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수상한 졸업생
유달이 옆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일단은 앉지요. 정확한 사건 개요가 무엇인지, 선생님과 미란 씨에게 물어보고 싶군요."
그가 먼저 예약석 푯말을 치우고 털썩 앉았다.
뒤이어 장미란과 임준원이 유달 맞은편에 자리했다.
유달이 장미란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사건은 언제 있었던 일입니까?"
"정확히 4년 전이에요."
"4년이요?"
유달은 임준원에게 시선을 옮겼다.
"지금 상태가 상당히 괜찮습니다. 선령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원한을 떨치기 힘들었던 모양이군요."
-제 억울함을 반드시 풀고 싶습니다. 저 하나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제 가족들의 삶도 모두 망가져 버렸습니다.
유달은 계속 옆머리를 긁어 댔다.
"어떤 사정일지 짐작이 갑니다……."
그도 진실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 주고 싶은데,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미란 씨, 이런 사건은 대부분 거꾸로 아닙니까? 추행당한 여학생이 괴로워하고, 엿 같은 선생은 뻔뻔하게 학교에 계속 나오고, 학교 측은 조직적으로 은폐하려고 하지요. 그런데 어째서 이번에는 반대입니까?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고요."
"나쁜 게 맞아요. 그게 우리나라 학원 성폭력 범죄의 전형적인 특징이니까요. 그리고 진실의 은폐는 힘을 가진 쪽에서 하는 거예요. 윤소담의 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대형 병원의 원장이에요. 학교 이사장과도 친분이 깊고요."
"아~ 그렇군요. 제가 드라마 마니아라 그런지, 어떤 경우라도 바로 상상이 됩니다."
잠시 머리 굴리던 유달이 물었다.
"번뜩 생각났는데 말이지요. 거짓말 탐지기 검사받았으면 되지 않았습니까? 물론 검사 결과가 재판에서 쓰이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성범죄의 특성이 은밀한 곳에서 진행되지 않습니까? 거짓말 탐지기의 진실 여부가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을 텐데요?"
"윤소담 측에서 먼저 받았어요."
"예? 결과는요?"
"그녀의 진술에는 거짓이 없다고 나왔어요."
"헐… 사이코패스라 거짓말 탐지기를 속여 넘겼나요?"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모든 사이코패스가 거짓말 탐지를 속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거짓말에 능숙해야 가능하죠."
"어쨌든 우리의 상대는 거짓말에 도가 튼 여인이라는 것이군요."
장미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임 선생님도 거짓말 탐지기를 통과했지만 뒷북치기에 지나지 않았죠. 여론이 감당치 못하게 흘러서 선생님과 가족들의 삶은 망가지기 시작했어요."
"반전을 기대할 수 있는 건 목격자의 증언밖에 없었군요. 증언을 거부한다니 스스로 나선 건 아닐 것이고, 어떻게 찾아낸 겁니까?"
"학교 CCTV를 조사했어요. 교실과 복도에는 없는데, 계단과 건물 출입문에는 설치되어 있었죠. 사건은 학생들이 모두 하교한 저녁, 본관 건물 1층 왼편에 있던 음악 실기실에서 발생했어요. 목격자는 2층에 있던 여학생인데, 윤소담과 같은 학년이었죠."
유달은 짐작인 간다는 듯 말했다.
"친한 친구라 증언을 거부한 거군요?"
"아니요, 그녀와 윤소담은 경쟁 관계였어요. 앙숙이라는 표현까지 쓰는 학생들도 있었어요. 외려 담임이었던 임 선생님과 더 가까웠다고 해요."
"하면, 증언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 여학생이 정말 본 게 확실합니까?"
"시간대를 보면 확실해요. 그녀는 사건이 있던 시간에 2층에서 내려왔고. 음악 실기실이 있는 왼편 복도를 지나 본관 건물을 빠져나왔어요. 평소라면 1분이면 지나갈 거리인데, 그때는 10분이 넘게 걸렸고요."
유달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목격자가 확실한데, 무슨 이유로 증언을 하지 않을 걸까요?"
"그 때문에 임 선생님은 더욱 곤란해지셨지요. 학교에서는 그녀가 임 선생님을 위해 입을 다물었다고 여겼어요. 너무 늦은 상황이지만… 지금이라도 진실을 밝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고요."
유달은 부정적인 생각이다.
"그때도 입을 꽉 닫고 버텼는데, 굳이 지금 진실을 말하려 하겠습니까? 게다가 선생님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여 더욱 부담스러운 상황이 되었는데요."
