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담판
파다닥.
유달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용수철이 튕기듯 뛰어나가 켄달의 시선을 얼굴로 가로막았다.
"오랜만에 오셨군요? 미국에서 큰 사업하시는 분이 여기는 또 어쩐 일이십니까?"
"내, 자네와 담판을 지을 게 있어서 왔네만."
"오우, 엑설런트! 그사이 한국어가 완벽에 가깝게 늘었습니다. 천재라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군요."
"인사치레는 됐으니, 조용한 곳으로 안내했으면 싶은데."
"뭐, 그러시지요. 미란 씨, VIP 룸이 비었나요?"
바로 대답하는 장미란은 새삼스럽다는 반응이다.
"네, 언제나 비어 있죠."
VIP 룸엔 손님 있는 때가 거의 없다.
있다 해도 산 사람이 아닌 영혼이며, 대부분은 직원들의 쉼터로 사용되었다.
"저를 찾아오신 특별한 손님들입니다. 제가 VIP 룸으로 직접 안내할 테니, 주문은 미란 씨가 직접 와서 받으시지요. 다른 사람 시키지 말고요."
"네, 그렇게 하지요."
이어 유달이 켄달 일행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모두 저를 따라오시지요. 딴 데 시선 돌리지 않고, 빨리빨리 따라옵니다."
유달은 뒷걸음치며 그들을 안내했다.
그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듯 아무 사고 없이 VIP 룸에 도달했다.
"자, 얼른얼른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유달은 독촉하여 켄달 일행을 들여보내고, 그도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다음, 황급히 문을 닫았다.
쿵.
‘안 들켰어!’
유달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켄달이 한아름의 뒷모습을 보긴 했는데, 대마신의 현신인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마도 부적의 힘이 작용한 모양이었다.
‘이래서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고 한 거였어!’
만약 유달이 귀찮음을 못 이겨 부적 쓰는 걸 미뤘다면 크나큰 사태가 발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심은 금물.
둘의 거리가 가까웠다면 들킬 수도 있었다.
유달은 켄달 일행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들은 모두 6명.
켄탈과 그의 경호원 두 명, 그리고 백시연과 목에 문신한 외국인 남녀였다.
유달은 켈달과 마주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어떤 담판인지 몰라도, 주문하고 시작하지요. 1인 1메뉴가 예의인 거 알지요? 경호한답시고 안 마시고, 속이 안 좋다고 안 마시면, 사장 된 입장에서 매우 속상할 겁니다. 당연히 담판의 분위기도 영향이 있겠지요. 미국에서 큰 사업 하실 정도면, 업주의 마음이 어떤지 충분히 짐작하시라 생각합니다."
유달이 장황한 설명을 끝마칠 때다.
똑똑.
형식적인 노크를 하고, 장미란이 들어왔다.
그녀는 3개의 메뉴판을 들고 왔다.
켄달에게 하나, 백시연에게 하나, 나머지는 목에 뱀 문신이 있는 제시카에게 전해 주고, 영어로 말했다.
"찬찬히 살펴보고 주문해 주세요. 메뉴에 없는 것도 말씀하시면 최대한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메뉴판을 살피는 동안 유달이 장미란과 이야기를 나눴다.
"미란 씨, 제가 담판 같은 걸 해야 합니다. 급한 일이 아니면 찾지 말아 주시고요. 아름이는 오늘 첫날이니까, 일찍 퇴근하라고 하세요. 꼭입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이모님께 전화해야 하지 않겠어요? 시간이 늦어지면 야곱 빵집엔 못 갈 것 같은데."
"카페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전화했습니다. 오늘 안 가는 게 다행인 것 같습니다. 아주머니들과 고스톱 대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번에 부디 따야 할 텐데 말이지요."
곧이어 켄달이 먼저 주문했다.
"나는 저번에 마셨던 커피를 마시고 싶은데… 어떤 것인지 기억하고 있나?"
장미란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켄달 회장님."
"나는 그것으로 주고, 내 경호원들은 알아서 시키라고 하게. 자네 사장과 담판을 시작하면 밖에서 마실 것이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나머지 세 사람은 켄달과 똑같은 것을 시켰다.
장미란이 나가자마자 유달이 그에게 물었다.
"어떤 담판을 지으러 오셨는지요?"
켄달은 경호원들에게 물러가라는 눈짓하며 말했다.
"자네, 도가 지나쳤더군?"
유달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되물었다.
"어떻게 도가 지나쳤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요?"
