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굿 카페-143화 (143/183)

143화. 플랜B

장미란은 유달이 가리키는 곳을 유심히 살폈다.

우거진 산림에 거리도 가깝지 않다.

난관이 많은 시야 사이로 불룩 솟아오른 바위가 보이긴 했다.

그런데 바위 아래쪽엔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다.

넝쿨과 뒤엉긴 수풀 너머로 뭔가 보이긴 하는데, 그 형태가 사람인지 짐승인지 확실치 않았다.

이내 그녀는 맨눈으로 보는 걸 포기했다.

"유달 씨, 배낭 내려요. 망원경 좀 꺼내게요."

"설마 저게 안 보는 건가요?"

"제 시력은 정상이에요. 이 거리에서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 눈이 이상한 게 아닐까요?"

"하긴, 제 시력이 워낙 뛰어나야 말이지요."

유달은 등에 멘 배낭을 벗어 내려놓았다.

장미란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이것저것 많은 준비를 해 왔다.

유달이 배낭을 뒤지는 장미란에게 말했다.

"혹시 노안 온 거 아닙니까? 나이는 속일 수 없는 겁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요즘 눈이 자주 침침하다고 느껴지지 않나요?"

그는 자신에게 유리한 점이 있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습성이 있다. 상대에게 그렇다는 말을 받아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제 눈은 정상이라고 말했죠. 그리고 노안은 가까이 있는 게 점점 안 보이는 거예요."

"!"

순간적으로 유달의 동공이 흔들렸다.

자신의 무지함을 들켰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예전이 이미 들통났고, 장미란이 말한 현상이 그에게 일어났던 것이었다.

"찾았다!"

장미란이 망원경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숨길 수 있는 수풀까지 접근하여 망원경의 초점을 맞췄다.

그사이 유달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초점을 맞췄다.

예전에는 아무렇게나 꺼내 봐도 잘 보였는데, 요사이 핸드폰과 눈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가까이 대고 보며 흐릿하고, 멀리 보는 건 괜찮았다.

‘뭐야? 휴대폰의 문제가 아니었어!’

그는 자신의 휴대폰이 오래되어 화면이 흐릿하게 보인다고 굳게 믿었었다.

좋은 조건이 나오면 바꿔야지 생각했는데, 아니다.

툭.

유달은 핸드폰을 쥔 손을 힘없이 떨어트렸다.

더는 자신의 눈이 자랑거리가 아님을 깨닫는 때였다.

장미란의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놈이 자칼이라고요……?"

유달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는 장미란의 곁에 바싹 다가가며 말했다.

"상당히 망측한 상태지요?"

"……."

자칼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발가벗은 상태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유달이 자연인이라 했던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위 아래의 우거진 수풀 덕분에 중요 부위가 가려졌다.

장미란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으니, 당장 달려가서 체포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하지만 자칼은 마신의 능력자.

유달은 장미란이 자칼과 혼자 맞서는 행위를 범의 입을 더듬는 것이라 표현했다.

그녀는 독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산에 올라오기 전에 유달과 약속했었다.

장미란이 망원경을 거두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독 안에 든 것을 확인했으니, 어떤 상태로 잡느냐가 관건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저놈을 죽이면 시체를 메고 산길을 내려가야 하는데… 어우~ 상상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자기 발로 내려갈 수 있게 최대한 멀쩡해 생포하는 게 중요하지요."

이어 유달이 배낭에 묶어 둔 진검을 빼 들며 말했다.

스릉.

"그래도 팔 하나 정도 자르는 건 괜찮지 않을까요? 제 옥체에 손상을 입힌 놈 아닙니까… 어디를 자르든, 걸을 수만 있으면 되는 거지요."

목에 있는 상처를 매만지며 칼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정말 그러고도 남을 기세다.

"자칼이 과다 출혈로 사망하면 어쩌려고요? 팔이나 어깨에 구멍만 내 주자고요."

스윽.

장미란은 배낭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가스총이나 위협용 모조품이 아닌 진짜 권총이었다.

"헐, 정말로 가져오셨군요?"

"걱정하지 말아요. 유달 씨가 말한 대로 안전장치는 확실히 했으니까요. 완벽한 무방비 상태의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 같은데요?"

그녀가 자칼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

유달이 매우 당황하여 소리쳤다.

"자, 잠시만요! 움직이지 마십시오. 절대로요. 그 상태로 그대로 가만히 계십시오."

