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3화 (3/325)

제3화. 첫 인연들을 엮다.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광해의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있었다.

애써 담담한 척, 대범한 척 연기를 했지만 실제로는 선조와 대화하는 내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워낙 광해를 미워한 것으로 그려진 현대시대의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접했던 탓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선조를 직접 찾아갈 생각을 먹었던 것은 언젠가 역사학자들이 선조에 관해 기록된 정사(正史)들을 통해 광해와의 관계를 설명했던 교양 프로그램을 떠올린 덕이었다.

그때 역사학자들은 어린 시절의 광해를 선조가 꽤나 총애했었다는 추론을 정사의 기록들을 일일이 열거해 가며 설명했었던 것이다.

그 작은 가능성 하나에 모두를 걸어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대의 특성상 왕자가 무언가를 도모하자면 왕의 허락, 또는 묵인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걸 무시하고 일을 진행했다간 자칫 어느 날 사약을 눈앞에 두든지 아니면 유배행 마차를 탈수도 있었으니까.

여하간 영화나 드라마보다는 학자들의 견해가 옳았다는 것이 광해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그 덕에 몇 날, 며칠을 고심하며 세웠던 계획들의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워 넣을 수 있었다.

이젠 다시금 머릿속의 기억들을 모조리 뒤져서 이시대 중국과 유럽의 정황을 끄집어내야만 했다.

아니, 기억이란 놈의 유효기간이 그리 길지 않은 만큼 생각나는 모든 것들을 적어 기록해 놓을 생각이었다.

그것이 원하지도 않았던 조선에서의 삶을 지탱해 줄 커다란 구명줄이 되어줄 것은 분명했으니까.

마음먹은 일을 미뤄둬 봐야 득 될 게 없다는 평소의 신조(信條)대로 광해는 곧바로 지필묵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아이씨, 볼펜하나만 있었으면 원이 없겠네.”

종이위로 삐뚤빼뚤, 붓으로 쓰여 있는 한글은 마치 난해한 기호처럼 보였다.

더구나 중간 중간 번져나간 먹물로 인해 알아보기에도 어려웠고.

써놓은 자신조차 한참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알아보기 어려운 글자들을 다른 이들이 알아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현대의 한글과 언문이라 불리는 조선의 한글은 차이가 많기도 했으니까.

우습게도 그것이 보안의 걱정을 크게 덜어주고 있었다.

“이렇게 저렇게 살아나갈 구멍은 있다는 소리겠지······.”

조금은 웃음이 돌아온 광해의 음성이 방안을 채우고 있었다.

*****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을 지우지 못한 이항복을 곁에 단 이이가 광해를 찾은 것은 만남이 있었던 날로부터 나흘째가 되는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무역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광해의 답에 눈을 감고 있는 이이를 흘깃 일별한 이항복이 물음을 이었다.

“무역은 법으로 정해진 이들에게만 허용되어 있습니다. 아십니까?”

“당연하지요.”

“하면 성상(聖上)의 허락이라도 얻으신 것입니까?”

“아바마마께선 말리지도 않으시겠지만 도와주시지도 않으실 겁니다.”

광해의 답에 이항복은 눈을 크게 떴다.

마찬가지로 광해가 무역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 이후, 줄곧 눈을 감고 있던 이이도 그 답을 듣고는 눈을 떴다.

“설마······. 성상(聖上)과 말씀을 나누신 겁니까?”

“모르십니다.”

광해의 답에 맥 빠진 표정의 이항복이 물었다.

“하나 방금 전엔······.”

“모르시는 것입니까? 모르셔야 하는 것입니까?”

이항복의 말을 가로지르며 나선 이이에게 광해가 미소를 그려보였다.

“필운(弼雲 : 이항복의 자<字>) 대감보다는 역시 우재(愚齋 : 이이의 호) 대감의 판단력이 더 높군요. 역시 경륜이란 걸 까요.”

그 말을 던져놓고 히죽이 웃는 광해를 이항복이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봤다.

이제 일곱 살 난 아이가 마흔 여섯의 이이와 스물여섯의 이항복을 앉혀놓고 경륜을 논한 까닭이다.

하지만 이이는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약간의 실망, 그리고 근심으로 가득하던 직전과는 달리 진지한 눈빛이 되었던 것이다.

“성상께서 모르기로 하셨다는 것은 그렇게 호응해주실 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뜻인데······. 무엇입니까? 그것이.”

