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뒤끝
제시카는 미소 띤 얼굴로 유달을 바라보았다.
긴장한 모습을 웃음으로 감추려는 게 아니다.
그녀는 여유롭고 침착했으며 유달과의 맞대결을 기대하는 반응이 분명했다.
곧이어 제시카가 뒤쪽으로 고개 돌려 김정배를 불렀다.
"Mr. 김, 잠시 나와 볼래?"
차 안에 있던 그는 황급히 뛰어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방금 저놈이 했던 말 들었지? 나는 동료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싸우는 거야."
"네… 확실히 들었습니다."
"회장님이 물으시면 꼭 그렇게 말해야 해. 내가 거짓말 시키는 거 아니지?"
"마, 맞습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일이 커진 건 네 잘못인 것도 알지?"
"예?"
"블랙박스 찍지 않고 간수 잘 했다면, 우리가 카페 사장을 쫓아올 이유도 없었고, 테일러도 저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거야. 잘못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안 그래?"
푸욱.
제시카가 김정배의 허벅지를 찔렀다.
표정이 굳어지며 책망하듯 바라보는가 싶더니, 잭나이프로 갑자기 그의 허벅지를 찔렀다.
놀란 눈의 김정배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크윽, 왜… 저를……."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주저앉듯 땅바닥에 쓰러졌다.
유달이 식겁하여 소리쳐다.
"야! 왜 갑자기 팀 킬을 하고 그래?"
제시카는 유달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피가 흐르는 허벅지를 부여잡고 비명을 삼키고 있는 김정배와 눈높이를 맞추며 앉았다.
"너 때문에 테일러가 당한 거야. 블랙박스 간수를 똑바로 했어야지!"
푹, 푹, 푸욱!
그녀는 김정배의 하체를 찌르고 또 찔렀다.
"크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지고, 김정배의 다리에서 치솟는 피가 제시카의 얼굴에도 튀었다.
곧이어 칼질을 멈추며 몸을 일으킨 제시카는 상쾌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이다.
그녀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유달을 보았다.
"네놈의 피도 굉장히 맛있을 것 같은데?"
"진짜… 제대로 미쳤구나?"
"호호호호, 너 아직도 안 보이는 거야?"
"정신 나간 네년 모습은 똑똑히 보이는데……."
제시카는 성큼 한 발짝 다가서며 말했다.
"나는 여왕이야."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지는데……."
"호호호호호, 피에 굶주린 살인귀들이 내 말을 복종하며 따르지. 네 눈에는 이곳에 가득 찬 살인귀들이 모습이 정말 안 보는 거야?"
유달은 무속계의 모든 영험함을 타고났다.
그의 눈에도 땅에서 불쑥 솟아나고, 사방에서 달려들어 모여드는 원귀들이 모습이 보였다.
피를 갈구하는 악귀 같은 몰골에, 그 수는 수십·수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늘어났다.
그러나 유달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다.
"잡귀들 불러 놓고 으스대기는……."
"살인귀를 잡귀라고 부르다니, 예상보다 영적인 능력이 형편없는 놈이었네?"
"수준에 따라 부르는 것도 차이가 있지. 도대체 어떤 구석을 믿고 자신만만하나 했더니… 매우 실망이야. 만복이였다면 하늘과 땅을 가득 메울 지옥의 살인귀들을 불렀을 텐데. 여왕이라고 하면서 너무 수준 낮지 않아?"
"미친놈……."
제시카는 유달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했다.
그녀가 아는 세상에 그런 마신의 능력자는 없다.
가능할지도 모르는 사람이 딱 한 명 떠올랐다.
‘제임스… 쉣, 재수 없는 놈을 떠올렸어!’
그녀에게 제임스와의 대결은 씻을 수 없는 치욕이다.
대결이라 하기도 민망하다.
시작과 동시에 일방적으로 얻어터졌다.
‘그때 그놈의 눈빛은 인간이 아니었어. 지옥에서 걸어 나오는 악마의 눈빛… 지금 생각해도 손이 떨리네.’
제시카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추슬렀다.
그러고는 자신의 주위로 몰려든 살인귀들을 다정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불렀다.
"얘들아?"
순간, 살인귀들은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그들은 조련사에게 길들어진 맹수처럼 제시카의 얼굴과 손짓을 주시했다.
"배고팠지? 내가 너희들에게 먹이를 줄게. 바로 저놈!"
