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블랙
괜찮은 맛이라 소문난 쇠고기 숯불 갈빗집.
늦은 시간임에도 손님들이 많다.
50대의 주인 남자는 흐뭇하게 외국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커플처럼 보이는 금발 백인 남녀와 한국인이 1명 섞인 자리다.
남태령을 쪽에서는 꽤 유명하여 외국인 관광객도 많이 찾는 고깃집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10인분을 시키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주인장은 그들이 1인분의 양을 착각하나 싶었다.
한국인 남자에게 물어봤는데, 1인분이 200g인 것도 알고 있었고, 10분을 시킨 것도 확실했다.
주인장은 다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품고 직접 고기를 갖다주었다.
그런데 웬걸?
외국인들이 고기를 먹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나 금발의 남자는 고개 한번 들지 않고, 게 눈 감추듯 고기를 먹어 치웠다.
주인장은 먹방을 찍는 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는데,
가게 입구에서 약간의 소란이 벌어졌다.
중년의 여종업원이 난처한 기색으로 가게로 들어오려는 남녀 손님에게 뭔가를 부탁했다.
주인장이 다가가서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사장님, 이 손님들께서……."
여종업원이 정확히 말을 하지 않아도 무슨 문제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난처한 기색으로 바라보는 남자 손님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사극에서나 나올 만한 길이의 멋스러운 장검이다.
주인장 또한 난처한 표정이 되어 부탁했다.
"죄송한지만, 그 물건은 밖에 두고 오심이 어떤지요? 물론 진짜 검은 아니겠지만 불편하게 보실 수 있는 손님들도 계셔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유달은 말 못 하고 머뭇거리자, 장미란이 대신 대답했다.
"영화 소품으로 제작된 비싼 검이라 차 안에 들 수가 없어요. 무슨 일이 생기면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주인장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 계신 분이 영화배우십니까?"
"무술 전문 대역 배우세요. 다음 달에 개봉하는 영화에서 박상혁 씨의 대역을 맡았어요."
"요즘 제일 잘나간다는 영화배우 박상혁이요?"
"맞습니다. 우리는 차기 영화의 관계자를 만나러 왔고요. 이 검은 중요한 소품이라 꼭 가지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가지고 들어가야지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들은 무사히 검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유달은 불만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저는 정말 이해가 안 됩니다. 제가 종업원 아주머니한테 말했을 때는 안 되더니, 미란 씨가 사장님께 말하니까 바로 통과네요. 우리는 토시 하나도 틀리지 않고 똑같이 말했는데 말입니다. 사장님이 너그러우신 걸까요? 제가 믿음을 주지 못하는 얼굴일까요?"
"괜한 거 신경 쓰지 말고, 놈들이나 찾죠. 주차장에 차가 있으니, 분명 여기에 있을 거예요."
유달과 장미란은 검은색 차량이 경찰차를 추격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들은 블랙박스 조사하여 그 차량의 정확한 차종과 대략적인 차량 번호를 유추할 수 있었다.
갈빗집 주차장엔 똑같은 차가 세워져 있었다.
흔치 않은 독일산 고급 차량이고, 차량 번호도 유추했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진검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었다.
남태령의 갈빗집은 상당히 규모가 컸다.
한옥과 비슷한 분위기의 2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쓰고 있었다.
"유달 씨, 여기를 잘 살펴요. 저는 2층으로 올라갈게요."
"알겠습니다."
그들이 1층과 2층으로 흩어져 조사하려는 때다.
툭툭.
유달의 장미란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찾았습니다."
그는 주방 쪽에 있는 구석진 자리를 손짓했다.
단체 손님이 우르르 일어나 시야가 가려졌던 곳인데, 그들이 빠져나가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제시카와 테일러가 정신없이 고기를 먹고 있다.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남자도 함께 앉아 있는데,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고기를 굽고 있었다.
장미란이 유달의 의향을 물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제가 영적인 능력을 쓰는 놈들에겐 상당히 가혹합니다. 당장에 머리끄덩이를 잡고, 개처럼 끌고 나와서 주리를 틀고 싶지만! 그 전에 우리도 고기 좀 먹죠. 저는 왜 남들 먹는 걸 보면 배가 고픈지 모르겠습니다."
유달과 장미란이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그들 세 명은 고기를 굽거나 먹느라 정신없다.
유달과 장미란이 테이블에 붙어서 빤히 내려다봐도 알아채지 못했다.
이에 유달이 경박스럽게 목청을 높였다.
"어우, 드디어 찾았어."
"!"
깜짝 놀란 그들이 동시에 고개 돌리며 쳐다봤다.
이에 유달이 환하게 웃음 짓는 얼굴로 말했다.
"합석 콜? 싫으면 바로 저세상 가는 거지."
그는 결코 장난으로 말하는 게 아니다.
퉁.
유달이 들고 있던 장검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내리쳤다.
테일러와 제시카는 긴장하여 상체를 뒤로 젖혔다.
하지만 그들은 유달의 한국말을 못 알아들은 상태.
제시카가 유달의 눈치를 살피며 김정배에게 물었다.
