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정의의 수호신
카페로 들어온 유달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무슨 국제적인 범죄자가 그리 징징대며 울어 댑니까? 진짜로 손목 잘랐으면 혀 깨물고 자살했겠는데요?"
"포식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힘을 잃었으니 그렇겠지요. FBI에는 제가 연락했어요. 그놈을 데려갈 요원들과 전용기를 보낸다고 했어요."
"오~ 전용기요? 거물급 범죄자라고 그러더니 정말 대접도 특급으로 받습니다?"
"그만큼 위험하게 여긴다는 거예요. 민간 비행기를 탔다가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요. 어쨌거나 오늘 수고 많았어요. 덕분에 제 동료의 억울함을 밝힐 수 있게 되었어요."
"미란 씨야말로 제 말을 따라 주어 감사합니다. 계속 고집을 부렸다면 우리가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장미란이 피식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저는 옷부터 갈아입을게요."
"그러시지요."
장미란은 사무실로 향했고, 유달은 주방으로 걸어가 강성호에게 물었다.
"별일 없었지?"
"네, 사장님,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매상은 어때?"
"평소하고 비슷합니다."
"그래?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냐? 나하고 미란 씨가 없어도 매상이 거의 차이가 없으니 말이다."
강성호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좋게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뭐… 그렇지? 사장이 있으나 없으나 똑같은 게 좋은 거겠지. 그동안 수고 많았으니, 부매니저 시켜 줄까?"
강성호는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사장님. 저는 승진하는 것도 싫고, 월급 올려 주는 것도 싫습니다. 오래만 다니게 해 주십시오."
"헐, 욕심 없는 녀석. 알았어! 내가 굿 카페에 뼈를 묻게 해줄게. 그리고 퇴근하기 직전에 커피 좀 타 놔. 그거 있잖아, 최근 내놔서 인기 좋은 거 말이야."
"아, 수제 커피요?"
"맞아, 그거 좀 만들어 주는데, 너무 빨리는 말고, 퇴근 직전에 두 잔 만들어 놓고 가."
"두 잔이요? 손님이 오시나 봅니다."
"뭐 비슷한 거야. 부탁해."
홀로 향하던 유달이 한아름이 서 있는 걸 발견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서 물었다.
"왜 아직 퇴근 안 했어?"
"사장님하고 매니저님 오실 때까지 연장 근무하기로 했어요. 저도 나중에 오디션 때문에 갑자기 빠질 수 있거든요."
"자발적인 거라면 문제없지. 어서 퇴근해?"
"그런데요, 사장님……."
한아름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궁금해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상대방이 불편하게 여길 수 있는 질문이 분명했다.
성격 급한 유달이 먼저 물었다.
"갑자기 돈 들어갈 일이 생겨서 가불 필요해?"
"아니요, 가불은 아니고요."
"그럼 뭔데?"
"혹시 말이에요… 이건 정말 혹시 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사장님. 혹시 말이죠……."
한아름은 같은 발만 반복하여 늘이기만 했다.
이는 성격 급한 유달에겐 고문이나 다름없다.
"으아아~ 빨리 말해. 답답해서 미치겠다고! 내 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야!"
한아름은 황급히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저, 저기요. 매니저님하고 사장님이 국제적인 범죄자를 잡으셨어요? 자칼이라고 하는 아주 위험한 킬러요……."
유달은 순간적으로 당황하며 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저기 지금 뉴스에 나오고 있거든요."
한아름은 손을 들어 TV 뉴스 화면을 가리켰다.
여자 리포터의 맨트가 계속 이어졌다.
-자칼은 여러 나라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국제적인 수배자입니다. FBI와 인터폴에 전담반이 있어도 그를 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편에서는 각국의 특수 수사관들을 농락하는 살인 청부업자가 어떻게 일반인에게 제압을 당했겠냐는 의문이…….
"이거 또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겠고만. 귀찮게 시리 말이야."
유달의 모습은 표리부동 그 자체다.
겉으로는 싫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으슥하며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은 기분이다.
유달은 어깨와 목에 힘이 가득 들어간 상태로 한아름에게 물었다.
"그래, 자칼을 잡은 일반인에 대해선 뭐라고 나왔어? 아주 잘생긴 사주 카페의 사장이라고? 우리 가게 이름도 나왔나? 그냥 등산객으로 해 달라니까……."
"방송에는 그냥 등산객이라고만 나왔는데요."
"그렇구나."
속된말로 자신이 오버해서 정체를 들킨 것이다.
하지만 굿 카페 식구들은 모두 아는 사실이라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유달은 이를 그녀와 친해질 장난의 계기로 삼았다.
"솔직히 말하지. 나는 지구를 몰래 지키는 정의의 수호신이야. 평소에는 사주 카페 사장이지만, 악의 세력이 침략하면 악당들을 물리치러 다니지."
"정말이요?"
"그러니까 따라와."
한아름이 경계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 어디를요?"
