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최고의 컬렉션
유달이 찍게 될 장면은 이번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판타지 액션 무협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슬로건으로 제작되었기에, 대규모의 인원과 촬영 장비가 이번 장면을 위해 동원되었다.
유달은 가볍게 몸을 풀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조폭 두목에게 잡힌 여주인공을 구하기 위해 폐허로 변한 도심의 길을 뚫고 가야 했다.
"많다……."
거리를 장악한 조폭들이 숫자가 100명이 넘었다.
물론 진짜 조폭은 아니고, 조폭 역할을 맡은 액션 배우와 운동 신경이 뛰어난 엑스트라였다.
촬영을 위해 동원된 장비도 엄청났다.
크레인에 달린 카메라, 레일에 설치된 카메라, 사람이 직접 메고 뛰는 카메라는 물론, 소형 카메라를 장착한 드론도 밤하늘에 떠 있었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는 거지……."
그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조폭과는 비교도 안 되는 무시무시한 마물들과 평생을 싸우며 보냈다.
유달은 검은 양복에 커다란 장검을 등에 메고 있었다.
물론 얼굴은 드러나지 않게 처리해야 했다.
"마스크를 씌울 거면서 왜 얼굴 화장을 한 거야?"
유달은 턱에 내려 쓴 검정 마스크를 끌어 올려 눈 밑까지 완전히 덮었다.
깔창 깔린 신발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지만, 크게 지장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유달은 차분히 심호흡하며 총감독의 사인을 기다렸다.
적막감이 흐르는 야외 촬영 현장.
탁.
클래퍼보드를 친 스텝이 황급히 빠져나가고,
모니터를 살피던 총감독이 메가폰을 집어 들었다.
"레디~!"
흡사 약장수가 떠오르는 걸걸한 목소리다.
이는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
유달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액~션!"
촬영 시작과 동시에 유달은 내달리기 시작했다.
"현웃 터질 뻔했어!"
마스크를 써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동시 녹음이 아니라 어느 정도 소리를 내는 건 상관없었다.
유달은 흙이 쌓인 급경사를 전력 질주.
팟!
맨 꼭대기 부분에서 힘차게 도움닫기 하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얼마나 높이 뛰어올랐는지, 모니터를 살피던 스텝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사악!
유달은 허공에서 등에 멘 검을 뽑았다.
아래쪽에는 조폭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 있다.
일본도로 무장한 그들은 유달이 허공에 떠 있는 걸 모르는 척 행동했다.
유달이 한 명을 베면서 땅에 착지해야 본격적인 연기가 시작된다.
사악!
유달은 각본대로 뒤돌아 서 있는 조폭의 등골을 베며 땅으로 내려섰다.
당연히 진짜로 벴다가는 다칠 수가 있다.
유달은 기술적으로 안 아프게 등골을 베며 약속된 신호를 소리쳤다.
"킬!"
베였으니, 죽으라는 신호다.
"크아악~"
검에 스친 단역 배우는 동시녹음이 아님에도 찰지게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곧바로 주변에 있던 조폭이 화들짝 놀라며 덤벼들었다.
이들은 그냥 원 샷 원 킬로 끝내기로 각본이 짜여 있다.
삭~ 삭~ 삭~ 삭~.
"킬! 킬! 킬! 킬!"
유달의 번뜩이는 칼질에 조폭들이 연달아 쓰러졌다.
고통스러운 표정은 필수지만, 비명을 실제로 지르는 건 자유다.
"으악!"
"크윽~."
아직 조폭 두목을 향한 길은 멀다.
사방에서 조폭들이 일본도, 회칼, 각목과 쇠파이프 등의 무기를 들고 몰려들었다.
이것이 현실이라면 벌써 죽었다.
영화니까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상황이 가능했다.
따따따따따따닥…….
"킬! 킬! 킬! 킬!"
유달은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미리 들었던 설명은 잊은 지 오래다.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할 장면은 그 부분을 담당하는 액션 배우가 설명해 주었다.
"벽 타고 뒤로 점프 들어갑니다. 더는 ‘킬’하지 마시고 수세에 몰린 척하십시오!"
"오케이!"
유달은 다급하게 공세를 막아내며 대답했다.
‘벽 타고 뒤로 점프’는 액션 영화에서 단골로 들어가는 장면이다.
쫓아오는 적을 피하여 벽으로 돌진.
