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촬영은 계속되어야 한다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
모니터를 지켜보던 총감독이 갸웃했다.
"내가 각본을 저렇게 바꿨나?"
유달이 갑자기 정찬일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무술 감독 황룡이 대답했다.
"처음에는 각개로 싸우다가, 찬일이를 도와주는 부분은 맨 마지막인데……."
"액션 장면에 애드리브면, 너무 위험하지 않아요?"
"당장 중단시킬까요?"
"아니요, 잠시 두고 봅시다. 엄청 실감 나게 싸우는데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유달과 복면인은 진검 승부를 펼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유달은 격검용으로 제작된 검이고, 복면인만 진검.
유달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다.
파파파파파팍.
격검의 순간마다 유달이 확연히 밀렸다.
‘젠장, 검에 힘이 하나도 없어!’
플라스틱 검으로 쇠로 만든 검을 상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파박, 팍팍팍…….
복면인의 칼날이 모형검에 박히며 파편까지 튀었다.
유달은 언제 검이 부러질지 몰라 온전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자칼이란 놈인가?’
유달이 침착함을 유지하며 물었다.
"너 누구야?"
"……."
복면인은 대꾸 없이 계속 검을 휘둘렀다.
"액션 스쿨 배우 아니지?"
정체를 알 수 없지만, 검술 실력은 대단했다.
유달이 상대했던 사람 중 가장 뛰어난 고수였다.
정찬일이 수상함을 느끼고 유달에게 물었다.
"선생님, 무슨 일입니까?"
"안 좋은 일……."
유달은 복면인의 파상적인 공세를 막아 내며 대답했다.
"설마 저놈이 협박범!"
"침착하고, 내 말 들어……."
유달은 조용히 이번 일을 끝내고 싶었다.
"저놈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촬영장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다는 게 알려지면, 너나 현아 님에게 아무것도 좋을 게 없어."
"하지만 선생님이 다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경찰에 신고하는 게……."
"무슨 헛소리야! 내가 저런 놈한테 당할 것 같아?"
유달이 역정 내듯 큰소리쳤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복면인은 상대의 약점을 집요하게 노렸다.
그는 도끼로 장작을 패듯, 온몸의 체중을 실어 연이어 검을 내려쳤다.
팍! 팍! 팍!
검과 검이 부딪힐 때마다 유달의 상체가 크게 뒤로 젖혀졌다. 모형 검이 받는 충격을 최소화하여 부러지는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복면인에게 밀리는 유달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이게 진검이면…….’
상대의 동작이 크기에 찌르기로 끝장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손에 쥔 것은 날카로움이 전혀 없는 모형검.
정확히 급소를 찌르지 못하면 바로 반격을 당하게 되는데, 몸이 뚫리는 치명상을 면할 수 없다.
‘저놈도 이를 알기에 과감하게 공격하는 것이겠지…….’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다.
부실한 검으로라도 복면인을 막아 내야 했다.
유달이 뚫리면 정찬일의 목숨은 끝장이다.
복면인은 단 일격으로 정찬일을 죽일 수 있는 실력이다.
타임을 불러서 검을 바꿀 수도 없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지며 더 큰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
복면인은 출중한 검술의 고수일 뿐 아니라 마신의 능력자였다.
만약 그 능력을 드러내며 난리를 친다면 최악의 상황이 되고 만다.
유달의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고, 그나마 용케 버티는 모형 검이 대단하다 싶었는데, 팍! 팍! 팍~빠직!
모형 검이 두 동강으로 부러졌다.
격검용으로 제작되었기에 이나마도 버틴 것이다.
모형 검을 박살 낸 복면인의 진검이 유달의 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화악.
유달은 동물적인 반사 신경으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지만 완벽히 피해 내지는 못한 듯,
사악.
"!"
왼쪽 목 언저리에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유달은 재빨리 따끔함이 느껴졌던 목을 만져 보았다.
손바닥에 묻은 피를 확인한 순간, 유달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나 지금 피 봤어!"
유달이 분노했지만, 자신이 더욱 불리해진 상황이다.
반 토막 남은 검으로 복면인을 상대해야 했다.
팍! 팍! 팍!
간신히 막기는 했다.
