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대단한 우정
한아름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남의 목숨으로 사는 늙은이가 기억력이 좋네?"
"저년이 감히!"
발끈하는 제시카를 켄달이 만류했다.
그는 자신의 회전의자에 거만히 앉아 있는 한아름에게 물었다.
"내 경호원들을 쓰러트린 게 너냐?"
한아름은 능숙한 영어로 대답했다.
"응, 잠시 방 안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말을 듣지 않더라고?"
"그때도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기는 했지. 하지만 내 경호원들은 어린 여자 혼자서 쓰러트릴 수 있는 실력이 아니야. 사주 카페 사장은 어디 있지?"
"우리 사장님은 바빠. 최고의 사주 카페를 뽑는 이벤트에 참석했거든."
"정말 혼자서 온 것인가?"
"그렇다니까?"
순간, 켄달의 눈빛이 바뀌었다.
"사장 놈과 똑같이 버릇이 없군. 범상치 않은 신기를 가졌다고 까부는 모양인데, 주제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나는 네년이 생각보다 훨씬 더 고귀하고 위험한 존재다."
"아니, 그쪽은 내 예상보다 훨씬 못나고 형편없는 존재야. 그런 실력으로 과연 우리 사장님을 이길 수 있을까?"
"버릇은 없어도, 배포와 능력은 마음에 드는군. 내 밑에서 일하는 건 어떤가? 카페에서 일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금액을 약속하지. 사람은 자신의 능력에 맞는 대우를 받아야 하니까 말이야."
한아름은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주제를 알아야지? 능력에 맞게 대우받아야 한다면, 그쪽은 지금 내 발밑에 무릎 꿇고 있어야 한다고."
"아무래도 버릇부터 고쳐 놔야겠군. 제시카?"
"네, 주교님."
"조용히 말을 듣게 해. 죽이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제시카는 혼자 나섰다.
그녀는 간단히 한아름을 제압하리라 생각했다.
"굿 카페에 있는 것들은 다 마음에 안 들어."
철컥.
잭나이프의 칼날이 튀어나오고, 제시카는 정면으로 뛰어들며 손을 뻗었는데,
"뭐, 뭐지?"
그녀는 이내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제시카가 뻗은 칼날은 한아름의 얼굴 바로 직전에 멈추고 말았다.
이는 그녀의 의지가 아니다.
제시카는 한아름의 얼굴에 상처를 내어 기선을 제압하려 했던 것이었다.
한아름이 손가락 하나를 들며 말했다.
"방송 나가는 하는 얼굴에 흠집 내면 안 돼. 얼굴에 상처 내고 싶으면 네 얼굴에 해."
스윽…….
한아름의 손길을 따라 제시카의 손도 움직였다.
제시카는 칼날의 방향을 바꾸어 자신의 얼굴을 긋기 시작했다.
"으아악!"
그녀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도 계속 자신의 얼굴에 난도질해 댔다.
"제시카를 구해!"
나머지 켄달의 수행원들이 한꺼번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회전의자에 앉아 있던 한아름은 눈빛 한 번으로 그들을 모두 제압했다.
"뭐, 뭐야!"
한아름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를 공격하려는 상태 그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곧이어 그녀가 파리를 쫓듯 가볍게 손짓하는 순간,
우두두두두둑.
켄달 수행원들의 목이 기형적으로 돌아가며 한꺼번에 쓰러졌다.
마침내 한아름이 회전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자신이 벌인 짓을 보며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놀라는 것이 아니라 장난 섞인 반응이었다.
"어머나, 실수했네? 목 돌리는 건 사장님이 제일 싫어하는 건데."
켄달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너, 너는 누구냐?"
"그걸 모르는 게… 바로 너의 죄야."
곧이어,
퍼퍼퍼퍼펑~!
거대한 폭발음이 발생하며 스위트룸 전체가 강력한 불길에 휩싸였다.
* * *
점심시간 무렵 굿 카페.
딸랑딸랑.
호텔 행사에 참석했던 유달과 장미란이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서빙하던 송보름이 물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식사를 생략하고 왔다고 해도, 너무 이른 시간 아니에요?"
