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시한부 선고
"앗 뜨거!"
숨 막히는 열기 속.
활활 타오르는 영적인 기운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유달이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어리석구나, 박만복! 이런 잔기술이 나한테 통할 것 같냐? 네놈 때문에 떨어진 지옥의 불길 속에서도 살아남은 나다. 이따위 수준은 나한텐 어린애 장난에 불과하단 말이다. 앗 뜨거~ 씨!"
유달은 아무 대꾸가 없어도 계속 소리쳤다.
"어디 숨었냐! 박만복. 죄를 지었으면 곱게 찌그러져 있을 것이지, 여기서 난리 치는 이유가 뭐야? 오늘 네놈은 절대 무사히 못 돌아간다."
정면을 향해 비스듬히 검을 잡은 유달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천천히 한 발짝.
또 천천히 한 발짝…….
검을 단단히 쥐고, 자신의 오감을 최대한 끌어올려 박만복을 찾는 그때.
스윽.
누군가 움직이는 기척이 포착되었다.
"거기더냐!"
사악!
유달은 지체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전광석화 같은 공격이었지만 검끝의 느낌이 허전했다.
아무것도 베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제법이네, 박만복… 그동안 운동 열심히 했나 봐? 요리조리 쥐새끼처럼 잘도 빠져나가네? 그런다고 내가 못 잡을 것 같아? 지옥에서 살아남으려면 오감의 능력을 극강으로 만들어야 했다고."
그때 느껴지는 뒤쪽의 움직임.
사악!
유달의 재빨리 검을 휘둘렀는데, 역시나 빗나갔다.
"어우, 새끼… 진짜 빨라졌네? 곱게 모가지를 바치지 않고, 끝까지 나를 열 받게 하는구나!"
사악, 사악, 사악~.
유달은 미세하게 움직이는 기척을 놓치지 않고, 연신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모두가 헛손질.
귀신처럼 공격을 피해 내는 상대가 외려 유달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는데,
"!"
기민하게 움직이던 상대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순간, 유달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이제야 독 안에 든 처지를 파악했나? 여기는 내 단골 편의점이야. 눈으로 볼 수 없어도 구조가 훤하다고. 너는 지금 음료 냉장고와 계산대 사이 구석에 몰렸어. 양쪽이 막혀 있어 내 검을 피할 수 없고, 가만히 있으면 내 검에 일도양단 되는 거지. 어떤 경우에도 네놈은 살아날 수 없다는 소리야."
유달이 정색하며 검을 뻗었다.
척.
"유언은 필요 없지? 있어도 안 받아 줘. 지옥불에 떨어져서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느껴 봐."
마침내 유달이 최후의 일격을 가할 때다.
구석으로 몰아넣은 상대의 음성이 들려왔는데, 박만복이 아닌 여자 목소리다.
"왜 내 일을 방해하는 거지? 내가 박만복을 죽이면 너한테도 좋은 거잖아?"
어디서 들어 본 익숙한 음성이었다.
"문신녀?"
자칼 구출 작전 때, 공터에서 대결을 펼쳤던 제시카의 목소리였다.
"여기서 네가 왜 등장하는 거야? 어디서 공부했기에 갑자기 능숙해진 거고? 아니 그보다, 만복이는 어딨지?"
"거의 목숨 끊어지기 직전이지."
"네 실력으로?"
제시카는 유달이 겁주는 것도 감당 못 하고 줄행랑을 쳤었다. 그런 능력으로 박만복을 죽음 직전까지 몰았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담담하게 대답하는 제시카의 음성이 들렸다.
"주교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결과야. 지옥의 마신을 능가하는 힘을 얻게 되었지."
"뻥 치시네! 이 세상 저 세상 통틀어 그런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과연 그럴까? 마지막으로 경고하지. 내 일을 방해하지 말고 여기서 떠나. 그러면 목숨을 건지고 간절히 바랐던 복수까지 이루게 되는 거야."
"켄달 옹이 무슨 짓을 했기에 겁대가리가 없어졌을까? 내가 그런 헛소리에… 우악!"
대수로이 여기지 않던 유달이 크게 놀랐다.
화르르!
절로 비명이 튀어나올 정도의 위력적인 화염이 쏟아진 것이다.
"이것이 준비도 안 했는데, 선빵 날려!"
사악.
유달은 재빨리 검을 휘둘러 막았지만, 형편없이 뒤로 밀려났다.
이는 유달에게 충격적이며 치욕스러운 일이다.
모든 영험함을 타고난 그가 신기에서 밀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자자자~!"
젖먹던 힘까지 끌어 올려 대항하자 밀려나는 게 멈추기는 했는데,
"허얼!"
