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작렬
잔뜩 흥분하여 독이 오른 윤소담의 눈에 장미란의 모습이 들어왔다.
"내 이럴 줄 알았어… 그 사건이 있었을 때, 유일하게 당신만 내 말을 믿지 않았지."
장미란이 무덤덤한 얼굴로 인사했다.
"오래만이야? 한국대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더니, 드디어 꿈을 이뤘네. 늦었지만 축하해."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거 불법 아닌가요?"
"너는 이제 미성년자가 아니잖아? 나도 더는 경찰이 아니고. 내가 너한테 그 사건에 관해 묻기라도 했었나? 대체 어떤 부분이 불법이라는 거지?"
"……."
"그리고 갑자기 초청장 보낸 건 너잖아? 초청장은 찾아와 달라는 정중한 부탁 아닌가? 다음부터는 광수대 쪽으로 보내지 말았으면 좋겠어. 바쁜 예전 동료들에게 전해 받는 거 미안하니까."
유달이 기다렸다는 듯 끼어들었다.
"너는 잠자는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려 버렸어. 원래 이번 사건은 미란 씨의 우선순위가 아니었어. 그런데 네가 보낸 초청장을 보고 마음이 바뀐 것 같단 말이지. 무슨 배짱으로 그랬을까?"
"당신은 뭔데 저 여자 편에 서서 날 괴롭히는 거죠?"
"저 여자?"
유달은 너무도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이어 그는 사납게 표정으로 변하며 말을 이었다.
"너 건방짐이 선을 넘었다? 아줌마뻘 되는 사람에게 대놓고 저 여자라니? 미란 씨가 혼기만 놓치지 않았어도 중학교 다니는 딸이 있었을 거다. 아무리 싸가지가 없어도 정도가 있어야지. 내가 이 자리에서 그 버르장머리를 고쳐 줄까? 엉!"
장미란이 나직한 음성으로 만류했다.
"유달 씨, 그만두는 게 좋겠어요."
"왜요? 저는 이런 후배 도저히 용납 못 합니다. 아, 그리고 아줌마라 한 거 사죄드립니다. 욱해서 튀어나온 말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런 얘들은 초장에 기선을 제압해야 합니다."
"그건 윤소담이 바라는 일일 것 같은데요? 예전에 그녀는 머리가 좋고 사람을 속이는 데 능숙한 학생이었어요. 지금은 더 노련해지고, 대담해진 것 같네요. 유달 씨가 이렇게 계속 윽박지르는 모습을 보이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
그러고 보니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윤소담은 안쓰러움을 자아내는 세상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고, 주위의 학생들은 혹시 유달이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며 쳐다봤다.
"독한 년……."
유달이 물러나고 장미란이 전면에 나섰다.
그와 동시에 연민을 자아내는 연기를 했던 윤소담의 표정도 변했다.
"장 팀장님에게는 여전히 통하지 않네요?"
"진심이 아니니까 통하지 않는 거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말이야."
"나한테 뭘 바라는 거예요?"
"바라는 거… 없어."
"네?"
그녀는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장미란을 바라봤다.
이에 장미란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때는 너한테 부탁하고 사정하는 게 최선이었지. 하지만 선생님이 목숨을 끊은 최악의 상황이 되었는데, 너한테 뭘 바라고 기대하겠어? 진실은 내가 밝힐 테니, 너는 끝까지 아니라고 우겨. 그게 너의 형량을 늘리는 일이니까."
윤소담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장 팀장님 맘대로 될까요? 이제는 채영이가 증언한다고 해도 늦었어요. 사건 자체가 공소권 없음으로 마무리되었다고요."
"나도 더는 법에 기대 안 해. 너 스스로 벌을 받겠다고 애원하면 모를까……."
이어 장미란은 그녀의 뒤로 숨은 유달을 불렀다.
"유달 씨?"
"네, 미란 씨. 말씀하십시오."
"사면초가 작전은 계속 진행 중이지요?"
"물론입니다. 지금은 대화 중이라 잠시 중단한 상태지요. 하지만 제가 이렇게 손가락만 튕기면……."
딱.
유달이 바로 시범을 보이는 때다.
