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1화 (1/325)

1화. 첫 발을 떼다

스물넷의 내 인생은······.

죽어라 알바를 뛰어도 손에 백만 원 쥐기가 힘든.

멋진 차에, 예쁜 여자 친구와 놀러 다니는 또래들을 보면 한없이 부러운.

그저 그렇게 평범했다.

오늘도 밤새 편의점 알바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른 아침 버스엔 사람이 많다.

이들도 자신처럼 힘든 세상을 살아내고 있겠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고단함이 고스란히 담긴 얼굴들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눈을 감고 버스의 움직임에 몸을 맞춘다.

그런 버스에서 내리는 몸은 천근만근이다.

그래서였을까? 발을 디딘 땅이 한없이 꺼진다.

마치 어릴 적 느닷없이 벼랑에서 떨어지는 꿈처럼.

<오전 9시 뉴스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오늘 아침 시내버스에서 내리던 승객이 갑자기 보도가 무너지며 생긴 싱크 홀에 빠져 숨지는 사고가······.>

내 이름은 동철, 성은 김.

24살로 막 제대해서 복학을 앞에 둔 평범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오늘부로 난 달리 불리기 시작했다.

혼, 또는 광해로······.

1화. 첫발을 떼다.

이이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군(君)께선 하면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겝니까?”

“군사력을 늘려야겠지요.”

“얼마나 말씀이십니까?”

물어오는 이이의 음성에 기대가 높다.

있는 머리, 없는 머리 다 굴려가며 이이를 자신의 방에 불러들인 이유가 바로 지금의 물음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답은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적어도 십만은 되어야 하겠지요.”

“십만··· 정녕 그리 생각하십니까?”

“너무 과하다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먼저 여쭙지요. 군께서는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여진의 무리는 장정(壯丁) 모두가 군병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이들이라지요. 그런 이들의 수가 수십만이라면서요. 그런 이들을 상대해야 하는데 사실 십만도 많은 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뜻은 알겠으나 그만한 군병을 유지할 정도의 재화를 이 나라, 조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재화란 필요로 할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대사헌의 생각은 다르신 모양입니다.”

“필요로 할 때 생기는 것이라······.”

“필요치 않으면 구태여 어려움을 이겨내고 구하려 들지 않으니 모일 일이 없겠지요.”

그 말에 묘한 눈길로 바라보던 이이가 물었다.

“군께선 올해 춘추가 어찌 되십니까?”

“흐음······.”

사실 근래 들어 이 물음을 가장 싫어한다.

하지만 아쉬운 건 자신이니 물으면 답을 할 수 밖에······.

“일···곱, 살이죠.”

“허허, 허허허. 일곱이시라······. 요사이 달리 만나는 이나, 읽으시는 책이 있으십니까?”

“책이야 종학(宗學)에서 배우는 것들만으로도 골머리를 앓고 있으니 별다른 건 없고, 아시겠지만 궁의 후미진 곳에 위치한 이곳까지 굳이 절 찾아올 이도 없지요.”

“하면 지금까지 제게 말씀하신 것들이 모두 군의 생각이시란 말씀이십니까?”

이 물음에 솔직히 좀 찔리긴 했다.

십만양병설은 이년쯤 후 지금 눈앞에 앉아있는 이이가 설파할 것이었고, 경제론은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 르네상스시대 유럽의 누군가가 했다던 이야기였으니까.

그렇다고 그걸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긴 한데··· 왜요, 별로인가요?”

“···놀랍군요. 군의 나이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또 이 조선에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가 있다는 것에 놀랐으며, 그런 이가 궁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 또한 놀랍습니다.”

“놀랍기만 한 겁니까?”

“실천할 힘이 없는 이상은 허상일 뿐이니까요.”

“좀 전에 한 말과 비슷한 말을 다시 해야겠군요. 힘은 필요로 할 때야 비로소 생기는 것입니다.”

“하면··· 힘을 모으실 생각이십니까?”

“안 된다, 말씀하실 생각이시겠지요.”

“그야 당연히······. 군이 사사로이 붕당(朋黨)을 조성하고 힘을 키우는 것은······.”

“역모이겠지요.”

“아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겝니까?”

“일신(一身)의 위험이 두려워 필요한 것을 외면하는 것은 군자(君子)가 아니니까요.”

“군자라······. 허허, 하면 그것을 피하게 되면 저는 소인배가 되는 것이겠군요.”