장미란은 얼음이 된 상태로 물었다.

"왜, 왜요? 무슨 일인데요?"

"미란 씨를 위한 일이니, 제 말만 따르세요. 눈동자도 굴리지 마시고, 그대로 계세요."

유달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확실히 장난은 아니며, 그녀가 움직이면 큰일 나는 상황이 틀림없다.

장미란은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다.

"혹시 제가 지뢰를 밟았나요?"

"아니요, 방금 말한 것에는 똥도 포함인데, 아닙니다. 군 면제인 제가 지뢰 밟는 소리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렇다면 제 뒤에 있는 나뭇가지에서 뱀이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기라도 한가요?"

"아니요. 그보다 더 흉악한 게 덜렁거리고 있습니다."

"예에? 덜렁거린다고요……."

유달이 표현이 심히 수상했다.

"미란 씨, 뭔가 결심한 표정인데 그러지 마십시오. 제, 제발! 뒤돌아보지 말라니까요~."

장미란은 유달의 애타는 경고를 무시했다.

화악.

그녀는 자칼 있는 곳으로 과감하게 몸을 돌렸는데,

"……."

진짜 그렇다.

자칼은 불룩 솟은 바위에 올라와 있었다.

망원경 없이도 잘 보는 위치인데, 양팔과 다리를 벌려 가며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미란 씨… 그렇게 눈에 힘주고 보면, 남자인 제가 민망해지지요."

"나는 저런 거 신경 쓰지 않아요. 어떻게 저놈을 잡을지나 생각하죠. 지금 우리가 움직이면 바로 들킬 것 같네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저놈이 도망치면 우리도 힘들어집니다. 필사적으로 덜렁대며 달릴 것 아닙니까."

"좋은 방법 있나요?"

"당연히 있지요. 저놈도 밥때가 되면, 동굴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장미란은 자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했다.

"저놈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덮치자는 건가요? 입구만 막으면 도망칠 데가 없으니, 정말 독 안에 든 쥐새끼 신세가 되겠네요."

"노, 노, 노, 노… 동굴 안에는 비상 탈출구가 있습니다. 우리가 들이닥치는 순간, 그곳을 통해 재빨리 빠져나갈 겁니다. 우리가 동굴 안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장미란은 즉시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치밀한 사전 조사가 돋보이는 작전이라 반박의 여지가 없네요."

"하하하, 원래는 만복이를 잡으려 연구했었는데, 이게 이런 식으로 빛을 보네요. 원하던 월척은 아니더라도 자칼 정도면 준척은 되는 거지요?"

"자칼이 준척이라고요… 예전 FBI 동료들이 들었다면, 놀리는 거냐며 싸움 걸지도 모르겠네요."

"제 배포가 워낙 커야 말이지요. 이쪽으로 돌아가면 저놈의 시선에서 벗어나 동굴로 갈 수 있습니다."

유달과 장미란은 배낭을 챙겨서 조용히 움직였다.

* * *

동방 호텔 로비.

켄달은 국빈급 대우를 받았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수많은 수행원이 따랐고, 호텔에서도 각별하게 신경 썼다.

고급 승용차가 호텔 로비 입구에 연이어 멈춰 섰다.

경호원들이 먼저 내려서 로비 출입문까지 동선을 확보했고, 출입문 안쪽에서는 호텔 보안 요원들이 내부 손님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최고급 승용차에서 내린 켄달은 호텔 안으로 들어서 로비를 가로질렀다.

그의 뒤를 따라 십여 명의 수행원들이 함께 움직였다.

한편 그 시간,

조금순은 승강기를 타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야곱 빵집 일로 열흘 가까이 호텔에 더 머물며 출퇴근하는 중이다.

"핸드폰 챙겼고, 호텔 열쇠 있고……."

그녀는 평소처럼 단아한 한복 차림이었다.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기에 진주색 핸드백에서 소지품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띠동.

승강기가 로비에 멈추자 서둘러 그녀가 내렸다.

소지품 확인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

"지갑도 있고, 지하철 노선표……."

이리 몇 번을 점검해도 꼭 깜박하는 게 있었다.

조금순의 맞은편에선 켄달과 수행원들이 무리 지어 다가오고 있었다.

다른 호텔 손님들은 그 위세에 눌려 길을 피하는데, 고개 숙이고 소지품을 확인하는 조금순은 이를 신경 쓰지 못했다.

