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그날
굿 카페의 신당 안.
유달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명품백을 한쪽으로 치우며 한아름과 통화했다.
-어쩐 일이세요? 사장님.
"오랜만이네? 아니, 동방 호텔에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리 오랜만은 아닌가? 어쨌든, 지금 어디야?"
-방금 교회에서 나와서 호텔로 이동하는 중이에요.
또 어떤 교회가 불타오르고 있을 것이다.
유달은 부탁하는 처지라서 그녀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말은 삼갔다.
"수고가 많구나, 우리 아름이, 밥은 먹고 다니고?"
한아름은 약간 뜸을 들이고 말했다.
-혹시 저한테 부탁할 거라도 있으세요?
"우리 아름이가 굉장히 날카로워졌구나. 내가 웬만하면 아쉬운 소리 안 하는데, 지금 상황이 상당히 심각하다."
-부탁이 뭔지 말씀해 보세요. 저의 일을 방해하는 게 아니고, 사장님이 정말로 곤란한 경우라면 도와드려야지요.
한아름은 최대한 수용해 주겠다는 반응이다.
이에 유달은 간곡함이 느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기 말이다, 아름이 너의 능력에서 아기나 어린애들을 제외하면 안 되겠니? 그 애들이 너한테 해코지할 일은 없잖아."
순간, 한아름의 목소리가 냉담해졌다.
-방금 하신 말씀은 선을 넘는 거 아닌가요. 혹시 국가 기관에서 사장님께 그런 부탁을 해 달라고 사정하던가요?
"무슨 소리야? 나는 관공서가 싫어서 동사무소도 안 가는 거 너도 잘 알았잖아? 내가 정말 곤란해서 그런다고. 이러다가 우리 굿 카페가 탁아소 되겠단 말이다."
-그런 또 무슨 소리예요?
"너도 알다시피, 너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 곳은 지구상에서 여기밖에는 없잖니……."
유달은 어떻게 굿 카페가 어린아이들로 북적이게 되었는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얼마나 정신이 없는지 몰라. 그렇다고 매정하게 내쫓을 수도 없잖아? 직원들이 편히 쉴 시간도 없고, 매니저 사무실은 수유실로 바꿨다고. 그러다 결국 대형 사고가 터지고 말았어."
-어떤 사고인데요?
"말썽꾸러기 꼬마 녀석이 신당의 장식장을 와장창 박살 냈어. 그것도 제일 비싼 명품들이 있는 것으로 말이다. 내가 눈이 뒤집히겠니, 안 뒤집히겠니?"
-정말이에요?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왜 하겠냐? 바로 들통나는 거 뻔히 알고 있는데. 지금 내 눈앞에는 떨어지면서 흠집 난 명품들이 애처롭게 놓여 있다고… 돈이 얼마나 들지 몰라서 수선 맡기기도 겁나. 아니, 매우 희귀한 명품이라 땜빵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크읍!"
한아름은 이내 위로하는 음성으로 바뀌었다.
-진짜인가 보네요.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사장님의 아픔이 전해지는 것 같아요. 그러면 초등학생 밑으로는 안전을 보장한다고 선포할게요.
유달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했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아름아, 조금만 더 선심 써라. 영유아 빠져나가면 초딩들이 카페를 채울 거란 말이다. 활동력 갑으로 무장한 초딩들이 날뛰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그보다 더한 공포가 있을까? 나는 벌써 식은땀이 나는 것 같단 말이야."
-그럼, 사장님은 어느 정도의 범위를 원해요?
"글쎄다… 나야 최대한 넓힐수록 좋은데, 그러면 선 넘는 것이고. 너와 내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적정선이 어디일까나……."
어느 정도의 나이대를 제시해야 할지, 유달이 열심히 머리 굴릴 때다.
쩌어엉!
지진이라도 난 듯한 굉음이 울렸다.
유달의 몸신이 경고를 보내는 것인데, 여태껏 이렇게 요란한 울림은 없었다.
"뭐, 뭐야? 진짜 지진이라도 났나?"
-왜 그래요, 사장님?
"내 몸신의 감정이 매우 격해진 것 같아. 이리도 큰 울림은 나도 처음이야."
-아끼던 명품에 흠집 나서 뒤늦게 화내는 거 아니에요? 가장 비싼 거라고 했잖아요?