“······.”

아무 말 없이 미소 짓는 어린 왕자를 바라보는 이이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아직 세자는 정해지지 않았다.

위로는 장자인 임해군이 있다지만 그도 눈앞의 이 어린 왕자와 마찬가지로 서자(庶子)이다.

아래로는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는 인빈 김 씨의 소생인 신성군이 있지만 그 또한 서자이다.

그러니 이 어린 왕자에게도 기회는 열려있었다.

문제는 이 어린 왕자에게 자신과 가문의 명줄을 걸어도 좋은가 하는 것이었다.

잠시 갈등하던 이이가 물었다.

“만약 소신이 군께 힘을 실어드린다면 무엇부터 하실 생각이십니까?”

“대사헌께서는 제게 힘을 실어주실 수 없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 이이는 선조가 드러내놓고 총애를 보내는 몇 안 되는 신하 중 하나였다.

그런 그에게 힘이 없다하니 의아했던 것이다. 그런 이이에게 광해가 답했다.

“힘은 붓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면 어디에서 나옵니까?”

되묻는 이이의 음성엔 불안감이 서려있었다.

“힘은 무(武)에서 나옵니다.”

이이의 걱정대로 패덕(悖德)한 자에게서나 나올법한 말이 광해에게서 나왔다.

그 실망감을 이이는 감추지 않았다.

“군자를 거론하시더니 실은 패왕(霸王)을 꿈꾸시는 겝니까?”

“그게 나쁩니까?”

“예로부터 선현들이 이르시길 군왕의 으뜸은 성군(聖君)이요. 그 다음은 명군(名君)이고, 그 다음이 우왕(愚王)이며, 가장 나쁜 왕이 패왕(霸王)이라 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왕(우왕)보다 나쁜 것이 패왕이란 뜻이다.

역사적으로 패왕이란 평가를 받는 이들이 힘을 중시하고 문을 천시하는 경향이 많았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하면 제가 묻지요. 성군으로 지금의 조선을 개혁할 수 있겠습니까?”

“그, 그건······.”

“아니면 명군이면 가능하겠습니까?”

“······.”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이이를 바라보며 광해군이 물었다.

“설마 우왕으로써 개혁이 가능하다 말씀하실 리는 없고, 하면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 패왕은 모든 것을 깨부수고 멸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왕재(王才), 더구나 자신의 힘에 취해 주변의 말을 듣지도 살피지도 않기 쉽습니다.”

“지금의 조선은 깨고 멸하여야 할 것이 지천이니 그것은 나쁘지 않군요. 주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그것이 쉬우면 패왕으로 불리면서도 성군으로 우러름을 받는 왕이 왜 없겠습니까?”

“몰랐습니다. 대사헌께서 이전의 예가 없으면 안 되는 일이라 단정하시는 분인지는 말입니다.”

커다래진 눈으로 광해군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이이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일어섰다.

그런 자신에게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광해군에게 이이가 나가려던 몸을 돌려 물었다.

“이리 나가서 임금께 고해바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안 드십니까?”

“그러실 생각이십니까?”

그리 물으면서도 담담하기만 한 광해군의 표정을 확인한 이이는 덧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괜한 말을 했군요. 깊게 생각해보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기다리지요.”

전혀 흔들림이 없어 보이는 어린 왕자를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본 이이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방을 나섰다.

이이가 나가자 광해군의 몸이 널브러졌다.

지나친 긴장이 심각할 정도로 체력을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담담한척 위장하느라 쏟아 부은 정신력도 어마어마해서 머리까지 지끈 거렸다.

“끄응······. 이거 자주할 짓은 못 되겠네.”

푸념으로도 다시 안한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없는, 이제 생고생만 하다가 인조에게 쫓겨나야하는 ‘광해’란 이름을 가진 이가 된 이상 그냥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보름, 아니 한 이십 여일정도였나?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고, 적응도 하지 못했다.

시대도, 세상도 달라졌고, 가족은 물론이고 모든 아는 사람들과도 떨어졌다.

뿐인가, 스물넷 건장한 청년의 몸이 이제 겨우 일곱 살, 어린아이의 몸으로 변했다.

그건 정신력으로 버텨낼 수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은 버티다 못해 목을 메려했었다.

밟고 올라섰던 서탁(書卓)이 넘어가며 떨어져 실패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덕에 살아야할 이유를 찾았다.

