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하루살이
유달이 다급히 물었다.
"아름아, 지금 어디야?"
-소속사 사무실이요.
다행히 긴박한 위기 상황은 아닌 모양이다.
유달은 침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준 쿠폰은 언제라도 사용 가능해. 어떤 상황이건 너의 편이 되어 도울 거고. 그런데 어떤 일 때문에 쓰려는지 물어도 될까?"
-소속사에서 위약금을 내래요.
"위약금? 뜬금없이?"
한아름은 분하고 억울한 심정을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속사 허락 없이 서바이벌 오디션에 참가했다고요.
이는 유달도 아는 얘기다.
"거기에 참가하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했다며? 그리고 2차 오디션까지 통과한 상태잖아?"
-분명 그때 저를 담당하신 최 실장님이 그랬거든요. 참가는 해도 상관없지만, 회사의 지원을 없을 거라고요. 만약 제가 본선에 진출하면 위에다 지원을 말해 보겠다고 했었다고요. 그런데 갑자기 오늘 법률팀장이란 사람이 계약 위반했으니, 무조건 위약금을 내라고…….
한아름은 여러 감정이 뒤섞여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최 실장이란 사람은 뭐래?"
-최 실장님은 사표 내셨대요.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하는데요. 제가 연습생 동기한테 물어봤더니, 회사의 부당한 처사를 따지다가 다쳐서 입원하신 거래요. 지금 중환자실에 계시다고 해요.
"뭐 그런 연예 기획사가 다 있어? 연습생에게 갑자기 위약금 청구하고, 이를 따지는 실장은 병원 신세 지게 만들었다고? 아름이, 네가 계약한 곳이 김&장 엔터테인먼트라고 했나?"
국내 최고의 로펌과 이름이 비슷해서 정확히 기억했다.
-원래는 연예계 지망생들이 선망하던 곳이었어요. 그런데 새로운 사장님이 들어오고 나서 난리도 아니에요. 기존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잘리고요. 저 말도고 많은 연습생들이 돈을 뜯기고 있대요.
유달은 짜증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그래서 위약금을 얼마나 달라는 거야?"
한아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삼… 억이요.
"뭐라~? 삼억! 이것들이 벼룩의 간을 내먹으려 하나. 거기 어디야? 내가 당장 달려갈게."
-용산역 근처예요. 정확한 주소는 문자로 보내 드릴게요.
"알았어. 내가 갈 때까지 못 준다고 하고 버텨."
한아름은 안도하는 음성으로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사장님. 위약금을 못 내면 새로운 계약서에 사인해야 한다고 하는데요. 이상한 내용이 담겨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아는 변호사도 없고요. 사장님은 한국대 법대 출신에 사법 고시도 붙으셨다고…….
"알았어. 내가 갈 때까지 어떤 승낙의 표현도 하지 말고, 어떤 문서에도 절대 사인하지 마. 최대한 서둘러 갈게."
유달은 전화를 끊고, 밖으로 나가려 했는데,
"맞다. 선글라스!"
시퍼렇게 멍든 눈으로 가는 건 모양새가 떨어진다.
"비싸게 주고 산 게 있는데……."
유달은 다시 서랍을 뒤졌지만, 원하는 선글라스를 찾을 수 없었다.
"미치겠네. 왜 이거밖에 없는 거야?"
그의 손에는 하트 모양의 선글라스가 들려 있다.
아주 예전 놀이공원 갔을 때 송보름이 사 준 것이다.
"애들 장난감도 아니고……."
제정신으론 절대 쓰고 싶지 않았지만, 서둘러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다.
촤아악.
하트 모양의 선글라스를 낀 유달이 힘차게 커튼을 열어젖히며 나왔다.
주방에 있던 강성호가 물었다.
"또 어디 가십니까? 그런… 선글라스까지 끼시고요."
"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겼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미란 씨에게 기다리지 말라고 해."
"알겠습니다. 사장님."
유달은 곧장 출입문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문을 열었다.
"미친 새끼들… 삼억~!"
딸랑딸랑.
* * *
날이 어두워지는 도로.
용산역으로 향하는 택시 안.
유달은 호박 엔터테인먼트의 박상진과 통화했다.
-결국엔 최악의 사태가 되었군요. 제가 민망해서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입니다.
"김&장의 새로운 사장은 누굽니까?"