"다른 방법이 없으니 계속 시도해 봐야죠.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도 있잖아요."
"그놈의 감천… 하늘이 얼마나 심술궂은 존재인지 모르시는군요."
이어 유달이 갑자기 생각난 듯 임준원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오신 겁니까? 미란 씨는 영혼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요."
-저는 그동안 채영이의 몸에 붙어 있었습니다.
"채영이요? 그게 누구지요?"
장미란이 대신 대답했다.
"송채영은 목격자의 이름이에요."
임준원이 유달을 보며 말했다.
-저의 억울함을 밝혀 줄 사람은 그 아이밖에 없습니다. 제발 증언을 해 달라고 간절히 소리쳤지만, 제 목소리를 듣지 못하더군요. 오늘도 채영이를 따라 명동에 온 것이고, 뭔가 끌어당기는 기운이 느껴져 여기로 올라왔던 겁니다.
유달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선생님도 참 대단하십니다. 아무 반응도 없는 사람을 4년 동안 간절히 소리치며 쫓아다닌 겁니까?"
이어 그는 장미란에게 시선을 주었다.
"목격자가 이 근처에 있는 모양입니다."
"아직 들어오지 않는 걸 보니, 고민이 많은가 보네요."
"제가 나가서 끌고 들어올까요?"
"아니요, 강제적인 행동은 역효과를 불러올 거예요. 그녀가 자발적으로 올라오길 기다리는 수밖에요."
"저는 기다림에 무척이나 취약한데 말이지요……."
유달이 기지개를 켜듯 양팔을 들어 찌뿌둥한 몸과 마음을 추스를 때다.
딸랑딸랑.
카페 문이 열리고,
20대 초반의 여자가 들어왔다.
유달은 반색하는 장미란과 임준원의 반응을 보고 그녀가 목격자임을 확신했다.
* * *
송채영의 설득을 위해 마련된 자리.
유달은 예약석의 전담 서비스맨을 자청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그는 송채영에게 장미란의 맞은편 자리를 예의 바르게 권하며 물었다.
"음료하고 커피, 어떤 것이 좋으십니까?"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알겠습니다. 편히 앉아서 이야기 나누고 계십시오."
유달이 직접 주방으로 향했다.
바리스타 강성호도 예약석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떤 걸 드릴까요? 사장님."
"마시는 즉시 꼭꼭 감췄던 진실을 술술 불게 만드는 음료 같은 건 없나?"
"예?"
"농담이고… 뜨듯한 커피로 셋."
"알겠습니다."
강성호는 최대한 빨리 커피를 만들어 내놨다.
유달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가 담긴 쟁반을 들고 예약석으로 걸어갔다.
그는 먼저 송채영 앞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날씨가 상당히 쌀쌀해진 것 같습니다. 뜨거우니까 천천히 후후 불면서 드십시오. 이것은 미란 씨 커피고요. 그리고… 이것은 제 거군요."
그는 마지막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자연스럽게 장미란 옆자리에 앉았다.
유달은 그녀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듣기만 했다.
장미란은 차분하면서도 간절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채영 씨, 아직 늦지 않았어요. 임준원 선생님의 억울함을 풀어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녀는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결심이 서서 장미란과의 요청에 응한 게 아니었다.
"제가 여기에 온 것은 한 가지 때문이에요. 더는 그 일 때문에 연락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아무것도 본 것이 없어요."
그녀의 매정한 태도에 임준원의 영혼이 난리를 쳤다.
-채영아, 대체 왜 그러니? 너는 진실을 알고 있잖아? 나는 소담이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자기에게 실기 점수를 낮게 줬다고, 그런 일을 꾸민 거라고! 제발 진실을 말해 줘, 제발!
유달이 울분을 토하는 임준원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소리쳐도 소용없습니다. 채영 씨는 영적인 것에 굉장히 무딘 체질입니다. 미란 씨가 알아서 할 것이니, 그냥 가만히 있으세요. 제가 정신없어 집중을 못 하겠어요.’
장미란은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설득했다.
"채영 씨도 힘들다는 거 잘 알고 있어요. 저한테 말하지 못하는 어떤 사정이 있는 거겠죠. 임준원 선생님과의 정을 생각해서 한 번만 용기를 내 주세요."
"모두 끝난 일이에요. 저는 그때 일을 잊고 조용히 살고 싶어요. 그러니 제발 더는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세요."
순간, 장미란의 태도가 강경하게 변했다.