넘어지며 머리가 깨져 죽을 뻔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던 말 때문이었다.

<아이씨, 죽을 뻔 했네.>

그때 깨달았다.

죽으려 했지만 사실 죽고 싶지 않았다는 걸.

죽지 않으려면 살아야했다.

물론 그, 산다는 것이 전란통에 죽을 둥 살 둥 바동거리다 간신히 왕의 자리에 올랐다가 쫓겨나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는 건 결단코 아니었다.

그러니 그렇게 살지 않으려면······.

그게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

늦은 밤, 자신을 부른 이이와 마주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은 이항복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면 설마 대감께선 광해군에게 줄을 서실 생각이란 말씀이십니까?”

“줄이라니. 말본새 하고는······.”

“힘을 실어주나 줄을 서나 매 한 가지 아닙니까.”

“자넨 참······.”

“그리고 정작 중요한건 그런 말들이 아니지요. 그러니 다시 여쭙지요. 정녕 대감의 선택은 광해군입니까?”

“광해군이면 안 된다는 듯이 말하는군.”

“안 될 거야 없지만······. 어렵지요. 아시다시피 그는 적통도 아닌데다 장자(長子)도 아니니까요.”

왕위의 계승은 적통장자 계승이 법도이다.

그것은 이이도 잘 알고 있었다.

“하나 적통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장자인 임해군의 왕재 또한 특별할 것이 없으니 광해군에게 기회가 없는 건 아니라고 보네만.”

“그렇긴 합니다만 장자를 뛰어넘자면 결국은 피를 볼 수밖에 없질 않겠습니까?”

“왕세자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사화를 염려하는 게로군.”

“자고로 왕세자의 문제는 그 당사자들 보다는 배후세력의 싸움이 더 큰 법이니까요.”

“하니 나와 자네가 그 배후가 되어 싸움이 일어나지 않게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것이 어느 한쪽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겠습니까?”

“자네도 이전의 예가 없으면 안 되는 일이라 단정하는 사람이었던가?”

이이의 말에 이항복이 물었다.

“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패왕의 폐단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게 광해군이 한 말일세.”

“광해군이 그리 말했단 말입니까?”

“그래, 그랬지. 자네라면 그 말을 듣고 어찌 하겠는가?”

“그야··· 놀라기는 하겠지만 그래봐야 이제 일곱 살 난 아이의 말입니다. 그 깊이를 논하기에는······.”

“나도 아네. 광해군이 일곱 살이라는 것을. 이번일로 혹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싶어 본인에게 확인까지 했으니까.”

“그러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겨우 일곱 살 난 아이의 말 한마디에 우리의 모든 것을 걸기에는······.”

“지금의 조선은 깨고 멸하여야 할 것이 지천이지.”

“그야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던 것이니······.”

“광해군도 그리 말하더군.”

“예?”

“광해군도 그리 말하더란 말일세.”

이이의 말에 이항복의 눈이 커졌다.

조선에서 가장 개혁을 두려워하는 것이 사림(士林)으로 대변되는 사대부(士大夫)들이고, 그 다음이 왕족이다.

개혁은 결국 권력의 정점에 선 이들에게서 권한과 이익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림과 왕족이 개혁이란 말에 바르르 떨 수밖에.

한데 왕족, 그것도 왕위 계승권에 근접해 있는 광해군이 개혁을, 그것도 과격할 만큼 파격적인 개혁을 이야기 하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이항복에게 이이가 물었다.

“내 다시 묻겠네. 자네라면 어찌 하겠는가?”

말도 안 된다던 이전과는 달리 이항복은 섣불리 답하지 못했다.

그런 그의 표정엔 분명 갈등의 빛이 진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런 이항복에게 이이가 말을 이었다.

“일곱 살, 너무 어리지. 하나 그만큼 많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더군.”

“미래를 보자는 말씀이십니까?”

“우리가 원하는 걸 당장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으니까. 어쩌면 멀리 보고 하나둘 차근차근 만들어가는 것이 더 나을 지도 모르지.”

“차근차근이라······. 이미 결론을 내리신 겁니까?”

“아니었다면 자넬 불러 이리 설득하고 있진 않겠지.”

이이의 말에 이항복의 표정에 어려 있던 갈등이 훨씬 깊어졌다.

그렇게 이이의 사가에 갈등의 어둠이 깊게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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