장미란이 대답했다.
"행사가 엉망이 돼서 빨리 끝났어."
"왜요?"
장미란은 유달을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어떤 잘나신 분이 그렇게 만들었지. 그냥 악수만 했을 뿐인데, 태풍 같은 바람이 불어서 행사장이 완전 난리가 났다고. 급하게 중요한 사항만 전달하고 끝내야 했어."
"어떤 상황이었을지 짐작이 가네요. 저는 칼부림 안 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사장님의 참을성은 기대할 바가 못 된다고요."
"나도 오늘 절실히 깨달았어. 옷 갈아입고 나올게."
장미란이 사무실로 향했다.
멋쩍은 반응을 보이던 유달이 표정을 바꾸며 송보름에게 말했다.
"너는 이 시간에 왜 여기 있는 거야? 지금 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야 할 텐데."
유달은 혹시 늦을 것에 대비하여 신소미를 불렀다.
그녀는 손님 테이블에 앉아서 점을 보고 있었다.
송보름이 앞치마에 손을 넣으며 대답했다.
"오늘 학원 빠졌어요."
"왜? 또 공부가 하기 싫어서 땡땡이친 거야?"
"그게 아니라요. 오늘 방송국에 갔거든요."
"네가 방송국에 갈 일이 뭐가 있어?"
"저 말고 아름이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본선 진출자 모임이 있었거든요."
유달은 참으로 눈물겹다는 반응이다.
"정말 대단한 우정이네. 아름이 방송국 간다고 너까지 학원을 빠져? 이러라고 너를 학원에 보내는 줄 알아!"
"저는 매니저 자격으로 따라간 거예요. 아름이 성공할 때까지 제가 뒷바라지하기로 했어요. 예상했던 것보다 간단히 끝나더라고요."
"참…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겠다. 그런데 왜 너만 돌아온 거야?"
"아름이는 어디 들렀다가 온다고 했어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래요. 그런데 왜 자꾸 그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건데요?"
송보름은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어봤고, 유달은 시치미를 떼고 반문했다.
"내가 뭐?"
"나를 계속 불쌍하고 아련하게 바라보잖아요?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아름이 얘기만 나오면 꼭 그런 표정이었다고요."
‘날카로운 것!’ 속으로 놀라는 그에게 송보름이 계속 추궁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뭐가 못마땅하고, 뭐가 걱정인데요?"
"그럴 리가… 너의 일방적인 착각이겠지."
"제가 사장님을 몰라요? 분명 뭔가 거슬리는 게 있다고요. 정말 사실대로 말 안 할 거예요? 그럼 저 삐쳐요?"
"!"
그는 크게 동요했다.
송보름이 작정하고 삐치면 정말 대책 없기 때문이다.
유달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너 말이다……."
"네, 사장님."
"아름이가 아이돌로 성공하면, 지금처럼 계속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그럼요.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약속했어요."
유달은 더욱 안쓰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른으로서 내 생각은 달라. 아름이가 바빠지면 너랑 만날 시간도 없을 거야. 우정도 사랑하고 별반 다르지 않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거라고."
"우리 우정은 그러지 않아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하지만 현실은 냉혹한 거야. 아름이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된다고. 나는 네가 아름이 나오는 TV만 쳐다보며 한숨짓는 꼴은 보기 싫다."
"절대 그럴 일은 없다니까요?"
"그렇다면, 내가 너를 아련하게 쳐다봐도 뭐라고 하지 마. 걱정하는 마음까지 어찌할 수는 없으니까."
"알았어요. 그렇게 해요."
유달은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기는 때다.
덜컹.
사무실에 들어갔던 장미란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유달에게 물었다.
"이모님은 분명 강원도로 돌아가셨지요?"
"맞습니다. 이제 더는 야곱 빵집에 가르칠 게 없다면서 집으로 가셨지요. 왜요?"
"동방 호텔에 안 계신 거 정말 확실하지요?"
"그렇다니까요?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장미란은 안심이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좀 전에 경찰서에서 연락받았거든요. 동방 호텔에서 어떤 사고 같은 게 있었나 봐요. 스위트룸 층에서 큰 소란이 벌어졌고, 의료진까지 출동했다고 하네요."