"저놈이 방금 뭐라고 한 거야?"
"합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만약 거절하면 저세상으로 보내 버린다고 합니다. 죽이겠다는 뜻이지요."
"미친놈… 일단은 앉으라고 해."
김정배는 욕을 빼고 통역했다.
"앉으시랍니다."
그렇게 고기가 익어 가는 원형 테이블에는 다섯 명이 바싹 붙어서 앉게 되었다.
* * *
긴장되면서도 어색한 분위기.
유달이 제시카와 테일러를 노려보며 말했다.
"고기 좀 더 시키지? 앉으라고 해 놓고 너희들만 먹을 건 아니지?"
김정배는 즉시 통역해 주었고, 제시카가 말했다.
"더 시켜."
"아주 많이… 나 소갈비 엄청 좋아해."
"많이 시켜 줘."
제시카는 유달의 요청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곧이어 그녀는 삐딱하니 팔짱을 끼며 물었다.
"사주 카페 사장과 매니저가 여기는 어떤 일이지?"
유달은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집어먹고 대답했다.
"범죄자 잡으러 왔지. 내 취미거든."
"어떤 범죄자?"
김정배가 즉각 즉각 통역해 주어 그들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어떤 못된 연놈들이 자칼을 빼내려는 기운이 느껴져서 말이야……."
"!"
"그런데 그 연놈들이 얼마나 멍청한지 몰라. 여기까지 왔다면 자칼의 신병을 어떻게 보호하겠다는 보고서를 입수했을 거야. 엄청난 경계 상태라 포기함이 마땅한데, 그 연놈들은 그러지 않았어. 해외 토픽에 나올 만한 아주 멍청한 짓을 벌였더라고."
제시카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어떤 멍청한 짓을 벌였을까?"
"자칼이 갇혀 있는 부대 앞에서 생쇼를 하며 소란을 떨었어. 아마도 그렇게 하면 자칼이 갇혀 있는 곳으로 보내질 거라 판단했던 모양이지. 계획을 짰던 사람이 그리 멍청하겠어? 결국엔 경찰차에 태워져 끌려갔다지 뭐야?"
제시카는 표정이 굳어지면서 물을 한 잔 마셨다.
이에 유달의 음성은 낮게 깔리듯 변했다.
"만약 이대로 끝났다면 재미있게 웃을 수 있는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었을 거야. 하지만 그 썩을 연놈들이 경찰관들의 허벅지는 아작 내 버렸네?"
제시카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런 일이 있었어?"
"피는 피로 갚는 게 이 바닥의 이치. 잭나이프로 경찰관들의 허벅지를 쑤셨으니, 그 연놈들은 더욱 길고 날카로운 칼로 배때기를 쑤셔 주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유달은 그녀를 노려보며 곁에 세워 둔 진검의 손잡이를 어루만졌다.
제시카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나도 그놈들을 빨리 잡았으면 좋겠네. 내가 피 보는 걸 아주 좋아하거든. 당신이 그 검으로 배를 쑤시는 모습을 꼭 보고 싶은데 말이야."
"그래? 조만간 그 소원을 이루게 될 거야. 아주 우연히도 미란 씨와 내가 경찰차를 뒤쫓는 검은색 차량을 봤거든. 그 연놈들과 한패일 게 뻔하지 않겠어? 우리는 그 차량의 행적을 뒤쫓아 여기에 온 것이고."
이에 유달은 김정배를 쏘아보았다.
"너……."
"왜, 왜 그러시죠?"
그는 뜨끔함을 감추며 대답했는데,
"고기 좀 빨리빨리 굽지? 여기 경쟁 붙은 거 안 보여? 무슨 외국인이 젓가락질을 이리 잘해!"
유달은 테일러와 서로 먼저 잘 익은 고기를 먹겠다고 젓가락 전쟁을 벌였다. 더는 제시카와의 대화엔 관심 없고, 젓가락질에만 집중했다.
이제 장미란이 나설 차례다.
그녀는 차분한 음성으로 제시카에게 물었다.
"한국에는 무슨 일로 오신 거죠?"
"그냥 볼일이 있어서. 당신에게 말해 줄 의무가 있나?"
그녀들은 영어로 대화했다.
이에 유달은 사나운 눈빛으로 김정배를 노려보았다.
"내가 알아들 수 있게 통역 계속해."
"아, 알겠습니다……."
김정배는 고기도 구워야 하고, 통역도 해야 하고, 가장 정신없었다.
장미란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제시카 씨는 미국에서 어떤 일을 하세요?"
"별로 말해 주고 싶지 않은데?"
"그럴 줄 알고 제가 조사를 했어요. 제시카 씨와 테일러 씨 모두 평범한 회사원이더군요. 하지만 이는 위장을 위한 신분이고, 실제로는 가장 악명 높은 군수업체의 특급 용병 아닌가요?"
"!"
"제시카 씨와 테일러 씨가 속한 팀은 용병 부대 중에서도 출중한 실력을 자랑하더군요. 현지에서는 ‘블랙’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한다고 하던데요."