"내 정체를 안 이상, 그냥 둘 수는 없어. 내가 정의를 지키는 수호신이라고 여기저기 떠들고 다닐 거 아니야."
"절대 안 그래요? 입 꼭 닫고 있을게요."
"그걸 어떻게 믿어? 나는 지구의 평화를 위해 확실한 입막음을 해야겠다고. 그러니 따라와."
한아름은 어찌할지 몰라서 송보름을 쳐다봤는데, 그녀는 피식 웃으며 괜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유달은 한아름을 계산대로 데려왔다.
그러고는 서랍에서 쿠폰을 꺼내서 도장을 찍어주며 말했다.
"이거를 명품관 쿠폰과 비교하면 안 돼. 나중에 이걸 들고 찾아와 부탁하면 내가 소원을 들어줄 거야. 원래는 살아서는 못 쓰는 건데, 아름이는 특별히 살아서도 쓸 수 있게 해 주지."
유달이 쿠폰 도장을 찍는 모습을 지켜보는 한아름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한꺼번에 열 개를 모두 찍어 주는 엄청난 선심을 베풀 건데, 보름이한테도 절대 말하지 마."
"왜요?"
"당연히 질투하지. 나와 오랫동안 고생하며 굿 카페를 지켜 왔는데, 아직 아홉 개의 벽을 넘지 못했거든. 안 되겠어… 보름이가 혹시 보여 달랄 수도 있으니까……."
유달은 서랍에서 쿠폰 한 장을 더 꺼냈다.
그러고는 연달아 다섯 개의 도장을 찍으며 말했다.
다다다다다.
"혹시 보름이가 몇 개를 찍었는지 보자고 하면, 이걸 내밀란 말이지."
곧이어 유달은 위장용이 첨부된 두 장의 쿠폰을 한아름에게 주었다.
"정말 어렵고 힘들 때 이 쿠폰을 쓸 수 있어. 어떤 일이건 나는 아름이의 부탁을 들어줄 거고. 알았지?"
"감사합니다."
한아름은 크게 허리 굽혀 인사하며 쿠폰을 받았다.
유달은 TV가 잘 보이는 자리로 걸어가며 송보름에게 말했다.
"아름이 잘 데려다주고 퇴근해."
"네, 사장님."
송보름은 유달의 예상대로 행동했다.
"사장님께 쿠폰 받았지?"
"응."
"도장 몇 개 받았어? 나 좀 보여 줘 봐."
한아름은 유달의 당부대로 위장용 쿠폰을 내밀었다.
"우와~ 초대박! 한꺼번에 다섯 개나 찍어 줬다고? 이런 경우는 정말 처음이야!"
송보름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만약 열 개를 한꺼번에 찍어 준 걸 알았다면, 정말 질투심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들이 옷을 갈아입으러 사무실로 걸어가고 있는데, 끼익.
때마침 사무실 문이 열리며, 등산복을 갈아입은 장미란이 나왔다.
말끔한 정장을 입은 그녀가 한아름에게 말했다.
"지금 퇴근하려고?"
"네, 매니저님."
"늦게까지 수고 많았다. 조심해서 들어가."
장미란이 TV를 보고 있는 유달에게 다가갔다.
그는 리모컨으로 여러 채널을 돌려 댔다.
자칼이 잡혔다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며 좋아 죽는 표정이다.
장미란이 그의 곁에 나란히 서며 말했다.
"오늘은 마음껏 자랑스러워해도 되요. 세계 각국의 수사기관과 정보기관이 놓친 거물급 범죄자를 잡았잖아요."
"저런 놈 하나 잡았다고 뭐가 대숩니까? 하지만 말이지요, 저놈이 잡혀서 당황스러운 놈들이 이을 겁니다. 아마도 지금쯤 난리가 났겠지요. 그걸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 좋은 겁니다. 아이고, 고소하다~."
* * *
동방 호텔 VVIP 전용 스위트룸.
유달의 예상대로 난리가 났고, 켄달의 숙소에서 비상 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는 핵심적인 마신의 능력자를 모두 불렀다.
폭풍 전야의 분위기 속.
고급 소파에 앉은 켄달이 백시연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 자칼은 요양 중이라 들었는데?"
그녀 대신 박만복이 대답했다.
"자칼은 신기가 손상되었습니다. 그래서 영기가 강한 강원도 산속에서 지내라 했었습니다."
"그놈이 어디 있었는지는 문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몸 상태가 좋지 않아도 그렇지. 지나가던 등산객에게 잡혔다고?"
"풉……."
제시카가 꾹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이에 박만복은 그녀에게 눈치 주어 경고하고, 켄달에게 대답했다.
"사주 카페 사장 짓입니다. 보통 사람은 절대 자칼을 제압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영기가 충만한 장소를 잘 알고 있으며, 자칼과의 원한도 있습니다."
"또 그놈이 내 발목을 잡는 것인가……."
"자칼이 먼저 그를 노리지 않았다면, 이런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사주 카페 사장은 정당한 복수를 한 것이니,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켄달은 기분이 상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는 수모를 당했는데, 나보고 일방적으로 참으라는 건가?"