"언제요?"
"대략 40분 전이요."
"아주 다행스럽게도 이모님은 집에 푹 쉬고 계십니다. 어제도 통화했지요. 그런데 경찰이 왜 그런 걸 미란 씨에게 보고할까요?"
유달은 집히는 게 있었다.
"켄달 옹 때문입니까?"
"맞아요. 순찰하다가 특이한 점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했어요.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인물이잖아요."
"그 소란이 켄달 옹이 있는 스위트룸에서 벌어졌으며 얼마나 좋겠습니까? 켄달 옹 무리가 한꺼번에 사고를 당해서, 당분간 만복이와의 사주 카페 대결에 집중할 수 있게 말입니다."
유달이 진심으로 바라며 말하는 때다.
딸랑딸랑.
카페 문이 열리며, 한아름이 들어왔다.
순간, 송보름이 달려들어 그녀를 꼭 안았다.
한아름은 영문을 몰라서 당혹스러운 표정이다.
"왜, 왜 그래? 갑자기……."
"너는 아이돌 스타 됐다고 변하면 안 돼. 아무리 스케줄 바빠도 나하고 자주 만날 거지? 굿 카페도 찾아오고."
"당연하지! 우리 그렇게 약속했잖아?"
한아름의 대답을 들은 한아름은 으쓱한 표정으로 유달을 돌아보았다.
유달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한아름이 그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응, 방송국 들렀다며?"
"네, 그냥 실물만 확인하는 자리라 금방 끝났어요."
"후회하지 않게 열심히 해. 내가 최대한 편의를 봐 줄 테니까. 상금 받으면 반드시 한턱 쏘고, 수상 소감 말할 때 굿 카페를 은근슬쩍 언급하여 홍보하는 거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사장님."
한아름인 환한 미소지으며 대답하는 때다.
장미란이 굿 카페의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잠시 일손 멈추고, 여기로 모여 봐."
그녀는 유달이 망쳐 버린 행사에 참석하여 들었던 내용을 전달했다.
"여러분도 최고의 사주 카페를 뽑는 이벤트를 알고 있을 거예요. 다음 주부터 한 달간 진행되니까, 각자 맡은 바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한아름이 유달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사장님의 소원은 이루어졌어요.’
"무슨 소원?"
‘아까 사장님이 진심으로 바라는 거요.’
"정말!"
유달이 기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장미란이 설명하는 도중에 사장실로 달려갔다.
그는 한아름에게 신기가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는 선무당일 때 더욱 잘 맞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유달은 무척이나 실망한 기색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하나도 맞지 않은 로또를 한아름에게 내밀었다.
"꽝이잖아……."
* * *
동방 호텔, 스위트룸이 있는 층.
띵동.
박만복은 백시연과 함께 승강기에서 내렸다.
그들은 비상사태가 발생했다는 연락을 받고 다급히 도착한 것이다.
승강기에서 내리자마자 보통 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경호원들의 숫자가 엄청 늘었다.
스위트룸이 있는 층 전체에 경호원들이 깔려 있는데, 그들은 총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박만복이 잰걸음으로 복도를 걸으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나도 모르지. 너와 있을 때 연락받았잖아."
스위트룸 앞에 멈춰 서자, 경호원들이 바로 문을 열어 주었다.
지체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깜짝 놀랐다.
"뭐야? 대체……."
호텔 숙소가 전쟁터의 야전 병원처럼 변했다.
통제 불가능으로 알려진 제시카의 무리가 급조한 침대 위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 상태가 위중하여 의료진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벽면 곳곳에 그을음의 흔적도 보였다.
박만복이 살짝 만져 봤는데,
매캐한 냄새는 없고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진짜 불이 난 것이 아닌, 영기에 의한 흔적이 분명했다.
의료진 한 명이 다가와 말했다.
"켄달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박만복과 백시연이 그를 따라가니, 호텔 침대에 조용히 누워 있는 켄달이 보였다.
다행히 그는 다른 사람들 비해 멀쩡한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