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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2화 (2/325)

2화. 첫 승부수를 띄우다.

강녕전(康寧殿)의 밤은 수많은 촛불들로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선조는 책을 좋아했고, 사색을 즐겼다.

그런 연유로 밤늦은 시간까지 침전인 강녕전엔 촛불들이 환하게 밝혀져 있곤 했었다.

한데 오늘은 선조가 책을 놓고 갑자기 찾아든 둘째 아들을 마주하고 앉았다.

“무얼 하겠다고?”

물어오는 음성에 의아함이 높다.

“소자가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해결해 보겠노라 말씀드렸습니다.”

선조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네가 지난 이백년간 뛰어난 대신들도 해결하지 못했던 종계변무를 해결할 수 있다, 그 말이더냐?”

“예, 아바마마.”

선조는 당찬 둘째 아들의 답에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총명한 아이였다.

자신의 아이들이 여럿이 있지만 그중 가장 칭찬이 많이 들려오는 아이가 바로 둘째인 혼, 바로 광해였다.

선조 자신또한 사가였다면 서얼로 취급되었을 서자의 자손, 자신의 입장과 비슷한 서자 출신, 그리고 그 옛날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 또랑또랑한 광해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그려지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 어디 우리 혼의 이야기를 들어볼까? 무슨 방법으로 네가 변계종무를 해결할 수 있는지 말이다.”

“들으시면 화를 내실 겁니다.”

“화를 낼 것이다?”

“예, 아바마마.”

광해의 답에 선조의 미소가 조금은 내려앉았다.

“화를 낼 만큼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소리로구나.”

“불민한 소자의 생각으로는······.”

말을 흐리고 눈치를 보는 광해를 바라보며 선조가 흐려졌던 미소를 다시 머금었다.

“네 생각을 듣는 것만으로는 화를 내지 않을 터이니 걱정 말고 말해 보거라.”

“그것이··· 사실 소자의 생각으로는 지난 세월, 명이 종계변무의 수정에 대해 계속 약속만 하고 실행을 하지 않는 것은 그것으로 우리 조선 왕실의 약점 하나를 틀어쥐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옵니다.”

많은 조선의 신하들과 선조를 포함한 역대 조선의 국왕들이 생각한 바도 그랬다.

다만 명이 조선의 상국으로 섬김을 받는 이상, 그걸 지금의 광해처럼 입 밖으로 내본 이가 없었을 뿐이지.

그래서 선조도 광해를 탓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함부로 꺼내선 아니 되는 말이긴 하나 틀린 말은 아니로구나. 하나 그 생각만으로는 방법이 될 수 없다.”

“당연한 말씀이옵니다. 하여 소자는 그 생각을 바꾸어 보려 하옵니다.”

“어찌 말이더냐?”

“그 방법이라는 것이······.”

“여전히 망설이기는······, 다시 말한다만 네 생각을 듣고자 함이지 그 생각의 잘잘못을 따져 널 책하려 함이 아니다. 하니 말해 보거라.”

거듭된 선조의 물음에 광해가 답했다.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그래야하는 필요가 있을 때라 믿사옵니다.”

“그야······, 그렇겠지.”

“종계변무의 경우 그것을 움켜쥐고 있는 것에 비해 그걸 바로잡는 것이 명에 더 이익이라는 생각이 들 때 해결이 될 것이라 보옵니다.”

“흠······. 아직은 맞는 말만 하는 것을 보니 그 이익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방법이 문제가 되는 듯 한데 맞더냐?”

“예, 그러하옵니다, 아바마마.”

“들어보자꾸나.”

“자고로 이익이란 실제로 손에 무엇인가가 잡힐 때가 가장 확실한 법이옵니다.”

“손에 잡힌다라······, 설마하니······?”

무엇인가를 짐작했는지 눈이 커지는 선조에게 광해가 말을 이었다.

“어느 왕조에나 간신은 있고, 그들에게 금과 은은 그 어떤 이득보다 크게 다가오는 법이지요.”

“흐음······.”

긴 침음 끝에 선조가 물었다.

“그 일을 성공케 할 만큼의 금과 은을 조선은 감당키 어렵다. 아느냐?”

“조선의 금과 은으로 할 일이 아니옵니다.”

“조선의 금과 은으로 할 일이 아니다?”

“예, 아바마마.”

“하면 어디의 금과 은으로 한단 말이더냐?”

“양이(洋夷), 서양(西洋) 오랑캐의 것으로 할 것이옵니다.”