그녀만 들을 수 있는 비방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어머~ 진짜 뻔뻔한 년이다. 저년의 주둥이라는 확 찢어 버릴까?"
"나는 가증스러운 저년의 눈깔을 확 뽑아 버리고 싶어."
귀를 막아도 소용없고, 표현의 수위도 점점 거칠어졌다.
윤소담이 유달을 향해 소리쳤다.
"멈춰! 제발 멈추라고!"
유달은 장미란의 등 뒤에서 대답했다.
"노노노노노… 그럴 수는 없지. 임준원 선생님은 아무 잘못도 없이 세상의 모든 욕이란 욕은 다 들어야 했는데, 너는 네가 한 짓 때문에 비난받는 것도 못 참는 거야?"
장미란이 유달에게 물었다.
"사면초가는 학교에서만 들리게 되나요?"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제가 사방팔방 이미 소문을 쫙 내 놨습니다. 학교나 집, 공연장, 윤소담이 어디를 가든 평생 함께할 겁니다. 이제 편히 밤잠 자기는 글렀다고 봐야죠."
"만약 윤소담이 잘못을 뉘우치고 진실을 밝히면요? 사면초가는 바로 멈추게 되나요?"
"영혼들은 이승의 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저승의 규율은 아주 간단하고 효과적이지요.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합니다. 윤소담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달이 한층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누굽니까? 인정 많기로 소문난 무당 아니겠습니까? 만약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죄한다면, 너그럽게 멈추게 할 마음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유달은 선심을 베풀겠다는 의도를 보였지만, 윤소담이 그를 바라보는 눈빛은 더욱 사나워졌다.
이에 유달도 눈에 바싹 힘주며 쏘아보았다.
"뭐가 그리 억울해서 노려봐?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당신, 우리 아빠가 가만둘 것 같아."
"오우~ 아빠 찬스. 난 그 소리가 왜 안 나오나 했어? 그쪽 아버지가 유명한 대형 병원의 병원장이시라고? 그런데 말이야… 귀신들이 네 욕을 한다는 말을 믿을까?"
"!"
"뭐, 좋은 점이 있기는 하겠어. 의료계의 인맥이 넓으니, 매우 시설 좋은 정신 병원으로 보내기는 하겠네."
"당신 내가 부숴 버릴 거야!"
"누가 말려? 능력 되면 그렇게 하든가."
딱, 딱.
유달이 손가락을 두 번 연속 튕겼다.
장미란은 어떤 일이 벌어지나 했는데,
"으악!"
갑자기 윤소담은 귀를 막으며 괴로워했다.
그녀를 비방하는 영혼들의 소리가 느닷없이 커진 것이다.
"더 까불고 싶으면, 말만 해."
유달이 손가락을 튕기는 자세를 취하는 순간,
화악.
윤소담은 재빨리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유달이 중얼거렸다.
"진짜 독하네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벌써 살려 달라고 애원했을 텐데 말입니다."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죠?"
"물론입니다. 아무리 독하다고 해도, 삼사 일 내에는 우릴 찾아올 겁니다. 그 이상이 되면 우리가 정신 병원으로 찾아가야겠지요."
이어 유달이 한층 밝아진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 기분 전환 좀 할까요?"
"어떻게요?"
"저랑 농구 한판 어떻습니까? 당연히 어드밴티지는 드리겠습니다."
"저 농구 잘해요. 중학교 때는 학교 선수로도 뛰었고요. 하지만 오늘은 제 차림이 이래서 안 되겠네요."
장미란은 정장 치마에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에 앉아서 제가 골을 넣으면 박수만 치십시오."
"그렇게 꼭 억지로 박수를 받아야겠어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제가 예전에 저기서 농구 하면 난리가 났습니다. 환상적인 덩크를 연이어 작렬시켰거든요."
장미란은 허풍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달 씨의 점프력과 운동 신경을 생각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기대하십시오. 잠시 후면, 진심으로 우러나는 박수를 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실 겁니다."
유달은 곧바로 농구장을 향해 뛰어갔다.
"어이, 문화체육부 장관?"
농구공에 맞아 안경이 깨진 남학생이 되물었다.
"저, 저요?"
"그래, 너 말이야. 공 좀 빌려줄 수 있어?"