"아니요, 아직 끝난 건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더 악화하는 상황이에요. 채영 씨 덕분에 무고죄를 면한 윤소담 씨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세요?"
"……."
"채영 씨에게 고마워하고, 돌아가신 임 선생님께 죄책감을 느끼며 자숙하며 살까요? 아니요! 그녀는 정말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인 것처럼 행동해요. 그 정도가 도를 넘어서, 돌아가신 임준원 선생님의 가족들을 찾아가서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짓까지 벌이고 있어요."
송채영이 급히 고개 돌려 외면했다.
그녀도 이미 알고 있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다.
스윽.
장미란이 탁자 위에 하얀 카드 봉투 올려놓았다.
"며칠 전, 윤소담 씨가 저한테 이걸 보냈어요."
송채영은 봉투를 열어서 안에 있는 화려한 모양의 카드를 살폈다.
"!"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
유달은 청첩장인가 했는데, 아니다.
장미란이 착잡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한국대학교 음악대학 졸업 공연 초청장이에요. 원래는 송채영 씨가 들어가 할 곳이었죠. 아쉽게도 송채영 씨는 그 사건 이후 학교의 압력 때문에 자퇴하고 말았지요. 윤소담 씨가 저한테 이걸 보낸 건, 아무리 파헤쳐 봐도 소용없을 거란 자신감의 표현이겠죠."
"……."
"정말 이상하지 않나요? 악의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행복하고 떳떳하게 잘 사는데, 진짜 피해자들은 죄인처럼 숨어 살며, 괴롭힘까지 당하니 말이에요."
부들부들…….
주먹을 꽉 쥐고 분한 모습을 보이던 송채영은 이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그녀는 만류한 사이도 없이 쏜살처럼 카페에서 나갔다.
"헐, 제 몸신이 튀어나올 틈도 주지 않고 떠났군요.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다른 방법이 있나요. 다시 한번 사정해 봐야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노노노노, 저는 하늘을 믿지 않습니다."
이어 그는 윤소담이 보낸 초청장을 집어 들었다.
"오우~ 뻔뻔한 거짓말쟁이가 제 후배가 되었군요. 졸업생인 제가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어떻게 하게요?"
"직접 찾아가 엄하게 타일러야지요. 제가 증오하는 것이 피해자 코스프레입니다. 아마도 제 말은 들을 겁니다."
유달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대한민국 모든 수험생이 선망하는 대학교.
유달은 졸업하고 처음으로 한국대의 교정을 걸었다.
"우리 학교가 돈 많이 벌었나 봅니다. 구질구질했던 건물들이 현대식으로 싹 바뀌었습니다."
함께 걷는 장미란이 말했다.
"이쪽은 음악대학으로 가는 길이 아닌데요?"
"여기 졸업생인 제가 길을 모르겠습니까. 오랜만에 왔으니, 가장 먼저 들러야 하는 곳이 있습니다."
"식당이요?"
"그렇죠. 모든 인연은 식당에서 시작되는 겁니다."
유달과 장미란은 점심시간이 지난 학생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유달의 말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장미란은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윤소담을 발견했다.
식사를 끝내고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정말 윤소담이 식당에 있었네요."
유달은 그녀가 고갯짓하는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비슷하게 생긴 세 명 중 누굽니까? 스타일이 모두 비슷하네요."
"머리가 가장 긴 여자요."
"알겠습니다."
유달은 빈자리에 앉아 접근할 기회를 엿봤다.
곧이어 상대적으로 머리가 짧은 두 여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달은 곧바로 혼자 남은 윤소담에게 다가갔다.
"안녕?"
그는 능글맞은 음성으로 인사하며 앉았다.
당연히 윤소담은 경계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세요?"
"응, 나는 이 학교 졸업생이야. 법학대학 나온 유달이라고 하는데, 몇 학번인지는 까먹었고, 예전에 나 모르면 간첩이란 소리 들었어. 간첩이 뭔지는 알지?"
"네……."
그녀가 마지못해 대꾸하는 때다.
벌떡.
유달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반갑게 인사했다.
"뭐야? 너 아직도 여기 있어? 도대체 학교를 몇 년이나 다니는 거냐?"
윤소담은 누군가 하여 옆을 돌아봤는데,
유달은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이야~ 정말 오랜만이다. 졸업하고 처음이지? 너는 먹다 죽은 귀신도 아닌데, 때깔이 왜 이리 곱니?"
윤소담은 눈살을 찌푸리며 자칭 졸업생을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