사방에서 성벽 같은 불길이 솟아났고, 이는 곧 거대한 해일이 되어 유달을 덮쳤다.
"대무당의 적손이 이렇게 당할 성싶으냐! 지옥에서 마스터한 기술을 보여 주마!"
유달은 보폭을 넓게 가지며 큰 동작으로 검을 휘둘렀다.
화아악!
사납게 덮쳐 오던 불길은 바람에 연기 날리듯 검의 궤적을 따라 순식간에 밀려났다.
화아악! 화아악~!
유달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고, 거대한 해일 같은 강력한 불길은 유달의 주변을 돌며 역류할 뿐,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너, 사람 잘못 건드렸어!"
이내 유달은 검을 앞쪽으로 고쳐잡고 제시카를 향해 달려들었다.
역류하던 불길이 다시 사방에서 덮쳐 왔지만, 유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먼저 제시카를 베면 끝난다는 생각이다.
"만복이의 목숨은 내 거란 말이다!"
유달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양손으로 쥔 검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탕~!
묵직하게 울리는 쇳소리와 함께 유달을 향해 덮쳐 오던 맹렬한 불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곧이어 시야를 방해했던 영적인 기운도 눈 녹듯 사라지면서 엉망이 된 편의점의 모습이 드러났다.
유달의 검은 벽을 쳤을 뿐, 제시카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도망쳤지?"
그녀를 찾는 것보다 더 급한 게 있다.
"만복이는 어디……!"
편의점 내부를 두리번거리던 유달의 눈이 커졌다.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대가 있던 곳.
상품 진열대는 모두 날아가 벽에 부딪혀 쌓여 있고, 넘어진 진열대 위에 피 토하고 쓰러져 있는 박만복의 모습이 보였다.
뚜벅뚜벅.
유달은 검을 늘어트리고 다가갔다.
그러고는 박만복의 목에 검 끝을 겨누며 말했다.
"꼴 좋구나… 왜 내 구역에서 같은 편끼리 싸우며 난리를 치냐. 어쨌든 뒈질 각오는 되어 있지?"
박만복이 힘겨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물론… 얼른 나를 죽이고 시연이를 살려 줘……."
"참으로 뻔뻔한 놈이네? 미안하다는 사과는 없이, 부탁을 해 버리네?"
"너한테는 죽어도 미안하다는 말 안 해… 어서 날 죽이고, 시연이를… 시, 시연이를……."
풀썩.
박만복은 숨이 끊어진 듯 의식을 잃어버렸다.
이에 유달은 기뻐하기는커녕 매우 당황하는 반응을 보였다.
"안 돼, 이 자식아! 너는 이렇게 곱게 죽을 수 없어! 내 손에 뒈져야 한다고. 구급차~!"
* * *
쌀쌀한 날씨의 토요일 오후.
장미란은 낡은 상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덜컹, 덜컹.
동시에 차량 문이 열리고, 장미란과 유달은 상가 입구를 향해 걸었다.
유달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물었다.
"여기에 범인이 있는 게 확실합니까?"
그들은 최수진의 동생을 치어 사망케 한 뺑소니범을 찾고 있었다.
장미란은 휴대폰을 확인하며 대답했다.
"용의자는 배창수. 전과 7범이고요, 여기 진심 상가 4층에 있는 흥신소 직원이라고 하네요."
"너무 날로 먹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우리가 수사에 착수하자마자 목격자가 등장했으니 말입니다."
"저도 놀랐어요. 20년도 넘은 일인데, 번호판까지 정확기 기억해 낼 줄은 말이에요."
"그런데 그 목격자는 왜 이제야 나타난 겁니까? 10년만 일찍 나타났으면 좋았을 텐데요."
배창수가 범인이 맞는다고 해도 공소시효가 지나서 처벌하지 못했다.
"예전 그는 사고 현장에 있었지만, 만취 상태였다고 해요. 무슨 차가 뺑소니를 내고 지나갔는지도 몰라서 목격자로 나서지도 않았다네요. 그러다가 며칠 전 꿈을 꿨는데, 사고가 났던 상황과 뺑소니 차량의 번호까지 보여서 경찰에 연락했다고 하고요."
"영화보다 더 현실감 떨어지는 얘긴데요?"
"어쨌든 최수진 PD나 우리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죠. 이렇게 운이 절묘하게 따라 주다니 말이에요."
"저는 일이 너무 잘 풀려서 무서운 생각까지 듭니다. 갑자기 화장실에서 개과천선한 윤소담의 경우도 그렇고요. 하늘이 내게 얼마나 큰 시련을 주려고 이렇게 밑밥 까나 하는 불안감 말이지요."
"설마 하늘이 그렇게 쪼잔하겠어요."
유달과 장미란이 어두침침한 상가 입구로 들어섰다.