"네… 쓰세요."
미래의 문화체육부 장관은 흔쾌히 자신의 공을 던져 주었다. 그는 얼굴에 피까지 나서 공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팅팅팅팅팅.
유달은 가볍게 드리블하며 몸을 풀었다.
검은 양복에 구두를 신고 있었지만,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몸풀기를 끝낸 그는 장미란이 있는 쪽을 향해 번쩍 손을 들어 보였다.
박수를 칠 준비가 됐냐는 의미다.
"유달 씨, 파이팅!"
장미란이 화답하여 소리치는 순간,
팅팅팅팅팅…….
유달이 민첩한 움직임으로 농구공을 드리블하며 골대를 향해 달려갔다.
부우웅~.
그는 자유투 라인에서 점프를 했다.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서 새처럼 날아가는 모습은 주변 학생들의 탄성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씨익.
유달의 얼굴엔 예견했다는 미소가 번지고,
오른손으로 잡은 농구공을 둥근 림을 향해 힘차게 내리꽂았다.
실패의 기억은 없다.
언제나 성공하여 박수갈채의 주인공이 되었었다.
하지만 너무 오랜만에 공을 잡았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 문제였다.
팅!
유달의 손에서 벗어난 농구공이 림 앞부분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냥 실패면 조금 창피한 것으로 끝인데,
하필이면 튕겨 나온 공이 유달에 안면에 작렬했다.
푸악~!
"켁!"
유달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농구장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유달 씨!"
장미란은 깜짝 놀라 황급히 뛰어갔다.
* * *
딸랑딸랑.
장미란과 유달이 굿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주방에 있던 강성호가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사장님."
"응, 그래……."
유달은 강성호의 시선을 외면하며 대답했다.
평소라면 특별한 일은 없었는지, 매상은 어떤지 등등을 물어왔는 것인데,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강성호가 주방에서 나와 물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무슨 일은…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지……."
강성호는 시선을 계속 회피하는 유달의 얼굴이 뭔가 이상함을 발견했다.
"누, 눈이 왜 그렇습니까?"
"차 안에서 잤더니 조금 부은 모양이네."
절대 아니다. 오른쪽 눈 주위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사, 사장님, 누구한테 맞았습니까?"
그 소리를 들은 송보름이 놀란 표정으로 뛰어왔다.
"사장님, 한국대 갔다가 맞았어요?"
"아니라고! 내가 맞긴 누구한테 맞아? 농구공에 부딪힌 거뿐이라고."
장미란이 그의 주장을 확인해 주었다.
"기세 좋게 덩크 한다고 하다가 이 모양이 된 거야. 그러니까 다들 자리로 돌아가."
유달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제 인생에서 이렇게 창피한 적은 없을 겁니다. 혹시나 동영상 찍은 사람은 없었죠?"
"그럴 시간도 없이 땅바닥으로 떨어졌죠.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저는 낙법이 생활화되어 괜찮습니다. 그런데 아름이는 어디 있지요? 아직 연습하러 갈 시간 아닌데."
유달이 송보름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름이는 어디 갔니?"
"오늘 기획사 들른다고 해서 일찍 퇴근했어요."
"그래?"
이어 유달이 장미란에게 말했다.
"저는 눈에 멍 좀 가라앉히고, 선글라스를 찾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좋겠네요."
심하게 멍든 얼굴로 사주·관상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르르.
유달은 사장실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 선글라스를 어디에 뒀더라……."
온갖 잡동사니가 수북한 서랍을 뒤질 때다.
딩딩딩딩딩.
휴대폰이 울리는데, 처음 보는 발신 번호가 떴다.
"누구지?"
잠시 고민하던 유달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땅 사라는 등의 쓸데없는 전화면 바로 끊을 기세다.
"여보세요?"
-사장님…….
기운 없는 전화 목소리는 낯이 익었다.
"아름이니?"
-네…….
"왜 그렇게 목소리에 힘이 없어?"
한아름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사장님, 저번에 말씀하신 거요. 어떤 상황이든 무조건 저를 도와주겠다는 쿠폰이요. 지금 써도 돼요?
"!"
유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마신의 현신인 그녀에게 큰일이 생긴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