"나는 대마신을 보호하는 데 모든 역량을 다할 것이야. 이에 반대하는 무리와 치열한 싸움을 하게 되겠지. 그런데 자네가 누구는 데려오면 안 된다며 참견하니, 내 기분이 좋을 수 있겠는가?"
"자업자득입니다. 이거 보이시나요?"
유달은 자칼의 검에 베였던 목 부분을 보여 주었다.
큰 상처는 아니었다. 딱지도 다 떨어지고, 이젠 희미한 자국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워낙 대단한 놈이라 이 정도지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목이 날아갔을 겁니다. 나한테 이런 짓을 하고도 참견이라니, 우리 ‘켄달 옹’이야말로 너무한 거 아닙니까? 참견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저한테 사과부터 하셨어야죠."
"사과라고? 개인적인 일탈을 가지고 무리한 것을 요구하는 자네가 문제인 것이야.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더는 신사적인 방법만을 고집할 수 없네."
"오~ 그래서 어쩌시게요? 여기서 한판 뜰까요?
* * *
VIP 룸에서 나온 장미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주방에 가서 무엇을 주문했는지 말하고 나서도, 계속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갸웃했다.
무언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다는 반응이다.
송보름이 다가와 물었다.
"왜요? 뭐 이상한 거 있어요?"
"켄달 회장과 함께 들어간 두 명의 외국인 있잖아?"
"아~ 목에 문신이 있는 금발 외국인들이요."
"어딘가 낯익은 느낌… 아니,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확실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단 말이야."
"제가 보기에도 범상치는 않아 보였어요. 반항기 넘치는 모습이… 행위 예술가 같지 않아요?"
"행위 예술?"
송보름은 자기가 아는 선에서 설명했다.
"길거리 같은 데서 이상한 분장하고, 해괴한 해동을 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거 있잖아요?"
"전위 예술의 한 종류를 말하는 거구나."
"신기가 있는 사람들은 예체능에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요. 백시연이라 여자는 유명한 작곡가잖아요. 우리 사장님은 모든 무술에 통달했고요. 물론 어디서나 예외는 존재하는 법이지만……."
바로 그녀 자신을 언급하는 것이다.
송보름은 예술과 체육 분야의 능력에서 평균을 넘지 못했다. 핸드폰 조작에만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송보름은 확신하는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보기엔 딱 그런 분위기였어요. 매니저 언니는 뉴욕에 살았으니까, 그런 사람들 많이 봤을 거 아니에요."
"그런가……."
장미란이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때다.
끼익.
VIP 룸 문이 열리고,
경호원들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안에서 본격적인 담판이 시작된 것이다.
190에 가까운 체구의 경호원들이 VIP 룸 근처 자리에 앉자. 장미란이 말했다.
"보름이, 네가 가서 주문받아 봐."
"에~ 저는 사장님과 똑같이 영어 울렁증이 있어요."
"언제까지 울렁증 타령만 할 거야? 우리 카페도 외국인 손님이 점점 느는데, 그때마다 나를 찾을 거냐고?"
"다음에요. 정말로 다음에요."
"나한텐 그런 말 안 통한다는 거 알지!"
장미란이 반쯤 얼어붙은 송보름을 등 떠밀고 있었는데, 한아름이 그녀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매니저님, 제가 가서 주문받을게요."
"잘할 수 있겠어?"
송보름이 대신 대답했다.
"아름이, 영어 엄청 잘해요. K팝 스타 되면, 해외도 나가야 한다고 열심히 공부했어요."
"엄청 잘은 아니고… 기본적인 대화만요."
그것도 굿 카페에서는 큰 도움이 되었다.
유달과 소보름은 입도 뻥긋 못하고 도망 다녔다.
장미란이 흡족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그럼, 저 테이블 주문만 받고. 바로 퇴근해."
"아직 7시가 안 됐는데요?"
"사장님이 첫날이니까, 일찍 들어가라고 했어. 부담 갖지 말고 바로 퇴근해."
"감사합니다. 매니저님."
한아름이 경호원들이 앉은 자리로 향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장미란의 시선이, 굳게 닫혀 있는 VIP 룸으로 옮겨졌다.
"유달 씨는 괜찮으려나? 켄달 회장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이던데……."
송보름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 모습이다.
"별일 없을 거예요. 포브스에 오른 부자라도 사장님한테는 안 돼요. 이건 돈 싸움이 아니잖아요. 만약 신기를 측정하여 순위를 매기는 리스트가 있다면, 영원한 탑에 오를 사람이 바로 사장님이지요."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안심이 되네. 그런데 아까 켄달 회장이 들어왔을 때 신당에서 큰 소리가 났었지?"