그러나 격검의 순간마다 유달의 반 토막인 검도 점점 줄어들었다.
충격을 계속 받는 검이 언제 부러질지 몰라, 유달은 검으로 막는 상황을 최대한 피했다.
사악, 사악, 사악!
고개를 숙여 피하고, 점프하기도 하고, 땅을 구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때로는 위험천만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복면인은 앞구르기 하여 피하는 유달을 쫓아가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고, 사악~그의 검은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로 유달의 뒷덜미를 스치듯 빗겨 갔다.
주변의 액션 배우들도 수상함을 느꼈다.
"저 새끼 미친 거 아니야? 뒤에서 휘두를 거면 소리를 내야지!"
"대체 저놈 누구야? 각본하고 다르잖아. 저건 진짜 죽이려고 덤비는 거라고. 저러다 주인공 대역 다치면 촬영 끝인 거 몰라?"
"의욕이 너무 넘쳐서 그러나… 그런데 저놈의 검만 이상한 소리 나는 거 같지 않아?"
그들은 의문을 품고 액션 연기를 펼쳤다.
상당히 수상하다고 여겼지만, 감독의 특별한 사인이 없기에 계속 연기를 해야 했다.
복면인은 기세가 올라 더욱 과감한 공격을 퍼부었다.
피하고 막으며 뒷걸음치던 유달.
힘주어 내려치는 복면인의 검이 머리 뒤로 넘어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팟!
유달은 벼락처럼 달려들며 찌르기를 시도했다.
모형 검이라 날카로움이 없고, 길이도 더욱 짧아진 상황.
아주 작은 가능성에 목숨을 건 이판사판의 도박인가?
아니다!
검의 길이는 짧아졌을지 몰라도, 날카로움은 생겨났다.
유달은 복면인의 공격을 막아 내며, 부러진 검의 끝을 뾰족하게 만들었다.
그의 검이 먼저 닿으면 승산이 있다.
"딱 걸렸어!"
유달은 몸을 날리며 검을 쥔 손을 쭉 뻗었다.
순간, 복면인은 힘주어 내려치던 검을 황급히 거두며 회전하듯 몸을 틀었다.
부우욱~
옷을 베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하지만 치명상은 입히지 못하고, 가슴 부분을 길게 베었을 뿐이다.
뾰족해진 검 끝에만 살짝 피가 묻었다.
유달은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친 듯 아쉽게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아까운데……."
곧이어 액션 배우들이 하나둘씩 동작을 멈췄다.
유달과 복면인이 노려보며 대치하고 있는데, 그 분위기가 실로 험악했다. 연기가 아닌, 진짜로 서로를 향한 적개심을 불태웠다.
유달이 정찬일에게 말했다.
"미란 씨한테 가서 내 말 그대로 전해. 나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저놈과 끝장을 내고 싶어. 마신의 능력자니까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확실히 전해. 그리고 가능하면 촬영도 계속하고 싶어. 내가 저놈의 새끼를 박살 내는 장면을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거든."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잠깐! 검은 주고 가야지. 이 부러진 모형 검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해."
"네……."
유달과 복면인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고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찬일은 조심조심 유달의 지척까지 다가갔다.
유달은 두 개의 검을 쓸 모양이다.
정찬일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자 검을 잡고 있지 않은 왼손을 뒤로 내밀었다.
유달은 한시도 복면인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정찬일은 자신의 검을 유달이 내밀고 있는 손에 직접 쥐여 주었다.
"정말 괜찮으신 거지요?"
"내 실력 몰라? 나를 돕겠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말고, 미란 씨 곁에 꼭 붙어 있어… 실시!"
"실시!"
정찬일은 복명복창하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 * *
갑작스러운 촬영 중단 상태.
모니터를 살피는 스텝 천막도 난리가 났다.
총감독이 짜증 내어 소리쳤다.
"저 두 사람 갑자기 왜 저러는 겁니까?"
황룡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긴 뭘 몰라요? 촬영하다가 진짜로 싸우는 거 아닙니까?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촬영을 망치면 안 되지요. 당장 끌어내서 뭐라고 하세요."
"감독님, 너무 강하게 나가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 대역을 하는 분이 삐치기라도 하면, 촬영이 완전히 중단될 수도 있습니다."