이이의 물음에 잠시 미소를 뜸을 들인 광해가 답했다.

“종계변무입니다.”

광해의 답에 이이의 눈썹이 씰룩거려졌다.

종계변무.

한마디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족보를 명이 잘못 기록한 것을 말한다.

고려 말, 이성계에게 쫓겨 명으로 망명한 정적(政敵) 윤이 등이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이자 이성계와는 정적의 입장이었던 이인임의 후손이라 말한 일이 있었다.

이성계를 헐뜯기 위함이었는데 명은 그 말을 믿고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그대로 기록하였다.

훗날 그 오기(誤記)를 알아차린 조선에서 정정을 수도 없이 요청하였으나 번번이 묵살되었다.

종계변무란 그렇게 이백년이나 이어진 일을 말한다.

그와 관련된 일들을 떠올리며 이이가 물었다.

“해결방법이 있으셨던 겁니까?”

아니고서는 선조가 ‘모른 척 해주마.’ 답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걸 위해 무역이 필요한 겁니다.”

방법을 만들기 위해 무역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걸 알아들었는지 이이는 곧바로 그 이면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무역이라 무역은 돈이 되니······. 설마 뇌물······?”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당황하는 이이에게 광해가 쌜쭉한 눈길로 물었다.

“왜요? 정도(正道)가 아니면 걷지도 말아야하기 때문입니까?”

“흐음······.”

선뜻 답하지 못하고 신음만 흘리고 있는 이이를 대신해 생각의 폭이 넓고, 유연한 이항복이 나섰다.

“금도(禁道)는 지키실 겁니까?”

금도, 하지 말아야할 일을 말함이다.

“아닐걸요.”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는 광해의 답에 실망의 빛이 역력해진 이항복에게 광해가 말을 이었다.

“대신 사람의 도는 지키지요.”

“사람의 도······?”

“사람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 사람이라면 의당 지켜야 하는 일. 그것에선 벗어나지 않을 겁니다.”

금도와 사람의 도 사이의 차이를 얼른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는 이항복과 달리 이이는 다시금 눈을 빛냈다.

“정녕 약속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말보다는 약속이란 포장을 더 중히 생각하시는 군요, 대감은. 그렇다면야 약속을······.”

“아, 아닙니다. 함께하는 이의 말이 곧 약속인 것을······. 소신이 실언을 했습니다.”

“함께 하는 이라······. 듣기 좋은 말도 잘 하십니다, 대감은.”

“예? 아! 아하하하하.”

겸연쩍음에 터진 이이의 웃음에 마주 미소 짓는 광해와 달리 이항복은 함께 웃을 수가 없었다.

도무지 어디가 웃긴 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항복에게 광해가 물었다.

“사역원(司譯院:국가 번역기관)에도 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야······. 제가 사역원을 감독하는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니······.”

“그러니 한어(漢語 : 중국말)를 잘하는 이들도 좀 아실 테고······.”

“사역원(司譯院)이라는 곳이 역관(譯官)을 기르고, 통변(通辯)도 맡는 곳이니 당연히······.”

“하면 홍순언이라는 자를 아십니까?”

“홍순언, 홍순언······?”

정작 물음을 받은 당사자인 이항복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데 이이가 나섰다.

“그는 왜 찾으시는 것입니까?”

“아십니까?”

“사사로이 사신단의 공금을 횡령하여 파직된 후, 옥고(獄苦)를 치르고 내쳐진 자이지요. 그 추문에 휩쓸려 당시 꽤 많은 이들이 다쳤었기에 기억을 합니다.”

“내쳐······, 져요?”

묻는 음성이 흔들렸다.

광해, 그러니까 세영이 아는 홍순언은 선조8년에 이이가 거론한 일련의 일로 옥사에 갇혀있다 선조18년 종계변무를 해결한다.

그러니 기억대로라면 옥사에 갇혀있어야 맞는 것인데······.

“예. 파직되어 조정에서 폐출(廢黜)된 후, 옥고를 치르기는 했으나 예정보다 일찍 방면 되었지요. 그렇다고 멀리 있는 건 아닙니다. 그의 사가(私家)가 한성부(漢城府) 안에 있으니까요.”

“하면 그를 좀 볼 수 있겠습니까?”