“서양 오랑캐의 것으로······. 설마 무역을 생각한다면 해금령(海禁令)으로 인해 양이와의 무역은 금지되어있다는 것을 모르더냐?”

해금령, 달리는 해금정책이라 불리는 이것은 바다를 통한 모든 무역과 교류를 금하는 일종의 쇄국 정책이다.

이것을 처음 택한 것은 명이었고, 명을 상국으로 섬기는 조선은 그 정책을 당연시하며 따르고 있었다.

“지난 정묘(丁卯)년에 명에서 해금령을 완화하여 서양의 오랑캐들 몇몇 나라와 교역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그렇다는 말을 듣기는 하였다만······.”

명이 금하는 일을 구태여 하려 나선다면 조정의 신하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아니된다’ 외쳐 될 일이다.

그걸 너무나 잘 아는 선조는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그런 선조의 생각을 아는지 광해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걸 우리, 조선이 나서서 할 생각은 아니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더냐?”

“모든 일은 명에서 시작하여 명에서 끝이 날 것이옵고, 우리 조선은 그곳에서 생기는 과실만을 취할 것이옵니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가능하다 믿기에 아바마마께 감히 말씀 올리는 것이옵니다.”

“어찌 말이더냐?”

선조의 물음에 광해가 야릇한 미소를 그려보였다.

“군왕이 알아서 좋을 것과 알지 말아야 좋을 것이 있다 들었사옵니다. 소자는 감히 이번 일이 그러하다 생각하옵니다.”

“그게 무슨······.”

“진인사대천명이라 하나 그 과정은 역시 부족한 사람들의 일인지라 옆길로 새기도 하고, 자칫 엎어지기도 하는바 그 후과가 이롭지 아니하면 아바마마께 누가 될까 소자는 근심이 되옵니다.”

말이 어렵고 길다지만 결국 네가 알았다가 일이 잘못되면 발을 빼지 못하니 모르는 게 낫다는 소리다.

솔직히 선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이 말을 건네기 위해 광해는 자신 처소의 환관들을 들들 볶아대며 지금 한 말을 만들어내었다.

그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잠시 주춤했던 선조의 입가로 미소가 깃들었다.

“네가 이 아비를 생각하는 마음이 어여쁘구나. 하면 이 아비가 도와줄 것이 무엇이더냐?”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은 아닌바 그 동안 불편한 이야기들이 들려올 것이옵니다. 애써 귀를 닫으시고 눈을 감아주시옵소서. 충심에서 비롯된 일을 하기 위해서라지만 불민한 소자가 군왕께 가장 하지 마시어야 할 일을 이리 청하옵니다.”

귀를 닫고 눈을 감으라는 말은 못 본 척 해달라는 소리다.

자신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을 못 본 척 하는 것은 군왕이라면 가장 경계해야 할 일임엔 분명했다.

한데 선조는 그것보다는 다른 것이 더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하면 단지 못 본 척만 하면 될 뿐 달리 지원해 주어야 할 것은 없다는 말이더냐?”

“그러하옵니다. 모든 것은 소자가 스스로 해결해 낼 것이옵니다.”

“정녕 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단 말이더냐?”

“예, 아바마마.”

“흠······.”

망설이는 선조에게 광해가 확신을 담아 다시 말했다.

“일체의 재물도, 사람도 청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만에 하나 그리된다면 소자는 그 날로 실패를 자인하고 아바마마의 처분을 달게 받을 것이옵니다.”

“······.”

아무 말 없이 한동안 광해를 바라보던 선조가 입을 열었다.

“네 말을 믿어보마. 한데 시간이 걸릴 모양이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 말하는 걸 보니 말이다.”

“그 바탕을 만드는 것에만 일이년은 족히 소요될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더구나 해결하고자 하는 일이 종계변무이오니······.”

“그렇지. 종계변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지. 지난 이백년 동안 이루지 못한 일이니··· 하면 얼마나 걸릴 것이라 생각하느냐?”

“십년을 생각하옵니다.”

“십년이라······.”

“하나 그것은 명확한 결과를 아바마마께 보여드리는 것이옵고, 이전보다 명확한 확약을 받는 것은 삼사년이면 될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그 말은 몇 년 이내에 명의 확약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렷다.”

“그러하옵니다, 아바마마.”

“정녕 자신 있더냐?”

“소자의 모든 것을 걸 것이옵니다.”

“네 모든 것을 건다?”

“그러하옵니다, 아바마마.”

왕자에게 모든 것이란 국본(國本), 다시 말해 세자가 되는 길을 말함이다.