황룡은 유달의 뒤끝이 장난 아님을 알고 있었다.
유달이 주인공 박상혁에게 했던 일을 봤기 때문이다.
"그럼 어쩌자고요?"
"제가 두 사람 모두 잘 달래 보겠습니다. 감독님이 보기에도 둘의 액션이 엄청나지 않습니까?"
총감독은 수긍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요……."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고 제가 둘의 기분을 풀어 보겠습니다. 둘이 화해하고 촬영을 시작하면 더 멋진 장면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오랫동안 촬영을 멈출 수 없으니 서두르세요."
"알겠습니다."
황룡이 천막 밖으로 나가려는 걸 장미란이 막아섰다.
"그냥 두세요."
총감독이 의문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누구신지……?"
"저는 주인공의 대역을 맡은 유달 씨의 매니저예요."
"매니저요?"
"일단 저 둘은 상관 말고 그냥 두세요. 스텝이나 배우, 아무도 접근하면 안 됩니다."
총감독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여기는 출입 제한 구역이에요. 매니저가 들어와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아마도 매니저 일은 처음이신 것 같은데……."
총감독이 그녀에게 정중히 충고하는 그때.
정찬일이 장미란을 찾아 모니터하는 천막으로 들어왔다.
"여기 계셨군요. 장 팀장님. 선생님이 전해달라는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선생님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저놈과 끝장을 내고 싶어 하십니다. 마신의 능력자니까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당부하셨고요, 그리고 가능하면 촬영도 계속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알았어요. 내 예상이 맞았네요."
장미란이 황룡에게 말했다.
"저 두 사람은 그냥 두고 배우들만 뒤로 빼 주세요. 누구도 저 둘 사이에 끼어들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 두시고요."
이어 장미란이 총감독에게 말했다.
"촬영은 계속 진행하시죠.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니까, 카메라맨이 가까이 접근해서 찍는 촬영은 피해 주시고요."
실소를 터트리는 총감독은 어이가 없는 표정이다.
"저기요? 내가 지금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해서 참고 있거든요. 이 영화와 관련된 모든 결정은 내가 내립니다. 내 입에서 큰소리 나오기 전에 나가주시면 고맙겠는데요."
"저는 이 영화가 무사히 촬영을 마칠 수 있도록 도우려는 거예요. 유달 씨는 뒤끝이 태평양이에요. 만약 자기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촬영을 거부하고, 전에 찍었던 영상까지 못쓰게 할 겁니다,"
총감독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고집도 엄청나서 누가 말해도 듣지 않죠. 하지만 저 둘이 알아서 해결하게 그냥 둔다면 이후의 촬영에 적극적으로 협조함은 물론, 영화사에 길이 남을 대결장면을 찍을 수 있을 거예요."
총감독을 바로 결정하지 않았다.
중요 스텝들과 상의를 거듭한 끝에 장미란의 의견을 받아들었다. 만약 유달이 그렇게 난리 치면 대응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총감독이 황룡에게 말했다.
"배우들만 철수시키고, 촬영은 계속 이어 갑시다."
"알겠습니다."
황룡이 직접 나서서 촬영장의 액션 배우들을 모두 불러들이는 때다.
남자 스텝 한 명이 장미란에게 다가왔다.
"부탁하신 검을 찾아왔습니다. 진짜 검은 아니지만, 쇠로 만들어서 단단하고요. 날도 서 있어서 조심해서 다뤄야 합니다."
"고마워요."
총감독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검은 왜요?"
"유달 씨 주려고요."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책임질게요."
장미란의 총감독의 만류하는 손짓에도 불구하고, 쇠로 만든 검을 가지고 유달에게 다가갔다.
스릉.
장미란은 검을 빼서 유달에게 전해 주었다.
"이 정도 검이며 부러지진 않겠죠?"
"역시 미란 씨는 제 영혼의 파트너입니다. 저놈의 목을 베어서 이 은혜에 보답하죠."
유달은 장미란에게 받은 검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저는 생포를 원하는데요……."
"죄송하지만, 들어드리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제가 지금 엄청나게 열받은 상태라서요."
척!
유달은 날이 선 칼끝을 복면인에게 겨누며 말했다.
"죽기 전에 남길 말은? 없으면 더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