"아니야, 그랬다면 장식장에서 떨어지는 아이가 아니라 명품부터 구했겠지. 이건 분노의 감정을 넘어선 것 같은데… 어쨌든, 하던 협상이나 마무리하자고. 깔끔하게 만 20세 이하 어때?"
-절대 안 돼요.
한아름은 단호한 반응을 보였다.
"좋아, 그렇다면 고등학교 3학년까지. 수능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음 편히 공부해야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시네요? 저는 초등학생까지만 생각했는데요?
"에이~ 그건 너무하다. 고등학교 2학년까지로 하자?"
-초등학교요.
"야~? 너는 왜 그렇게 요지부동이니?"
유달이 한아름과 치열한 협상을 벌이고 있을 때다.
장미란이 신당 안으로 들어왔다.
"유달 씨?"
유달은 휴대폰을 손으로 가리며 대꾸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협상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장미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유달은 계속 통화를 이어갔다.
"아름아, 내가 보너스 3만 원도 특별히 넣어 줬잖아. 네가 통 크게 양보해서 중학교까지 안 되겠니? 콜?"
한아름이 대답을 기다리던 유달이 기분 좋게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정말 콜? 고~맙다, 아름아! 그래그래, 피곤하더라도 호텔에 들어가서 방송 좀 해 줘. 부탁해~"
유달은 성공적으로 협상을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우하하하, 중3까지는 건들지 않겠다는 승낙을 받아냈지요. 그런데 무슨 일이지요?"
"유달 씨를 찾는 손님이 왔어요."
"누군데요?"
"나가 보면 알아요."
"그러죠, 뭐."
유달은 장미란을 따라 신당에서 나왔다.
곧이어 그는 홀 전체를 둘러봤는데, 손님이라고 여길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제 손님은 어디 있습니까?"
"지금 사장실에 계세요. 가게는 제가 볼 테니까, 편안히 이야기 나누세요."
"알겠습니다. 보름이에게 신당 청소 확실히 하라고 전해 주십시오."
유달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사장실 앞에 멈춰 섰다.
"대체 얼마나 서프라이즈한 손님이기에……."
장미란은 분명, 찾아온 손님이 누군지 일부러 말해 주지 않은 게 확실했다.
"만복이는 확실히 아니고, 켄달 옹? 아니야. 영적인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데… 에이, 아무나면 어때!"
촤악.
유달은 힘차게 입구 커튼을 열어젖혔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여인이 앉아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
유달은 직감적으로 몸이 굳었다.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유달은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곧이어 그는 머리가 땅에 닿을 듯 허리 굽혀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 * *
극도로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굿 카페의 사장실.
오주아의 어머니 최미영.
그녀는 딸의 장례식 이후 유달과의 만남이 처음이다.
탁자 위의 커피는 입도 대지 않은 상태로 식었다.
둘은 경쟁이라도 하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달은 대역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최미영은 온갖 복잡한 감정이 느껴지는 시선으로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흐음……."
코로 내뱉는 최미영의 한숨 소리에 유달의 고개가 더욱더 밑으로 숙어졌다.
길게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그들은 악몽 같은 지난날의 일이 떠올랐다.
오주아의 납치·살인 사건이 있기 하루 전.
쾅쾅쾅쾅쾅.
유달은 오주아의 집 파란 대문을 연신 두드렸다.
거실 창문으로 이를 지켜보던 최미영이 문을 열어 주러 나가려는 걸 오주아가 만류했다.
-엄마, 열어 주지 마. 절대로!
-너도 어지간히 해라. 동네 시끄러워 죽겠다고? 달이가 미안하다고 만날 찾아오잖아? 이쯤 고집부렸으면 됐어. 달이가 사과하면 못 이기는 척 받아들여.
-싫어, 나는 달이 사과 안 받을 거야. 절대로!
-얘는 누굴 닮아서 이리 황소고집인지 모르겠네?
쾅쾅쾅쾅쾅…….
유달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오주아가 싫다고 하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매일 찾아와서 문을 두드렸다.
"아이고, 이러다 대문 부서지겠네."
최미영이 참지 못하고 나가려고 하자, 오주아가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엄마! 절대 열어 주지 말라니까?"
"시끄러워."
최미영은 딸을 떨쳐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놀이터처럼 넓은 마당을 지나서, 유달이 연신 두드려 대는 대문을 열어 주었다.
