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4화 (4/325)

제4화. 첫 무장을 만나다.

“정말 소인으로 괜찮으시겠나이까?”

조심스럽게 묻는 홍순언에게 광해가 답했다.

“그러니 불렀겠지요.”

광해의 답에 무언가를 잠시 생각해본 홍순언이 말했다.

“이 불미한 놈을 불러주셨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하명하소서. 그 일이 무엇이든 이 홍순언, 온몸을 다 바쳐 군 마마의 명을 완수해 내겠나이다.”

영영 벼슬길에서 멀어질 줄 알았던 차에 다른 이도 아니고 군이 손을 내민 일이었다.

더구나 권신으로 이름 높은 이이가 연관되어.

성사시켰을 때 자신에게 어떤 이득이 있을지 벌써 알아차린 것이다.

그런 홍순언을 바라보는 광해의 미소가 짙어졌다.

계산이 빠르다.

자칫 잔머리에 능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시킬 일을 처리하자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우선······.”

이후로 광해의 말이 길게 이어질수록 홍순언의 눈이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

광해와의 만남이 있은지 이틀 뒤, 그러니까 선조 14년 9월 12일 홍순언이 명으로 떠났다.

광해가 그에게 내준 것은 이이를 움직여 만들어낸 국경 출입 허가서 뿐이었다.

함께 호종할 몸종도 홍순언이 마련했고, 노자도 홍순언이 자비로 대었다.

그건 ‘그대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에요. 무엇이 아까운가요?’라는 광해군의 말 때문이었다.

물론 진짜 이유는 사사로이 광해가 내어줄 돈이 없다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떠나가는 홍순언의 뒷모습을 이이와 이항복이 도성의 성문 위에서 바라보고 서 있었다.

“진짜 가는 군요.”

“······.”

자신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이에게 이항복이 물었다.

“가능하다 보십니까?”

“결과는 보면 알겠지.”

“노자는 어찌 마련했답니까? 군의 연치(年齒)상 명으로 가는 비용을 댈만한 돈은 없으셨을 텐데요.”

“안주셨네.”

“예? 아니 그럼 무슨 돈으로...?”

“홍순언이 마련했네.”

“저자가 말입니까? 제 알기론 지난 일로 파직되어 폐출될 때 가산(家産)을 몰수당한 것으로 압니다만....”

“그랬지. 지금 살고 있는 집과 하인도 제 백부가 집안 망신시키지 말라는 의미로 마련해 준 것이니까.”

“한데 무슨 돈으로...?”

“그 집을 저당 잡혔다더군. 한성 제일의 고리사채 꾼에게 말이야.”

“한성 제일의 고리사채 꾼이면... 설마, 김 대행수 말입니까?”

놀란 눈으로 묻는 이항복에게 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선전(線廛)의 대행수인 김억수.”

“미쳤군요. 그 인간 말종에게 돈을 빌리다니.”

거친 이항복의 반응을 이이는 이해할 수 있었다.

육의전에서 비단을 파는 선전의 대행수인 김억수는 돈에 환장한 사람이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도 가리지 않아 돈 귀신이라는 별명을 달고 살 정도다.

그 덕인지는 몰라도 저자거리의 백성들에게 조선팔도에서 가장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임금이 아니라 김억수를 제일 먼저 꼽는다.

당연히 뒷배도 어마어마하다.

동인의 주요인사인 이산해는 물론이고 임금의 총애를 받는 인빈 김 씨의 비호까지 받는다.

들리는 말에는 취급하는 물건이 물건이라 그런지 명의 조정에까지 선이 닿아있다는 소문도 돈다.

그런 그의 위세가 어찌나 크던지 고리의 피해를 막고자 나섰던 한성부의 관리가 오히려 선량한 상인을 괴롭힌다는 죄를 받아 곤장을 맞고 벼슬이 강등되어 지방으로 쫓겨난 적이 있을 지경이었다.

훗날 홍순언이 귀국하여 만족할만한 이득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의 일가는 그 날로 집에서 쫓겨날 것이 분명했다.

아니, 집만 빼앗기는 선에서 끝나지 않을 공산이 컸다.

김억수라면 절대로 들인 돈만 회수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 생각에 잠겨있던 이이에게 이항복의 음성이 들려왔다.