철거 대상이 아닌 게 신기할 정도로 낡은 건물이었다.
유달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 저으며 말했다.
"역시나 없네요."
"뭐가요?"
"엘리베이터 말입니다. 4층까지 걸어서 올라가야 합니다. 이런 건물은 계단도 길어요."
장미란이 먼저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며 말했다.
"운동 되고 좋지 않나요. 한동안 잠잠하더니 귀차니즘이 또 도진 거예요?"
유달이 바로 따라 오르며 대답했다.
"시간을 최대한 아끼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오늘이 아름이의 방송 출연 날 아닙니까?"
"걱정하지 마요. 늦어도 7시 안에는 카페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월드컵을 방불케 하는 응원전을 카페에서 펼칠 예정인데, 행여 늦어서 보름이 삐치면 저는 감당 못 합니다."
"그래도 참 다행이지요?"
"뜬금없이 뭐가요?"
"편의점에서 난리가 났던 거요. 그날 비슷한 시간에 아름이도 편의점에 있었다는데, 싸움에 휘말려서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요."
유달은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우하하하하, 제 선견지명이 발동된 겁니다. 갑자기 해물 라면 먹고 싶어진 게 정말 다행이지요. 해물 라면이 떨어져서 큰길 마트로 사러 갔기에 멀쩡했던 거지요."
장미란이 계단 오르는 속도를 늦추며 물었다.
"병원에 안 가 봐도 되겠어요?"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아무 데도 다친 곳이 없습니다."
"박만복이 실려 간 병원이요.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크게 다쳤다고 하던데요."
"제가 그 새끼 문병을 왜 갑니까? 그날 죽이지 않을 걸 지금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습니다. 백시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구급차를 부른 겁니다."
유달은 몹시 기분이 상한 듯 장미란을 지나쳐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 * *
서울 시내 종합 병원 특실.
환자복을 입은 박만복은 점심 식사로 나온 음식을 깨끗하게 다 먹어치웠다.
백시연이 대견한 듯 그는 쳐다보며 말했다.
"잘 먹네? 입맛이 까다로워서 걱정했는데."
"입맛에 맞아서 먹는 거 아니거든. 잘 먹어야 빨리 회복하고, 이 지긋지긋한 병실에서도 나갈 것 아니야."
"서둘러 퇴원해서 뭐 하려고?"
"최고의 사주 카페를 뽑는 이벤트는 아직 안 끝났어. 내가 퇴원해서 신경 쓰면 바로 역전할 수 있을 거야."
백시연은 절레절레 고개 저었다.
"이야~ 정말 대단하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유달 사장을 이길 생각뿐이야?"
드르륵.
병실 문이 열리고, 담당 의사가 들어왔다.
그는 깨끗이 비워진 식판을 확인하고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검사 결과가 아주 좋게 나왔습니다. 이렇게 빠른 회복을 보이는 경우는 처음입니다."
박만복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퇴원할 수 있습니까?"
"추가 검사를 해야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지만, 사오 일 내에는 퇴원해도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이삼일 내로 퇴원하고 싶습니다. 그 일정에 맞게 검사를 진행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흔쾌히 대답했던 담당 의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백시연 씨가 있었던 병실의 꽃을 치워도 되겠습니까? 이미 장례도 끝났고 병실도 부족한……!"
담당 의사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박만복이 살벌한 눈빛으로 노려봤기 때문이다.
"아, 아닙니다. 병실의 꽃은 그냥 두라고 하겠습니다. 엄청난 금액을 기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이만……."
담당 의사는 오금 저리는 표정으로 병실이 나갔다.
곧이어 백시연이 애틋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네 잘못 아니야. 영혼이 된 나를 붙잡아 두고 있다니, 그것까지 유달 사장을 따라 하는 거야?"
"지옥은 너 혼자 갈 데가 아니야. 내가 함께 가 줄 거니까, 기다려."
"내가 살아 있을 때 잘하지… 죽어서 들으니까 별로 설레지 않는다."
"그러게… 왜 그랬을까."
아쉬움의 미소를 짓는 그에게 백시연이 말했다.
"언제까지 네 곁에 있어야 하지? 나는 점차 악령으로 변해 갈 거고, 이를 막으려면 네 신기의 소모가 너무 크다고. 너는 유달 사장이 아니잖아? 감당 못 할 때가 되면 그냥 놔줘."
박만복은 병실 창문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럴 일은 없어. 조만간 나도 너와 같은 신세가 될 거니까."
"왜? 시한부 선고라도 받은 거야?"
"인류 전체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거지. 켄달 회장은 최악의 대마신을 불러냈어. 오늘부터 세상이 뒤집힐 거야. 인류 멸망의 시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