철컹.
끼익…….
유달이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주아 어머니. 매일 찾아와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그래, 너도 고생이 참 많다. 주아가 절대 사과 안 받겠다는데 어떡하니?
-괜찮습니다. 주아가 당연히 오해할 만한 짓을 제가 했습니다. 주아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사과하고 또 사과하겠습니다.
-달이는 언제 봐도 믿음직하네? 의젓하고, 어른스럽고, 인내심도 대단하고. 우리 주아도 본받아야 하는데.
어릴 적 유달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침착하고 어른스럽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고, 박만복이 말 많고 까불거리는 성격이었다. 지금의 둘을 바꿔 놓은 모습이었다.
유달이 최미영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주아하고 화해할 수 있게 어머니께서 도와주십시오.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
-내일 학교 끝나고 우리 아지트에 꼭 와 달라고 전달해 주세요. 주아의 화가 풀릴 만한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어떤 이벤트?
-춤도 준비했고요, 정 안 되면 노래도 해 보려고 합니다. 장구, 북, 꽹과리도 칠 줄 알고요, 칼춤이나 차력도 할 수 있습니다.
최미영은 즐겁게 놀라는 반응이다.
-우와~ 달이는 정말 대단하네. 주아를 위해서 그런 걸 다 준비한 거야?
-저는 주아의 화가 풀린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주아를 많이 좋아하나 봅니다.
최미영은 흐드러진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호호, 그래그래… 이 아줌마가 도와줄 테니까, 내일 꼭 주아 마음 풀어 주고 화해해야 한다. 알았지?
-네, 감사합니다. 주아 어머니.
유달은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최미영의 강력한 설득에도 오주아는 절대 안 가겠다며 짜증을 냈다.
-싫어! 내가 거길 왜 가? 혼자서 기다리든지 말든지, 나는 집에서 한 발짝도 안 나갈 거야. 절대로!
-그러지 말고, 엄마 말 들어. 달이가 너를 위해 이벤트도 준비했다고 하더라. 노래하고 춤, 장구, 북, 꽹과리에 차력도 준비했다고 하던데?
-차력?
오주아는 솔깃 하는 반응을 보이는가 싶었는데,
-그래도 싫어!
이내 그녀는 고개를 외면했다.
최미영은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을 썼다.
-너, 오늘 달이하고 화해 안 하면… 용돈 없다.
-엄마!
오주아는 펄쩍 뛰었지만, 최미영의 태도는 강경했다.
-선택해. 오늘 달이 만나서 화해할지, 평생 용돈 없이 학교 다닐지… 그렇게 좋아하는 떡볶이도 이제 못 먹겠네?
-엄마는 진짜!
오주아에 소파에서 일어나긴 했는데, 현관문이 아닌, 자기 방으로 향했다.
쾅.
최미영은 거칠게 닫힌 딸의 방문에 대고 소리쳤다.
-너 진짜로 안 갈 거야?
-옷은 입고 가야지!
순간, 최미영의 얼굴엔 엷은 미소가 번졌다.
잠시 후.
그토록 가기 싫다고 난리 쳤던 오주아는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최미영은 딸을 대문 앞까지 배웅했다.
-조심해서 갔다 와. 그리고 이걸로 달이하고 맛있는 거 사 먹어.
그녀는 딸의 외투 주머니에 돈을 넣어주었다.
얼마인가 살짝 확인하는 오주아의 눈이 번쩍였다.
그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큰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오주아는 토라진 표정으로 집을 나갔다.
-엄마, 미워!
그것이 살아 있는 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여전히 침묵이 감도는 굿 카페의 사장실.
천정을 바라보는 최미영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고,
"아이고……."
억장이 무너지는 한숨 소리에, 유달은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주먹을 힘껏 쥐었다.
유달이 약속을 못 지킨 것은 신병 때문이었다.
갑작스럽게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녀의 시체가 발견된 날에 의식을 차릴 수 있었다.
조금순은 유달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하늘이 신병을 내렸다고 했지만,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 똑같이, 오주아와 함께 죽는 게 나았다는 생각이다.
용기를 내어 장례식장까지 갔지만, 최미영과 오현아의 원만스러운 눈빛에 조용히 발길을 돌려야 했었다.
"달아……."
오랜 침묵을 깨고, 마침내 최미영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