"저번에 말해 드렸잖아요. 켄달이라는 외국인은 영기가 엄청나서 보통 사람도 들을 수 있는 울림이 나는 거예요."
"백시연 씨가 카페에 들어올 때도 매번 그런 소리가 났었어. 그런데 처음과 달리, 그 소리의 강도가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야. 그녀의 영적인 능력이 약해졌다는 의민가?"
"아니요, 그건 신당이 건성으로 울려 대는 거예요."
장미란이 궁금증을 느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또 뭘까?"
"신당의 울림은 조심하라는 경고의 의미지요. 그런데 똑같은 사람이 자주 오면 신당도 귀찮잖아요. 그런 경우에는 건성으로 울려 대고, 위험한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한 경우에는 아예 안 울려요. 그렇지 않다면, 사장님 들어올 때마다 시끄러워서 난리가 나게요."
"음~"
장미란은 새로운 걸 알았다는 반응이다.
이에 송보름이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매니저 언니는 그 차이를 어떻게 알았어요? 신기가 없는 사람은 울림이 들리지 않을 텐데?"
"나도 언젠가부터 들리더라고. 아니,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영적인 기운을 지닌 사람들이 들어오면 머릿속에 울림 같은 게 전해져."
"그래요? 희한하네……."
송보름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을 때다.
장미란이 깜박한 듯 말했다.
"맞다! 나는 유달 씨가 시킨 일을 해야 하니까, 보름이가 홀 관리 좀 맡고 있어."
"무슨 일을 시켰는데요?"
장미란은 카운터에 뒤집어 놓았던 경고판을 보여 주었다.
"이걸 잘 보이는 곳에다 붙이라고 하네."
-박만복 출입 금지.
"키키키키킥… 역시 사장님답네요. 가위가… 그냥 저한테 주세요. 금방 붙이고 올게요."
"나한테 직접 부탁했다면 그럴 이유가 있겠지? 대충 했다가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맞아요, 사장님은 이상한 데서 꼼꼼한 면이 있죠."
장미란이 카페 밖으로 나가고, 경호원에게 주문받는 일을 끝낸 한아름이 돌아왔다.
"보름아, 나 먼저 들어갈게."
"그래, 내일 학원에서 보자."
한아름이 옷을 갈아입으러 매니저 사무실로 향하려는 순간, 때마침 주방에서 손님들이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VIP 룸, 커피 4잔 나왔습니다."
"알았어요. 성호 오빠."
송보름이 VIP 룸으로 가져다주려 했는데, 한아름이 재빨리 가로챘다.
"이것까지만 내가 할게."
"그럴래?"
"응, 사장님께 신경 써 주셔서 고맙다는 말도 하고."
"알았어. 그럼 이거만 갖다 주고 퇴근해."
장미란이 있었다면 말렸겠지만, 공교롭게도 그녀는 자리를 비운 상태다.
한아름은 커피가 담긴 쟁반을 들고, VIP 룸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 * *
점점 분위기가 험악지는 VIP 룸.
유달은 켄달의 위협에 위축되지 않았다.
"당신이 실력 행사하겠다면, 내가 깨갱할 줄 아셨습니까? 완전히 사람 잘못 보셨군요. 나는 걸어오는 도전 피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실력 행사할지 모르겠지만, 그에 따른 책임도 켄달 옹께서 지는 겁니다."
백시연의 예상처럼 외려 역효과만 불러일으켰다.
켄달은 흐트러짐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감정에 치우친 결정을 하지 않길 바라네. 자네의 영적인 능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해도, 내가 이끄는 조직을 당해 낼 순 없어. 이는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것인데?"
"아주 좋은 지적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켈달 옹과 대립하는 무리에 붙게 되면 어찌 될까요?"
순간, 켄달의 인상이 구겨졌다.
"지금 나를 위협하는 것인가……."
"위협은 그쪽이 먼저 하셨지요? 힘으로 누르면 내가 순순히 당할 것으로 보였습니까? 천만에요! 나는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당신을 부숴 버릴 겁니다."
유달이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그때.
끼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유달은 적개심이 가득했던 표정을 풀었다.
그는 출입문을 등지고 앉아 있는 상태다.
당연히 장미란이 가져온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주문하신 커피 가져왔습니다."
"!"
유달이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는데,
역시 주문한 커피를 가져온 이는 한아름이었다.
‘으아악~!’
유달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