-나상만이란 사람인데, 저도 얼굴을 본 적은 없습니다. 돈 많은 사업가라고 하는데요. 실상은 아주 난폭한 조폭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조폭이요?"
-그냥 조폭이 아니고, 경찰도 손을 못 대는 아주 난폭한 조폭이요.
"알겠습니다. 정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상진이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번에는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제가 김&장 엔터의 두 사장님을 잘 아는데, 사업 수완이 뛰어나고 정관계의 인맥도 넓습니다. 그런데도 나상만이 김&장 엔터를 통째로 집어삼켰다면 보통 놈이 아닐 겁니다.
"그런 걱정은 마시고요. 제가 아름이를 빼내 오면 박 대표님이 잘 맡아서 키워 주십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쪽과의 계약 관계만 청산하시면 제가 아름이를 거두겠습니다.
"식사 중에 전화 드려 죄송합니다. 맛있게 드시고, 푹 주무십시오."
통화를 마친 유달은 굉장히 찝찝한 표정이다.
"아주 난폭한 조폭이란 말이지……."
조폭에도 급이 있다.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정보가 더 필요했다.
"누구에게 물어보는 게 좋을까나."
잠시 고민하던 유달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의 선택은 굿 카페의 건물주이자, 지하 세계에 정통한 명동의 송 사장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보름이 아버님. 잘 지내고 계십니까?"
-저야 늘 그렇지요. 무슨 일로 전화를 주셨습니까?
"지금 식사 중은 아니시지요?"
-저는 저녁 식사 끝냈습니다. 편하게 물어보십시오.
유달이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나상만이라고 아십니까? 아주 난폭한 조폭이라고 들었습니다."
-아… 나상만이요.
분명 알고 있다는 반응이다.
"대체 어떤 놈입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주 잔인한 놈입니다.
표현의 수위가 더욱 강해졌다.
유달은 골치 아프게 됐다는 표정으로 송 사장의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험하다는 이쪽 바닥에서도 혀를 내두르는 놈입니다. 폭력 조직을 넘어 광신도 집단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광신도요?"
-나상만의 추종 세력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놈들입니다. 나상만을 주인님이라 부르며, 그의 명령이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지요. 이쪽 바닥에서는 그들을 ‘하루살이파’라고 부릅니다.
"하루살이요? 폭력 조직치고는 매우 연약한 느낌의 이름인데요?"
-숨겨진 뜻은 전혀 다릅니다. 그놈들은 정말 오늘만 사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폭력적이고 잔인하며, 어떤 뒷감당이 있을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리 충고드리자면, 하루살이파의 타깃이 될 일은 하지 마십시오.
"송 사장님의 진심 어린 충고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의 충고대로 따를 마음은 전혀 없었다.
"혹시 모르니, 보름이는 일찍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라고 하겠습니다."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나상만과 저는 암묵적인 경계를 지키고 있어서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편히 쉬십시오."
통화를 마친 유달은 택시 뒷자리 깊숙이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천장을 바라보며 기구한 팔자를 원망하듯 중얼거렸다.
"오늘은 왜 자꾸 이런 놈들만 걸리지."
한국대에서 봤던 윤소담은 매우 독종이었다.
그리고 지금 만나러 가는 나상만은 송 사장도 경계하는 지극히 위험한 인물이다.
"나… 벌 받는 건가?"
하지만 이내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고는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천천히 서행하던 택시가 멈췄다.
"도착했습니다, 손님."
"감사합니다."
유달은 교통카드로 택시비를 계산하고 내렸다.
김&장 엔터테인먼트 사무실을 바로 뒤에 있는 7층짜리 빌딩에 있다.
김&장이 한창 잘나갔을 때 지은 건물인데, 지금은 나상만의 하루살이파가 점거한 상태다.
유달은 하트 모양의 선글라스를 바로 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저기요, 아저씨!"
다급한 음성으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 돌려 보니, 한아름 또래의 젊은 애들이 건물 옆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유달이 그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나 불렀어?"
야구 모자를 깊이 눌러 쓴 여자가 대답했다.
"네, 아저씨는 무슨 일로 여기 오신 거예요?"
유달은 사실대로 말했다.
"내가 아는 애가 여기 연습생인데, 갑자기 위약금을 내라고 해서 해결하러 왔지."