“행실이 바른 자가 아닙니다. 어찌 그런 자를······. 차라리 필운을 시켜 더 나은 자를 찾아보심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이의 걱정에 광해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대감의 걱정은 이해합니다. 하나 제겐 그가 필요합니다. 하니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광해의 말에 잠시 갈등하던 이이가 물었다.

“답을 드리기 전에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두개 물어도 됩니다.”

광해의 너스레에 작게 미소 지은 이이가 물었다.

“그런 이를 데려다 무엇에 쓰려 하십니까?”

“한어를 하는 자이니 명에 보내야겠지요.”

“명이라면······. 처음부터 뇌물로 시작하는 것입니까? 해서 행실이 좋지 않은 자를 찾으신 게로군요. 바르지 못한 일을 행하여야하기에 말입니다.”

“좋은 일 나쁜 일, 그런 가름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필요하기에 찾는 겁니다. 그리고 줄 것도 없는데 어찌 뇌물을 쓸까요. 처음엔 안면(顔面)입니다. 먹은 것이 없어도 차마 거절하지 못할 부탁, 그걸 가능케 할 이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이가 홍순언이란 말씀이십니까?”

“예. 하니 그를 데려와 주십시오.”

광해의 말에 다시 한참을 갈등하던 이이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

강녕전의 서탁 앞에 앉은 선조의 책이 다시금 덮였다.

다만 이번엔 광해가 아니라 금부도사가 선조의 앞에 부복해 있었다.

“대사헌과 예문관검열?”

대사헌은 이이의 직책이고, 예문관검열은 이항복의 직책이었다.

“예. 분명 그 둘이었나이다, 전하.”

금부도사의 답에 선조의 눈에 놀람이 들어섰다.

거론 된 이들 둘이 모두 권력보다는 덕치(德治)에 뜻을 둔 왕좌지재(王佐之才)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광해를 선택했다?”

“그것이······. 소신이 알아본 바에 따르면 대사헌이 처음 광해군의 부름을 받은 것이 나흘 전이고, 예문관검열은 오늘이 처음 광해군을 찾은 날이라 합니다.”

“겨우 나흘, 거기다 부름을 받았다? 혼으로부터?”

“예, 전하.”

여차하면 벼슬 내던지고 낙향한다는 탓에 붙잡아 두는 것에 애를 먹는 것이 이이였다.

한데 그런 이가 겨우 일곱 살짜리 군이 부른다고 내궁에 까지 걸음을 들여놨단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게다가 총애하는 이항복까지 대동하고.

번잡한 일, 남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일엔 눈길조차 주지 않던 그 이이가 말이다.

“더 지켜보라. 조용히. 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명하는 선조의 음성이 부드럽고, 입가에도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역시!’

금부도사의 오해 위로 또 한 번의 오해가 겹쳐지고 있었다.

*****

홍순언이 파직되어 투옥되어야 했던 죄명은 공금횡령이다.

무역을 위해 사신단이 가지고 간 공금 중 일부를 엉뚱한 곳, 그것도 기루에서 써버린 까닭이었다.

안동부사를 지냈던 조부나 공조참의를 역임한 백부(伯父)의 후광이 아니었다면 목이 달아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중죄였다.

물론 5년간의 옥고는 피할 수 없었지만.

그렇게 옥고를 치르며 망가진 몸을 추스르고 있던 홍순언이 이이의 손에 이끌려 광해의 앞에 엎드렸다.

“며, 명으로 가라는 말씀이시옵니까?”

“그래요. 난 홍 역관이 명에 가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좀 대신 해주었으면 해요,”

“소, 소인이 말이옵니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폐출된 탓에 소신이라 칭하지도 못하는 홍순언, 자신에게 일을 준다니 말이다.

그것도 왕자인 광해군이.

그런 까닭에 잔뜩 놀란 표정인 홍순언에게 광해의 답이 들려왔다.

“그래요.”

“하나 소인은 죄를 지어······.”

“죄라······. 죄이긴 하죠. 그 연유가 무엇이었든 공금을 사적으로 썼으니.”

“주,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바짝 엎드리는 홍순언의 모습에 세영이 의미심장한 미소로 물었다.

“하지만 그 죄로 인해 옥고를 치렀으면 죄 값은 치른 것으로 아는데 아닌가요?”

“그, 그렇긴 하옵니다만······.”

“하면 일을 하는 것엔 문제가 없겠군요.”

광해의 말에 홍순언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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