제시카의 손짓을 따라 살인귀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피에 굶주린 살인귀들이 한꺼번에 노려보는 모습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그녀는 바로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갈가리 찢어 버려!"
제시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살인귀들이 앞다투어 유달을 향해 달려들었다.
평소의 유달이라면 식겁하여 도망부터 쳤을 것이다.
하지만 검을 어깨에 걸치고 바라는 그의 표정은 진중하고 여유가 넘쳤다.
"눈깔 깔아라, 이 잡귀들아……."
이내 그는 검을 비스듬히 내려서 잡고, 떼를 지어 몰려드는 악귀들을 향해 다가갔다.
"오늘은 봐주는 거 없다. 걸리면 모조리 소멸이야."
스윽.
유달이 검을 휘두르려 상체를 젖히는 순간,
사납게 몰려오던 살인귀들이 화들짝 놀라며 멈춰 서려 안달이다.
그들은 검을 들고 다가오는 유달에게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호랑이를 만난 들개처럼 오금이 저린 자세로 일제히 뒷걸음쳤다.
제시카는 크게 당황했다.
"왜, 왜, 왜 그러는 거야? 어서 저놈을 찢어발기라고!"
그녀의 명령이 통하지 않았다.
살기등등했던 살인귀들은 패퇴하는 병사들처럼 도망치기 급급했다.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직접 나서야 했다.
"너, 대체 어떤 수작을……!"
잭나이프를 겨누며 유달의 앞을 가로막은 제시카는 대경실색하는 반응이다.
"저, 저 눈빛은!"
치욕스러웠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와 똑같이 공포에 질려서 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고, 몸은 가위에 눌린 듯 무방비 상태의 느낌이다.
"오, 오지 마!"
화악.
그녀는 당황하여 진짜 잭나이프를 던져 버렸다.
획, 획, 획, 획.
몇 번의 헛손질을 거듭하다가 자신의 손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혼자 춤추는 줄 알았어?"
유달의 목소리를 듣고 제시카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바로 뒤돌아 자동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다.
"어딜 도망치려고!"
유달은 재빨리 쫓아가 차에서 끌어 내리려 했는데,
꽉.
땅바닥에 쓰러져 있던 김정배가 유달의 다리를 붙잡고 사정했다.
"제, 제발… 저 좀 살려 주십시오."
"헐! 왜 나한테 살려 달려고 이러는 거야?"
유달이 주춤하는 사이, 제시카는 차를 후진하여 공터를 빠져나갔다.
"야, 돌아와! 다리 찌른 놈이라도 데려가라고!"
유달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로 울릴 뿐이다.
제시카는 차량 속도를 더욱 높이며 멀어졌다.
* * *
동이 트는 이른 아침.
남태령 외곽의 한적한 도로.
유달은 일을 꾸미는 범죄자처럼 수상하게 행동했다.
낡은 손수레를 끌고 폐지를 줍는 할머니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장미란을 독촉했다.
"저 할머니 맞습니다. 바로 지금 실행하십시오."
장미란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러니까, 정확히 어쩌라는 말인데요?"
"저 할머니 다리 좀 보십시오. 더 늦기 전에 무릎 수술을 받으라고 하시고, 집도 번듯하게 고쳐 준다고 하세요."
"저도 불쌍한 사람들 보며 돕고 싶어요. 그런데 무슨 돈으로요? 유달 씨 돈 많아요?"
유달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완벽한 거지다.
자기 이름으로 된 자산은 아무것도 없고, 현금은 가지고 다니지도 않으며, 통장의 잔고는 언제나 제로였다.
유달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말했다.
"우리가 테일러를 잡지 않았습니까? 그놈은 온갖 몹쓸 짓을 저지르고 다녔으니, 현상금 걸린 게 있겠지요. 그 돈을 쓰면 됩니다."
"안타깝게도 테일러에게 걸린 현상금은 없어요."
"헐, 어떡하지? 그놈들이 행방을 알려 준 여중생 영혼과 이미 약속했는데요! 대무당인 내가 영혼과의 약속을 깰 수도 없고? 대출을 받아야 하나… 나는 신용도 없고, 담보 맡길 것도 없는데!"
그의 호들갑을 예상한 듯 장미란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자칼에겐 현상금이 붙었어요. 그 돈이면 유달 씨가 말했던 것 이상으로 도움을 드릴 수 있어요."
"아~ 그렇습니까? 놀랐잖아요……."