“도대체 광해군이 무슨 비기를 알려줬기에 그 돈 귀신에게 빌릴 생각을 다했답니까?”

이항복의 물음에 이이는 이틀 전, 광해군의 처소에서 있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홍 역관이 이렇게 된 이유를 제공한 여인 기억하죠?”

“기억하긴 합니다만...”

“명에 가거든 황도에 들어서면서부터 무슨 수를 내든 소문을 내십시오. ‘조선의 홍 역관이 왔다’라고. 이틀? 사흘이내엔 답을 얻을 겁니다.”

솔직히 이이는 옆에서 들으면서도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홍순언도 이이와 같은 눈치로 보였다.

그럼에도 저렇게 무리를 해서 가는 그의 절박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긴 조정에서 내쳐진 관인의 마음이야 무슨 수를 쓰든 돌아오고 싶을 테니······.

이항복에게 결과는 보면 알거라 말했지만 솔직히 이이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무슨 큰 묘수라도 알려주나 싶었는데 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홍순언의 모습이 한성에서 멀리, 멀리 사라져갔다.

*****

홍순언이 한성을 떠났다는 말을 전한 이이가 다녀간 뒤 광해는 초조한 마음을 달래고자 궁을 걸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있다고는 해도 햇볕이 쨍쨍해서 멀리도 못나가고 전각의 바로 앞을 걸었다.

한데 그렇게 걷는 광해의 눈에 자꾸 밟히는 이가 있었다.

“누구냐?”

광해의 물음에 그의 시선을 따라간 내시 알지가 답했다.

“금부도사이옵니다.”

현대시대에서 보았던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화(士禍)만 벌어졌다하면 단골로 등장하는 관직이다.

문 박차고 들어와서 ‘어명이다!’ 외치고 싹 다 잡아가던.

당연히 왕의 수족이다.

“금부도사가 왜?”

솔직히 불안했다.

앞에선 ‘봐주마.’ 말해놓고 뒤통수를 후려갈기려고 선조가 때를 노리는 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현대시대 드라마나 영화의 폐해다.

선조가 광해를 갈구는 걸 너무 많이 봐서 불안감이 좀처럼 씻기지 않으니······.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불안하게 살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서 불러와라.”

“예.”

답하고 달려간 알지가 곧바로 금부도사와 돌아왔다.

“경이 제게 할 말이 있습니까?”

말을 뱉어놓고 아차 싶었다.

너무 직설적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예. 소신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왠지 다시금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애써 내리누르며 말했다.

“말씀하시지요.”

“소신, 군께만 조용히 드리고자 합니다.”

조용히.

주위를 물려달라는 소리다.

그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내시 알지와 궁녀 둘이 보였다.

‘아······. 초라하다.’

호위무사도 좀 딸리고 궁녀나 내시들도 쭉 늘어서는······. 왕이나 왕세자처럼 그 정도는 아니어도. 명색이 왕자인데 참······.

여하간 물려달라니 얼마 안 되는 그 인원을 뒤로 물렸다.

자신의 눈짓에 뒤로 멀찍이 물러서는 알지와 궁녀들을 확인한 광해가 금부도사를 바라봤다.

“이제 되었습니까?”

“예. 소신의 청을 들어주셔서 감읍합니다.”

“감읍은 뭐······. 그래서 하고자 하시는 말이 무엇입니까?”

기왕 내친걸음 이번에도 직진했다.

그런 광해의 물음에 금부도사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필요하신 것이 없으십니까?”

“필요한 거요?”

“예. 소신이 마련할 수 있는 거라면 언제라도 말씀만 주십시오. 제 능력이 닿는 한 모두 마련해 드릴 것이옵니다.”

‘아니 왜?’

목구멍까지 올라온 물음을 사력을 다해 내리누르며 광해는 머리를 굴렸다.

금부도사는 왕의 수족. 그러니까 지금 하는 말은 왕의 말?

“혹 아바마마께오서······?”

“아니옵니다. 소신이 그저 군을 연모(戀慕)하여 그리하고자 하옵니다.”

연모.

그러니까 사랑한단다.

설마······ 남색(男色)?

이 색....!

아니, 아니다.

성리학이 세상의 중심이라 떠드는 나라 조선에서 감히 왕자를 앞에 두고 자신이 남색이라 대놓고 떠벌일 사람은 없다.