"!"

그런데 조금순을 보고 켄달이 먼저 멈췄다.

곧바로 그를 따르던 수행원들도 동시에 멈춰 서며 대기 상태다.

"중요한 건 다 챙긴 것 같은데……."

조금순이 핸드백을 닫고 고개를 드는 순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켄달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둘 사이엔 묘한 정적이 흘렀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라."

켄달은 홀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노신사 차림의 그는 머리에 쓴 중절모를 벗으며 정중하게 먼저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제는 여사님이라 불러야 할 나이가 되셨군요."

조금순도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했는데, 대꾸하는 말이 곱지 않다.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 계시군요. 이미 이승에서의 수명은 다했을 것인데, 구차하게 연명하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네요. 지금은 어떤 이름으로 살고 계신가요?"

"윌리엄 켄달입니다."

"이 호텔의 최고 VIP 손님이 바로 당신이었군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제가 차 대접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조금순은 싸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가 차 마시며 담소를 나눌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런 그렇지요……."

조금순이 의심하는 눈초리로 물었다.

"혹시 달이를 만났나요?"

"명동에 있는 사주 카페 사장을 말하는 겁니까? 인연이 당기니 만날 수밖에요. 척 보는 순간 알겠더군요. 생긴 건 꼭 아버지를 닮고, 성격은 꼭 어머니를 빼닮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매우 난처한 처지입니다. 조 여사님이 나서 중재를 해 준다면……."

조금순은 불쾌한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죄송하지만, 길을 비켜 주시지요. 당신 때문에 약속 시간이 촉박해졌네요."

"알겠습니다."

켄달은 군소리 않고 옆으로 물러섰다.

이에 조금순은 그를 쏘아보듯 쳐다보며 말했다.

"우연이라도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군요."

"제가 불편하여 호텔을 옮기겠다면 그리하십시오. 여기보다 더 좋은 호텔을 잡아 드리겠습니다."

"내가 왜 호텔을 옮겨야 하지요? 저를 보기 껄끄러우면 당신이 호텔을 바꾸든가요. 저는 이만."

조금순은 켄달을 지나쳐 앞으로 걸었다.

그녀는 로비 중앙을 점령한 켄달의 수행원들 피하지 않고 뚫고 나갈 기세다.

다행히 켄달이 눈짓하자, 그의 수행원들이 재빨리 양편으로 물러섰다.

조금순은 당당히 그들 사이를 지나갔고, 호텔 손님과 직원들 수군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천하의 켄달 회장을 난처하게 만드는 여인의 정체가 궁금했던 것이었다.

* * *

어두운 동굴 안.

유달과 장미란은 자칼이 오기를 기다렸다.

더럽거나 냄새나지 않고, 적당한 실내 온도에 안락한 느낌마저 드는 공간이다.

장미란은 LED 플래시로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혼자 사는 데 지장 없는 살림살이가 다 있네요. 전등도 있고, 침대도 있고, 라디오에 노트북… 전기는 대체 어디서 끌어오는 거예요?"

"태양광판을 설치했습니다."

"그런 장비를 들고 여기까지 올라왔다고요?"

"만복이가 원래 그런 놈입니다. 곧 죽어도 폼생폼사, 쫓기는 신세라도 할 건 다 하려고 하지요."

"그런데 자칼은 언제쯤 돌아올까요?"

"저도 그건 알 수 없죠. 그놈 마음 아니겠습니까? 저는 편안하게 누워서 기다리겠습니다."

유달은 푹신한 침대로 몸을 날렸다.

"오우, 쿠션 죽이는……!"

하지만 이내 그는 바로 몸을 다시 일으켰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한껏 낮춰서 장미란에게 말했다.

‘쉿! 드디어 옵니다. 역시나 양반은 못 되는 놈이군요.’

장미란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어 유달이 물었다.

‘플랜A로 하겠습니까? 플랜B로 하시겠습니까?’

장미란이 속삭이듯 대답했다.

‘플랜B로 하지요.’

‘미란 씨는 그럴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부디 제 예상이 틀리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장미란과 유달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자칼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곧이어 동굴 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순간,

딸깍.

유달이 잽싸게 불을 켜고,

"!"

흠칫 놀라는 자칼에게 장미란이 총을 겨눴다.

"꼼짝 마, 자칼…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머리통에 바람구멍 날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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