그대로 벽을 타며 올라가다가 뒤로 점프하여, 쫓아오는 상대의 뒤를 점하는 장면이다.
유달은 멋있어 보이는 장면은 무조건 따라 하는 습성이 있고, 마물과의 실전에서도 사용했었다.
여기서는 첫 번째 위기를 넘기는 방법으로 쓸 것이다.
액션 배우가 소리쳤다.
"발차기 나갑니다!"
유달은 마음 단단히 먹었다.
액션에서는 때리는 것보다 맞는 게 더 중요했다.
퍽.
등에 충격이 느껴지는 순간,
유달은 앞으로 고꾸라지듯 하다가, 앞구르기를 하여 쏟아지는 조폭들의 무기를 피해 냈다.
그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벽을 향해 내달렸다.
각본대로 조폭들이 무리 지어 쫓아왔다.
"아자자자자자!"
유달은 충돌을 불사하듯 벽을 향해 내달렸다.
곧이어 민첩한 발놀림으로 벽을 타고 오르는데, 중력의 힘을 이겨 내고 꼭대기까지 닿을 기세다.
마침내 최고 높이에 도달하는 순간,
팟!
유달은 뒤쪽으로 점프하며 공중제비를 돌았다.
"세상에~!"
모니터를 지켜보던 총감독이 탄성을 터트렸다.
그 엄청난 높이와 우아한 몸동작은 와이어 액션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유달을 쫓아오던 액션 배우들도 마찬가지 반응이다.
촬영 중인 상황임을 망각한 듯, 순간적으로 넋을 놓고 자신들의 머리 위로 지나치는 유달을 바라보았다.
* * *
동방 호텔 최고의 스위트룸 응접실.
백시연도 이다연의 돌변한 분위기에 당황했다.
‘뭐야? 좀 전과는 아주 딴판이잖아?’
천방지축으로 날뛸 때와 지금의 도도한 분위기.
어떤 게 그녀의 본 모습인지 확실히 단정하기 힘들었다.
박만복은 사실대로 만남의 목적을 밝혔다.
"나는 당신의 명품에 관심이 있습니다."
"내가 수집한 컬렉션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이다연은 거부의 뜻을 확실히 밝혔다.
"나는 컬렉션 작품을 팔 생각이 없어요. 돈은 얼마든지 내겠다는 말은 사양하죠. 조용히 입 다물고 돌아가세요."
"이다연 씨의 소장품을 사겠다는 게 아닙니다. 나에게 잠시 빌려줬으면 하는 겁니다."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네요?"
"당신의 컬렉션을 내 카페에 전시하고 싶습니다."
"……."
이다연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농담하시는 건가요?"
"나는 농담 같은 거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진담이라면… 미친 거 아니에요? 내 소중한 컬렉션을 카페에 전시하겠다니? 내가 그런 격 떨어지는 짓을 할 것 같나요. 만약 그러나 분실 사고라도 일어나면, 그 카페를 팔아도 모자랄 거예요. 내가 올해 들은 말 중에서 가장 황당한 말이네요."
박만복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일반적인 카페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최정상 인테리어 디자이너 쥬드 베르가 내 카페를 새롭게 꾸며줄 겁니다. 그때 당신의 컬렉션과 어울리는 전시관을 만들 것이니, 결단코 격이 떨어지는 선택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사설 경비 업체가 24시간 전시관 전체를 감시합니다. 도난이나 분실은 없을 것이라 약속하지요."
이다연이 더욱 기가 막힌 표정으로 변했다.
"쥬드 베르가 정말 당신 카페의 인테리어를 맡았다고요? 얼마 전, 혜성 백화점 본사에서 그에게 명품관의 인테리어를 의뢰했어요. 쥬드 베르가 시간이 되지 않아 거절했다고 들었는데요?"
"억지로라도 만들면 되는 게 시간입니다. 쥬드 베르는 한국의 백화점이 자신의 격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모양이지요."
"!"
이다연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하지만 박만복은 그녀의 반응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나만 이롭자는 게 아닙니다. 이번 기회에 당신이 컬렉션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내가 여러모로 도움이 되어 드리지요."
"방금 업그레이드라고 했어요? 내 컬렉션이 완벽하지 못하는 건가요?"
"당신의 컬렉션에 흠이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매우 훌륭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최고는 아니라는 거지요."