"이건 매우 좋은 일이잖아요. 자칼과 테일러를 잡은 것도 유달 씨의 공이 컸고요. 저 할머니에게는 제가 아니라, 유달 씨가 직접 가서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노, 노, 노, 노… 절대 싫습니다. 저는 폐지 줍는 할머니들 보면 안쓰러워서 말도 못 붙입니다."
장미란은 의아하여 반문했다.
"무슨 소리예요? 우리 카페 건물에서 폐지 줍는 할머니하고는 농담 따 먹기도 하잖아요."
"그 할머니는 강남에 아파트가 두 채나 있어요. 취미로 하는 거랑 진짜 생계를 위한 것은 천지 차이죠. 하나뿐인 손녀도 잃고, 죽을 날만 바라는 할머니를 저는 똑바로 볼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부탁드립니다. 내일 당장 관절 전문 병원 차에 태워서 입원시키세요."
장미란이 손수레를 끄는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무슨 일인데, 나를 부르는 것이오?"
"저희는 ‘소원’이라는 복지 재단에서 나왔어요. 할머니 손녀분의 이름이……."
장미란은 죽은 손녀의 소원이 당첨되어 수술도 시켜 주고, 집도 고쳐 주겠다는 말을 했다.
유달은 이를 여중생 영혼의 손을 잡고 지켜보았다.
할머니는 너무 감격하여 손녀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유달이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때? 나 약속 지켰지?"
-고맙습니다. 아저씨.
"고맙기는… 기브 엔 테이크잖아. 지금 승천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렸다가 할머니가 씩씩하게 손수레 끄는 모습 보고 승천해. 알았지?"
-네, 그럴게요.
"잘 있어, 천재 소녀."
유달과 장미란이 갓길에 세워 놓은 차로 향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밤새운 것이나 다름없다.
테일러를 경찰에 넘기면서 조사를 받고, 이곳에 차를 세우고 할머니가 나올 때까지, 두어 시간 눈을 붙인 게 고작이었다.
장미란이 차량 문을 열며 말했다.
"피곤해도 보람은 있네요. 국제적인 범죄자를 또 한 놈 잡았고, 가여운 영혼의 소원도 들어줬잖아요."
"저는 그저 피곤만 할 뿐입니다."
"왜요? 천재 여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면서 힐링이 되지 않았나요."
"힐링은커녕 고구마를 백 개 먹은 듯 답답합니다. 제가 하는 일은 뒷북치기에 지나지 않죠."
장미란은 표정을 진중히 하고 말했다.
"아니요, 저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유달 씨가 하는 일은, 모든 걸 잃은 사람들에게 살아갈 희망을 주는 거예요."
"정말이요?"
"네, 절대로 뒷북이 아니고, 절망을 이겨낼 힘을 주는 보람된 일이라고요."
"미란 씨의 말을 들으니, 힐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어 그는 기운차게 조수석에 오르며 말했다.
"중구청에 내려 주십시오."
"으흠? 유달 씨는 관공서 가는 거 싫어하잖아요?"
"미리미리 여권 신청하게요."
"설마……."
"그 설마가 맞습니다. 제 뒤끝 아시지 않습니까? 미국에서 비자 받는 건 미란 씨가 도와줬으면 합니다."
"알았어요. 비자부터 통역, 현지 안내까지 제가 해 드릴게요."
"그렇게 해 주시면, 저야 감사하지요."
부르릉.
장미란은 시동을 걸고 천천히 차를 몰았다.
* * *
평화로움 속에 느껴지는 막연한 긴장감.
유달의 지금 심정이 딱 그러했다.
자칼은 신병은 FBI로 넘겨졌고, 테일러는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었다.
켄달 측에선 큰 손실일 것인데, 아직 유달에 대한 보복은 없었다.
아마도 대마신의 현신을 찾는 데 주력하는 모양이다.
그 진실이 밝혀지면 엄청난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달은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빈자리에 앉아 있는데, 송보름과 한아름이 다정히 다가왔다.
이럴 경우는 뻔하다.
분명 한아름이 유달에게 할 말이 있는데, 송보름이 대신하려는 것이다.
참 보기 좋은 우정?
그도 한때 우정에 목숨 걸던 시기가 있었다.
비록 지금은 보자마자 칼 뽑는 사이가 되었지만…….
예상대로 송보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장님?"
"왜?"
"오늘부터 아름이 1시간 일찍 보내 주세요."
"이유를 말해야지?"
"아름이 공중파 방송에 나올지도 몰라요."
"뭐?"
유달은 퍼뜩 정신이 드는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