선조에겐 아직 정실의 후사가 없다. 장자인 임해군이 있다지만 그 또한 서자, 광해가 국본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는 셈이다.

하나 지금의 말로 인해 자칫 광해는 그 길이 막힐 수도 있음이었다.

아니 더 나아가 일이 잘못되어 그 책임을 지고 유배가 되거나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왕실에서의 약조는 칼이나 독처럼 위험한 것이었다.

그것을 선조가 거론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를 모두 알고나 하는 말이더냐?”

미소가 완전히 사라진 선조의 음성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왕자도 신하, 어찌 군왕이신 전하 앞에서 허언을 하겠나이까.”

그 답에 선조는 아무 말 없이 광해를 한참동안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혼아.”

“예, 아바마마.”

“처음에 내가 한 말대로 그저 네 이야기를 듣고자 시작된 일이니 여기서 멈추면 그저 어린 아들과 아비가 주고받은 사담(私談)이 될 것이다. 하나······.”

그 부분에서 잠시 말을 중단한 채 광해를 살피던 선조는 여전히 담담하기만 한 자신의 어린 아들을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이것을 내가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허(許)하게 되면 이는 공(公)이 되고, 정사(政事)가 된다. 그것이 갖는 커다란 차이를 아느냐?”

“소자, 잘 아옵니다. 아바마마.”

“네 답이 너무나 쉽다 생각되기에 다시 물음이다. 네가 어리다하나 일국의 왕자, 왕자의 말엔 허언(虛言)이 없음이다. 아느냐?”

“아옵니다.”

“후일 지금의 네 나이가 겨우 일곱이었다 주장해도 피해갈 구실이 되지 못함도 아느냐?”

“그 또한 아옵니다.”

여전히 작은 흔들림조차 없는 광해의 모습에 선조의 입가에 사라졌던 미소가 다시 어렸다.

“내 일찍이 네가 총명하다는 것은 알았으나 이리 담이 크고, 정치적 식견까지 갖추었는지는 몰랐었구나.”

“과찬에 불민한 소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교만치 않는 네 겸양이 어여쁘구나. 오냐, 하면 네 결심이 그러하니 내 네 계획을 허하도록 하마. 단!”

뒤에 붙은 사족에 긴장하는 광해에게 선조의 말이 던져졌다.

“나는 네게 오늘 들은 말이 없다. 무슨 뜻인 줄 알겠더냐?”

“그것이 바로 소자가 바라는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되었다. 물러가거라.”

선조의 명에 깊게 엎드려 절을 한 광해가 물러갔다.

그렇게 홀로 남아 말이 없던 선조가 잠시 후, 밖을 향해 말했다.

“게 상선 있느냐?”

“예, 전하.”

문 밖에 서 들려온 답에 선조가 말을 이었다.

“너는 즉시 도승지를 들라하여라.”

“예, 전하.”

해가 진지 꽤 지난 시간이다.

궐에 머무는 대신들은 모두 퇴청한 시간이라는 의미다.

그런 시간에 왕이 도승지를 찾은 까닭일까.

답하는 상선의 음성에 긴장감이 서려있었다.

***

늦은 저녁 선조의 부름을 받았던 도승지는 깊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금부도사를 찾았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잠자리에 들어도 부족하지 않을 시간에 자신을 찾아온 도승지를 금부도사가 놀란 표정으로 맞았다.

그런 그에게 도승지가 말했다.

“주상 전하의 밀명(密命)이요.”

도승지의 그 한마디에 금부도사의 거체가 무너져 바닥에 엎드렸다.

그런 그에게 도승지의 말이 이어졌다.

“주상께서 경에게 광해군의 주위를 살피라 명하시었소.”

“주위라 하심은...?”

“혹 광해군을 등에 업으려는 자들이 있는지 살펴 가려내 주상께 고하라는 명이시오.”

생각지 못한 내용 때문이었는지 금부도사의 고개가 들렸다.

“설마 광해군 주변에 역모의 무리라도 모여드는 것입니까?”

“주상의 성심을 어찌 알겠소만··· 누르고 찢기 위함은 아닌 듯하시었소.”

그 말이 뜻하는 바는······.

선의(善意).

그것은 광해군이 혹 나쁜 무리에게 흔들리지는 않을지 걱정한다는 의미다.

세자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지금의 상황에서 임금이 그런 것 까지 걱정해주는 왕자라면······.

눈이 커진 금부도사의 고개가 급히 숙여졌다.

“명을 충실히 이행하겠습니다.”

이날의 오해가 또 하나의 인연을 광해에게 연결시켜 주었음을 선조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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