유달의 대답을 듣자마자, 그들은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거봐, 내가 맞잖아? 변호사 아저씨라고."
"저런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변호사가 어디 있어?"
"검은 양복 입은 모습이 딱 변호사잖아?"
"안에 있는 조폭들도 검은 양복 입었다고?"
유달은 그들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마냥 지켜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저기, 무슨 일로 날 부른 거지?"
야구모자를 눌러 쓴 여자가 대답했다.
"변호사 아저씨도 조심하라고요."
"뭘 조심해?"
"저희는 여기 연습생들인데요. 회사가 완전히 미쳤어요. 소속된 연예인들이게 위약금 남발하고 이상한 계약을 강요한대요."
검정 후드 모자를 쓴 남자가 말을 받았다.
"저희도 아는 사람 모조리 동원해서 맞서고 있거든요. 그런데 기자들은 들어가자마자 쫓겨나고, 변호사들은 수임 안 받겠다며 벌벌 떨면서 도망쳐요."
야구모자를 쓴 여자가 목청을 높였다.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없다고요. 안에 들어갔다가 몇 마디 물어보곤 바로 나온다니까요. 그런데 변호사 아저씨는 누구 때문에 온 거예요?"
"한아름이라고……."
"아~ 아름이요. 이 회사가 완전 못된 게, 아름이처럼 힘없는 애들은 더욱 집요하게 괴롭히는 거 같아요. 변호사 아저씨도 조심해야 해요. 방심하고 들어갔다는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고요."
유달은 안심하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무사히 아름이를 데리고 나올 테니까, 여기서 조용히 기다려. 알았지?"
유달이 다시 건물 입구로 향했다.
덜컹.
그는 망설임 없이 유리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 있는 연습생들 말대로 검은 양복을 입은 조폭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일시에 하던 일을 멈추며 유달을 노려봤다.
* * *
삭막한 분위기의 건물 로비.
뚜벅뚜벅.
유달은 하루살이파의 살벌한 눈빛을 신경 쓰지 않고 당당히 걸었다.
여직원이 앉아 있는 안내 데스크.
유달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여기 연습생인 한아름을 만나러 왔습니다. 법무팀장이 위약금을 들먹이며 이상한 계약을 강요한다고 해서요."
"……."
데스크 여직원은 아무 말 없이 눈치만 살필 뿐이다.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사내가 다가와, 데스크에 삐딱하니 팔을 걸치며 말했다.
"어이? 그런 애는 없으니 돌아가지?"
유달이 웃음 띤 얼굴로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너는 뭐야?"
칼자국 사내는 의외라는 반응이다.
"오호, 초면에 말이 짧으시네?"
"너부터 말이 짧았잖아… 이 조폭 새끼야. 네놈들이 누군지 이미 알고 왔거든. 진짜 하루살이 인생으로 만들어 줄까?"
"기백이 좋으시네? 검사 출신인 모양이야?"
"나는 분명 여기에 아름이가 있는 걸 확인하고 왔는데, 네놈들은 없다고 우기고 있어. 그렇다면 미성년자 감금이 확실하지. 경찰 필요 없이 바로 검찰이 출동하게 해 주지."
유달이 핸드폰을 꺼내 들자, 칼자국 사내의 태도가 달라졌다.
"하하하, 노여움을 푸시지요. 농담 한번 해 본 겁니다. 변호사님이 찾는 분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유달은 칼자국 사내를 따라 계단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를 바라보는 데스크 여직원은 매우 안타깝고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유달은 지하층으로 의심 없이 내려갔다.
어두침침한 복도를 걷던 칼자국 사내가 우람한 덩치들이 지키는 문 앞에서 멈추며 말했다.
"여기가 계약을 진행하는 회의실입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덜컹.
유달은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계약을 진행하는 회의실은 확실히 아니다.
춤과 노래를 연습하는 안무 연습실인데, 십여 명의 사내들이 각목과 쇠파이프를 들고 앉아 있었다.
뒤따라 들어온 칼자국 사내가 출입문을 등지고 말했다.
"이게 어떤 상황인지 감이 잡히시나?"
유달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그는 안무 연습실 중앙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방음 장치 확실하고, CCTV도 없고, 아무리 난리 쳐도 누가 들어올 리 없으니… 아주 좋네?"
이어 그는 각목과 쇠파이프를 들고 있는 사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 피똥 싼 적 없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