"그게 가장 현명한 처신입니다."
"제임스, 너는 항상 이런 식이야. 조직의 중요한 일에는 관여하지 않으려 하고, 개인적인 일탈만을 즐기지. 요즘은 카페 꾸미는 일에 빠져 있다고 하던데?"
박만복은 불쾌한 기색을 웃음으로 감추며 대답했다.
"제가 맡았던 임무에 실수는 없었습니다. 이는 회장님이 더 잘 아실 겁니다. 저의 개인적인 취미까지 간섭하지 말아 주십시오. "
"네가 그놈을 잘 관리했다면, 이런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야."
"자칼은 통제가 안 되는 놈입니다. 그래서 큰 문제가 있는 놈들의 입국을 막아 달라고 회장님께 건의 드렸습니다. 이를 무시하고 자칼이 한국에 들어오게 허용한 건 회장님이십니다."
"결과적으로 내 잘못이 크다는 것인가?"
"저는 사실에 근거하여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네놈 역시 누구를 닮아서 한마디도 지려고 하지를 않는구나?"
네 탓 공방을 벌이는 켄달과 박만복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느껴질 때다.
제시카가 목청을 높이며 끼어들었다.
"주교님, 제가 나서서 해결하겠습니다."
켄달이 그녀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어떻게?"
"다른 때와 똑같이 하면 되겠지요? 자칼이 갇혀 있는 곳에 쳐들어가서 FBI가 오기 전에 구해 내겠습니다."
백시연이 반대하며 나섰다.
"안 됩니다, 주교님. 대한민국에서 사법 기관을 공격하는 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조직의 이득보다는, 나중에 잃게 되는 게 더 큽니다."
"자칼의 신병이 FBI로 넘어가는 건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제시카는 마음대로 날뛰고 싶은 겁니다. 마기를 감당 못 하는 상태에서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제가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잠시 고민에 빠졌던 켄달이 결정을 내렸다.
"제임스하고 시연이는 나가 있어."
이는 제시카에게 임무를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주교님?"
백시연이 애타는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소용없다.
켄달은 완고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시선 외면했다.
잠시 후.
박만복과 백시연은 쫓겨나듯 VVIP 전용 스위트룸에서 나와야 했다.
백시연은 분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다.
"제시카, 저년은 분명히 사고 칠 거야."
박만복은 관심 자체가 없다.
"나는 먼저 방으로 들어갈게."
"제임스, 너는 걱정도 안 돼?"
박만복이 객실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무슨 걱정?"
"제시카가 자칼을 구하겠다며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수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어. 너도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랐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지? 나는 바로 들어가서 잘 거니까, 깨울 생각하지 마. 새벽에 일어나서 공항에 나가야 하니까."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천하의 제임스가 스스로 마중 나간다고 하는 것일까?"
"쥬드 베르가 온다고 했어. 달이와 나의 싸움에서는 내가 앞서가고 있지."
* * *
폐점 시간이 가까워진 굿 카페.
퇴근 복장으로 갈아입은 장미란이 창밖을 보고 있는 유달에게 다가갔다.
"나중에 시간 좀 내 줄 수 있어요?"
이내 유달이 고개 돌리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자칼 때문에 미뤄뒀던 미제 사건 때문에요."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아주 간단한 일이에요. 사건을 봤던 목격자가 있는데 진술을 하지 않아요. 분명 무슨 사연이 있을 거예요. 유달 씨의 몸신이 도와주면 간단히 해결될 것 같은데요?"
유달의 목소리가 바뀌며 펙트 폭격을 시작하는 걸 말하는 것이었다.
"죄송하지만, 제 몸신은 더는 밖으로 못 나갑니다. 신당이 있는 카페에 머물러 있어야 하지요."
"왜요?"
"예방 차원이라고 알아 두시면 됩니다. 하지만 그 목격자를 여기로 불러오면 도움을 드릴 수도 있겠군요."
"그래요. 그 사람이 이쪽으로 데려오는 방법을 생각해 볼게요. 내일 봐요."
장미란이 주방으로 향하며 말했다.
"성호 씨, 같이 나가요."
"알겠습니다. 매니저님."
주방 밖으로 나온 강성호가 유달에게 말했다.
"사장님, 커피는 저기 있습니다."
주방에서 메뉴가 나오는 선반엔 김이 모락모락 흐르는 커피 두 잔이 놓여 있었다.
장미란이 유달을 돌아보며 물었다.
"오늘 손님 오기로 했어요?"
"뭐, 비슷한 겁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장미란과 강성호가 카페를 나갔다.
곧이어 유달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각각 손에 들고 VIP 룸으로 걸어갔다.
양쪽 손에 커피를 들고 있어 어떻게 문을 여나 했는데, 스르륵.
손잡이를 돌려야 하는 문이 저절로 열렸다.
활짝 열린 VIP 룸 안에는 날개를 가진 여인이 보였다.
그녀는 유달이 커피를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