“일단 함경도 관찰사로 나가는 일은 좋은 일일 겁니다. 대감에게 큰 공을 세울 기회가 될 테니까요.”
“큰 공이요?”
“올해 야인들의 땅에 기근이 들 겁니다.”
광해의 말에 정철이 표정이 굳었다.
야인들의 땅에 기근이 들면 예외 없이 그들이 조선을 침공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당연하죠. 그래서 대감을 돕겠다고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어찌 도우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게 야인들을 일거에 제압할 무기가 있습니다.”
“군께 말입니까?”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다.
여덟 살 아이에게 여진족을 제압할 무기가 있을 리 만무한 일이니까.
“예.”
천연덕스러운 광해군의 답에 정철이 말했다.
“말만으로는 붕조(鵬鳥)도 잡는다지요.”
“당연히 실물도 보여드리지요.”
“실물을······, 보여주신다고요?”
“당연하잖아요. 우리가 말만으로 신뢰를 가질 사이는 아니니까요.”
당사자를 앞에 두고 ‘우린 서로 믿지 못하는 사이’라는 말을 얼굴색 하나 안변하고 웃으면서 말할 수 있다는 것에서 정철은 광해군을 다시 봤다.
“제가 그간 군을 잘 못 보았던 모양입니다.”
“어찌 보셨는데요?”
“과거엔 그저 똘똘한 어린 왕자, 최근엔 대사헌 대감의 꼭두각시였죠.”
“음······. 대사헌 대감이 들으시면 억울해 하시겠네요.”
그 말인즉 이이가 오히려 광해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는 소리다.
이전이었다면 헛소리라 치부했겠지만······.
“그렇겠군요. 언제 소신이 대사헌 대감께 술을 한잔 내야 하겠습니다.”
“좋겠죠. 제 오른팔과 왼팔이 친하게 지내겠다는 소리니까요.”
“오른팔과 왼팔······, 이요?”
이 한 번의 만남으로 자신을 측근으로 삼겠다는 치기어린 말에 웃음으로 되묻는 정철에게 광해군이 답했다.
“대감은 중요한 걸 놓치는 군요. 내 팔이 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오른팔인가가 문제일거란 생각은 안하시니 말이에요.”
광해군의 말에 정철의 입가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런 그에게 광해군이 물었다.
“근데 밥 있어요? 서둘러 오느라 밥을 못 먹고 와서. 아하하하.”
그날 태연히 알지까지 불러 자신의 앞에서 아침을 챙겨먹은 광해의 안내로 한성부 외곽의 한 장원에서 정철은 충격적인 것을 마주했다.
철포.
10문의 철제 총통이 일제히 발사되는 장관을 목격한 것이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열 번씩이나.
그 정도를 쏘아댔음에도 철제 총통은 흔한 균열하나 가지 않았었다.
“놀랍군요.”
“우리 기술자들이 고생 좀 했죠.”
광해의 말에 ‘기술자’라 불린 대장장이들과 군기시의 야장(사실 야장이나 대장장이나 다 같은 말입니다. 다만 글 속에서 화포제작 전문가들을 쉽게 표현하기 위해 마치 다른 호칭처럼 쓰려합니다.)들이 의기양양하게 웃어보였다.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정철이 물었다.
“어찌 만드신 겁니까? 총통은 쇠로 만들면 잘 깨지고, 여러 번 쏠 수 없다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무른 쇠. 그러니까 연철을 섞은 겁니다.”
광해의 개발품은 아니다.
과거 처음 제대로 된 철제 대포를 생산한 영국의 이야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낸 결과였다.
물론 그걸 실현시킨 것은 군기시에서 넘어온 야장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었고.
그렇다고 그걸 미주알고주알 떠들 생각은 아니었다.
“놀랍고 대단한 일입니다. 총통 한 문을 만들 때 들어가는 동의 양이 상당해서 나라에 큰 부담이 되던 참이니 반드시 보탬이 될 겁니다.”
“그래야겠지요.”
물론 그걸 위해서 철포를 만든 게 아니다.
광해의 목표는 그보다는 한걸음 더 나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일이니 지금 그걸 거론할 수는 없었다.
그 탓에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애써 누르는 광해에게 정철이 물었다.
“해서 이것을 주시겠다는 소립니까?”
“그럴까 합니다.”
“놀랍고 대견한 일임엔 분명하나 총통은 이미 조선에 있는 무기입니다. 함경도에도 충분히 배치가 되어있지요.”
“압니다.”
솔직히 자신의 계획을 점검하면서 광해는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많은 화기들이 조선 각지에 배치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천지현황으로 불리는 화포들도 광범위하게 배치가 되어있었고, 특히 함경도엔 다수의 신기전까지 배치가 되어있었다.
처음엔 왜 이렇게 많은 화포를 가지고서도 니탕개의 난에 휘말렸는지, 임진왜란에서는 왜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첫째. 화약의 부족이었다.
명의 간섭, 재료수급의 차질로 그 많은 화기들을 제대로 활용할 만큼의 화약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둘째. 관리의 부실이다.
기껏 만들어놓은 화포와 화약들 중 상당수가 망가져있거나 젖어서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기록상 존재하는 화포가 무기고에는 없었다는 기록이 수두룩했다.
이걸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죄로 지방관이나 하급 무장들 다수가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존재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 기록만 있다.
그다음에 그걸 어떻게 바로잡고, 어찌 채워 넣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했지만 너무 당연한 일이라 기록하지 않았던지, 지방에는 기록했지만 중앙 정부로 보고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과거 난중일기를 보면 아마도 그냥 방치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여하간 화포는 있다. 그것도 상당량이.
“하면 저 철포들이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아십니까?”
정철의 물음에 광해가 빙긋이 웃었다.
“그 총통들이 모두 제대로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광해의 물음에 정철은 섣불리 답하지 못했다.
당장 그가 관찰사를 지냈던 강원도와 전라도에서도 화포의 관리는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화포뿐이 아니라 무기 자체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창칼은 수량도 부족하고, 보관 상태도 엉망이었다.
활과 화살, 총통의 경우엔 서류에만 존재하고 실제는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돈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활과 화살은 글을 읽는 사대부들도 심신수양을 위해 자주 다루는 것인데다 총통을 만드는 주재료인 동은 상당히 비싼 광물이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총통을 녹여 팔다 잡혀 참형에 처해진 일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사정을 잘 아는 정철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광해군이 말했다.
“부임하실 때 100문을 드리죠. 당연히 분량의 화약도 함께 내드릴 것입니다.”
적지 않은 양에 정철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런 그에게 광해군이 말했다.
“그러니 꼭 막아주셔야 합니다. 곧 벌어질 저들의 침입을.”
*****
전날의 기억에서 벗어난 정철의 시야에선 이미 광해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철은 그날 본 광해군의 눈빛을 잊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