이다연은 하도 어이가 없는지 웃음까지 터트렸다.
"허, 정말… 내 컬렉션을 본 적 있나요?"
"없습니다. 본다고 해도, 내가 여자 명품에 대해선 문외한이라 어떻게 평가할 처지도 아니지요."
"그런데 왜 제 컬렉션이 최고가 아니라 단언하는 거죠?"
"최고의 컬렉션이 어디 있는지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이다연이 도전적으로 말했다.
"그게 어디죠? 전문가도 아닌 사람의 말을 듣는 것보다, 내가 직접 확인하는 게 낫겠네요."
"좋은 생각입니다. 명동에 있는 굿 카페라는 곳을 찾아가시면 됩니다. 주소는 문자로 보내 드리죠."
"거기도 카페라고요?"
박만복은 그녀에게 가까이 상체를 숙이며 말했다.
"더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굿 카페와 내 박 카페는 라이벌입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사주 카페가 어디냐를 두고 경쟁하고 있죠. 나는 당신과 손잡고 경쟁자를 이기려는 겁니다."
"계속 나를 어이없게 만드네요. 사주 카페의 경쟁 관계에 나를 끌어들인 건가요?"
"굿 카페에 가면, 내가 왜 이다연 씨에게 이런 제안을 했는지 이해하게 될 겁니다."
"좋아요. 그쪽의 제안을 받아들일지는, 굿 카페라는 곳을 갔다 와서 결정하죠."
"나도 그게 현명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이에 이다연은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을 들어 입술을 적시듯 살짝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박만복에게 물었다.
"사주 카페 사장님이면 점도 보고 그러나요?"
"명색이 무당이니, 당연히 점도 봅니다."
이다연이 솔깃하여 말했다.
"그럼, 제 사주 좀 봐 주시겠어요? 유명한 점술가에게 재미 삼아 봤는데, 크게 성공할 사주라고 하던데요?"
박만복은 고개 저으며 대답했다.
"나는 함부로 점을 보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같은 편이 된다면, 그때 확실히 봐 드리죠."
"매정하시네……."
곧이어 그들은 가벼운 대화를 이어 갔다.
"사장님은 언제 신내림 받고 무당이 된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였습니다."
"그게 가능해요?"
"나는 평범한 무당이 아닙니다. 어떤 한 놈만 아니었다면… 대무당의 신적에 내 이름을 올렸을 겁니다."
"대무당은 또 뭔데요?"
* * *
환하게 불을 밝힌 영화 촬영장.
길게 이어지던 액션 장면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사악~ 사악!
힘겹게 검을 휘두르는 유달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헉, 헉… 내가 왜 이런 개고생을 하는 거지……."
중간에 끊김 없이 계속 달리며 검을 휘둘렀으니, 당연히 지칠 수밖에 없다.
체력이 고갈된 유달은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상황.
총감독은 현실감을 반영한다는 명목하에 그냥 두었다.
유달은 이를 악물고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그가 지나온 자취를 따라 조폭들의 시체가 즐비하고, 멀쩡히 움직일 수 있는 조폭은 채 10명이 되지 않았다.
사악, 사악, 사악!
유달은 사력을 다해 그들을 쓰러트리고,
마침내 조폭 두목을 향해 검을 겨누는 순간!
"캇~!"
총감독이 기분 좋게 소리쳤다.
풀썩~.
유달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황룡이 서둘러 달려와 유달을 부축하여 촬영장을 벗어났다.
그가 떠난 자리엔 주인공 박상혁이 섰고, 조폭 두목과 대화하는 장면이 바로 이어졌다.
유달은 장미란이 건네는 물을 마시고, 황룡에게 말했다.
"워~ 끝났나요……."
"보충 촬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디 가지 마시고, 여기서 잠시 쉬고 계십시오."
"힘들어서 어디 가지도 못해요……."
유달은 황룡이 떠나자, 장미란에게 고개 돌렸다.
"자… 이제 말씀해 보시지요. 자칼이라는 킬러가 왜 찬일이를 노리는 겁니까?"
"제 생각엔 유달 씨 때문인 것 같아요."
유달이 배나 커진 눈으로 반문했다.
"여기서 제가 왜 나옵니까?"
"저는 자칼의 누군지 짐작 가는 인물이 있어요."
"그게 누군데요?"
"제임스 박. 유달 씨의 숙적인 박만복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