그러니······.

잠시 생각해보던 광해가 물었다.

“혹시······. 흠모(欽慕)?”

“예? 아! 예. 흠모하여······. 아하, 아하하하.”

겸연쩍게 웃는 것으로 알았다.

이 작자, 문관 출신은 아니다.

순간 뇌리로 번쩍 별이 튀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무장들에게 선을 넣나 고심이 많았다.

이이와 이항복은 무장들과는 연을 맺으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껏 소개해준다는 이들이 문관 출신으로 무관의 관직을 맡고 있는 이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광해는 그런 이들이 아니라 무과를 거쳐 관직에 나온 진짜 무장들을 찾고 있었다.

이이가 소개해주마 했던 문관 출신이면서 고위 무관의 관직들을 차지한 이들로 인해 소외받는 이들을 말이다.

“혹, 무과 출신이십니까?”

“예? 아! 예. 소신 을축년에 치러진 무과에 급제하여 출사한 이래 여진과의 전장과...”

무과 출신이라 업신여기는가 싶어 길어지는 금부도사의 말을 광해가 잘랐다.

“그렇군요. 하면 아는 무장들도 많으시겠고······?”

“그야 함께 북방에서 야인들과 맞서 함께 피를······.”

말을 하다말고 광해의 눈치를 살핀 금부도사가 흥분해 높아졌던 음성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 소신이 미력하여 칼 들고 설치는 무부들 외에는 잘 모르는지라······. 송구합니다.”

문에 방점을 찍고, 무를 천시한 성리학의 폐단이다.

자신들의 피를 흘려 나라를 지키는 이들이 자신감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갖는 것은.

“훌륭한 분이군요, 금부도사는. 그대들 같은 보국충위의 장수들이 죽음을 두려워 않고 변경을 지키니 이 나라가 무탈한 겁니다. 왕실과 조정, 백성을 대신해 감사를 드립니다.”

손을 포개 잡고 고개까지 숙여 보이는 광해의 행동에 금부도사의 눈이 튀어나올까 걱정일 정도로 커졌다.

“구, 군 마마!”

당황과 격동으로 물든 금부도사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그에게 광해가 말했다.

“예서 이러지 마시고 제 전각에서 차라도 한잔 하시겠습니까? 듣고 싶은 무용담이 많습니다.”

“소, 소신의 하찮은 무...용담을 말씀이십니까?”

이전보다 더 놀라는 금부도사에게 광해가 당치않다는 듯이 말했다.

“북쪽 야인들과의 맞서 피를 흘리며 실전을 겪어본 무장의 이야기가 어찌 하찮단 말입니까.”

“예?”

자신의 생각과 전혀 다른 반응에 놀라는 금부도사에게 광해의 음성이 이어졌다.

“북방 전선의 현실을 가장 잘 아는 금부도사와 같은 분들의 이야기가 가장 중하지요. 꼭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하는 광해의 눈은 이야기 거리나 들려달라는 아이의 눈이 아니었다.

그런 광해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금부도사가 고개를 숙였다.

“소신, 아니 소장, 군 마마의 명을 받아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들어가시지요.”

친히 안내하는 광해의 배려에 금부도사는 황송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중천에 떠있던 해가 서산으로 기울 때가 되어서야 한껏 부푼 표정의 금부도사가 광해의 전각을 나섰다.

그렇게 떠나며 금부도사가 광해의 전각을 몇 번이나 돌아봤는지 몰랐다.

지난 세 시진 동안, 일곱 살 아이가 아니라 북방의 전선을 한두 차례는 다녀온 듯한 성인과 대화를 하고 나온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의 이야기에 함께 분노하고, 함께 안타까워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광해가 토해놓은 이야기들을 반추하면 그는 대략적인 북방의 정세와 야인들의 성향, 현재의 판세까지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뿐인가, 광해는 그곳, 북방에서 근무했던 한 장수의 이름까지 거론했다.

그 이름이 전공에 빛나는 고위 무관의 것이었다면 광해의 뜻을 다시 생각해 봐야했겠지만······.

“그 골칫덩이를 찾으신다라······. 왜지? 모두가 피하는 그를.”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결국 머리를 내저은 금부도사가 광해의 전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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