드디어 제시카가 진지한 반응을 보였다.
"그건 어떻게 알았을까? 카페 매니저의 신분으로는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아닌데?"
"과거 제가 FBI에 몸담고 있었거든요."
"호~ 그랬구나? 왠지 낯이 익다 싶었더니 그런 골치 아픈 곳에 있었어. 그런 경력을 가지고 왜 카페 매니저로 있는지 모르겠네… FBI를 통해 더 알아낸 건?"
"거의 없어요. 블랙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은 모두 기밀로 취급되더군요. 미국에 있는 제 인맥을 총동원했는데, 더 알아낸 거라곤 당신과 테일러의 코드 네임뿐이었어요. 당신은 블랙 코브라, 테일러는 블랙 스콜피온. 둘 다 블랙의 최정예 요원이지요."
제시카는 장미란에게 얼굴을 가까이하며 말했다.
"간신히 선은 넘지 않았네? 지금 붙어 있는 목숨을 유지하고 싶다면, 여기서 멈추는 게 좋을 거야."
"제 동료들도 그런 충고를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이제 FBI 소속도 아니고, 여기서는 강력계 팀장까지 했어요. 전직 경찰이었던 내가 경찰관이 중상 입은 사건을 그냥 넘길 것 같아?"
장미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녀는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만약 당신들이 그 범인이면 내 손으로 체포할 거야. 당신들이 어디 소속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그렇게 죽고 싶은 건가?"
"진짜 멍청한 짓만 골라서 하네. 그런 위협이 나한테 통할 것 같다고 생각해?"
그녀들의 분위가 점점 험악해지는 때다.
남자들인 유달과 테일러는 거의 주먹다짐 일보 직진으로 치달았다.
그들은 고기 한 점을 젓가락으로 붙잡고, 서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 애썼다.
"금발 외국인, 내가 먼저 집은 거 몰라?"
"내 앞에 있는 걸 그쪽이 왜 손을 대냐고. 그쪽 앞에 있는 고기 먹으라고."
"나는 내가 먹고 싶은 고기 먹어. 정 억울하면 내 앞에 있는 고기 가져가. 이건 포기하고……."
"그럴 수는 없지. 나는 한번 정한 목표는 절대 포기하지 않아……."
"한국에서는 먼저 찜하는 게 임자야. 우리나라의 문화를 무시하고, 정말 누가 이기나 해 보자는 거야!"
젓가락은 잡은 그들의 손은 부들부들 떨렸고, 서로를 노려보는 눈빛은 활활 타올랐다.
장미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유달 씨, 그만 해요. 제가 더 맛있는 거 사 줄게요."
"그렇다면 제가 양보하지요."
유달이 먼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곁에 있던 검을 챙기며 경고하듯 말했다.
"너희들 운 좋았어. 만약 여기서 마신의 능력을 썼다면, 바로 손모가지를 뎅강 했을 텐데 말이야. 참고로 나는 심사숙고하고 행동하는 성격 아니야. 일단은 저지르고 보는 스타일이지."
제시카가 무심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잔소리 그만하고, 꺼져 주시지?"
이에 유달은 매우 중요한 걸 깜박한 듯 말했다.
"맞다, 고깃집 주차장에 있는 검은색 외제 승용차가 누구 건지 모르겠네? 그 차의 블랙박스 메모리 칩이 털린 것 같아. 만약 그 차 주인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면, 고스란히 녹화되었을 것인데 말이야."
"!"
김정배가 황급히 놀라 밖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황망한 표정이 되어 돌아왔다.
"어, 없습니다……."
"뭐, 뭐라고!"
그들은 줄지어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넓은 고깃집 주차장 한쪽 구석에 그들이 타고 온 차량이 주차되어 있다.
김정배는 차량 문을 모두 열고 샅샅이 뒤졌지만, 블랙박스의 메모리 칩을 찾지 못했다.
제시카가 짜증 내며 물었다.
"정말 없어?"
"네… 다른 건 그대로인데, 그것만 없습니다."
"내가 블랙박스를 끄라고 했을 텐데?"
"그, 그게… 껐는지, 켰는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너, 정말 이따위로 일할 거야? 엉!"
그녀의 화가 폭발 직전에 이른 때다.
유달과 장미란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쯧쯧쯧, 안쓰러워라……."
유달이 혀를 차며 차에 오르는데, 공교롭게도 그들 옆에 주차한 차량이다.
이것이 우연일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장미란은 곧바로 차를 몰고 떠났고, 뒷좌석의 유달이 창문을 내리고 장난스럽게 인사했다.
"안녕~ 우리 또 볼 것 같지 않아?"
* * *
어두운 밤 한적한 길.
장미란의 차량은 서울 방향이 아닌 외곽으로 빠졌다.
지나가는 차량이 한 대도 없는 도로였다.
뒷자리의 유달이 물었다.
"잘 따라옵니까?"
"예상대로요."
이에 유달은 반쯤 드러누웠던 몸을 바로 세웠다.
"저기 으슥한 곳에 세워 주십시오. 이제 끝장을 볼 때가 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