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준비 완료
무술 감독 황룡.
그는 실전 무술의 고수이기도 했다.
격투기와 권법, 검술과 마상 무예 등등, 영화 액션에 필요한 모든 종류의 무술을 섭렵했다.
황룡은 유달이 정찬일과 실전과 다름없는 액션을 펼치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그리고 바로 보통 고수가 아님을 깨달았다.
무도인끼리의 끌림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유달과 간단히 인사 나누고 촬영에 들어갔었다.
지금 황룡은 영화 인생 최대의 위기에 몰린 상황.
불운이 겹치고 겹쳤다고는 하지만, 액션을 총괄하는 자신의 책임이 가장 컸다.
"이봐요, 황 감독? 어떻게 대책을 마련해 봐요? 이대로 촬영 접을 수는 없다고요."
"알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황룡이 천막 안으로 들었다.
곧바로 그는 이미 안면을 튼 유달에게 물었다.
"신장이 어떻게 되십니까?"
"저요?"
"네, 유달 사장님의 정확한 키가 궁금합니다."
"저는 183……."
유달은 결코 작은 키가 아니다.
그런데 황룡은 뭔가 실망하는 분위기다.
유달은 길게 늘이던 뒷말을 힘주어 끝냈다.
"쩜~ 5인데요."
"흠……."
황룡은 간신히 커트라인은 넘겼다는 반응이다.
"실제 키보다 키가 커 보이는데요?"
"제가 비율이 좋아서 그렇습니다. 기성복은 저에게 맞춤옷이나 다름없지요."
"저는 그 비율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지요. 잠시 일어서 주시겠습니까?"
"네……."
그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역적 되는 분위기였다.
영화 스텝들은 멀뚱히 서 있는 유달을 보며 품평회를 열었다.
"나쁘지 않은데요?"
"상혁이의 키가 188인데… 5센치나 차이 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전체적인 몸태가 상혁이 판박이에요."
총감독은 미술품 감상하듯 유달을 바라보다 말했다.
"상혁아, 잠시 옆에 가서 서 볼래?"
"알겠습니다. 감독님."
박상혁은 부축을 받으며 유달 옆에 섰다.
‘크다!’
유달은 허리를 쫙 폈지만, 엉거주춤 서 있는 그를 이길 순 없었다.
총감독이 서두르라는 손짓하며 말했다.
"깔창 하나 깔아 봐."
남자 스텝 한 명이 재빨리 유달에게 뛰어왔다.
"신발 좀 벗어 주시겠어요."
거부하면 역적 된다.
유달은 스텝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깔창을 까니 발이 아프다. 스텝은 신속하게 한 치수 큰 신발을 구해서 교체해 주었다.
총감독은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처음에는 촬영만 진행하자는 마음이었는데, 점점 더 욕심이 생겼다.
"한 장 더!"
유달은 깔창의 위력을 새삼 실감했다.
올려봐야 했던 박상혁이 거의 눈높이로 보였다.
주먹을 불끈 쥔 총감독이 기분 좋게 소리쳤다.
"오케이, 다시 촬영 준비해!"
활기를 찾은 스텝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총감독이 유달을 눈짓하며 황룡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 사람의 실력은 확실한 겁니까? 여기서 더 사고 나면 투자사에서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요."
황룡은 아무 대꾸 없이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표현이다.
유달은 헛웃음 지으며 장미란을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난리일까요?"
"자업자득 아닌가요? 내가 눈에 띄지 않게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요."
"봤습니까?"
"어떻게 못 봐요? 아주 신이 났던데. 유달 씨의 검술을 은근히 뽐내고 싶었던 거 아닌가요?"
"……."
유달이 조용히 시선을 외면할 때다.
황룡이 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 어찌 된 사정인지는 짐작하고 계실 겁니다."
"제가 주연 배우의 대역으로 전격 발탁된 거 맞지요? 저는 승낙의 의사도 밝히지 않았는데……."
"먼저 의향을 묻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사안이 워낙 시급해서요. 같은 무도인으로서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나중에 사례는 톡톡히 하겠습니다. 유달 사장님."
"저도 무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황 감독님을 돕고 싶습니다. 제가 잘나서 생긴 일인데 어찌하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저를 탐탁히 여기지 않는 사람과는 같이 일 못 합니다."
"그런 사람이 여기 어디 있습니까?"
유달은 박상혁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내가 그쪽 대역 맡아서 기분 나쁘지 않아? 찬일이와 함께 있는 거 보고 같잖은 듯 쳐다봤잖아?"
유달의 뒤끝은 만리장성이다.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 영화 정말 잘돼야 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좋아,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만약 틀리면 그쪽 대역 때려치울 거야."
"저, 저기 그것은 너무 일방적……."
유달은 그의 불평을 듣지 않고 바로 문제를 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는?"
당황하던 박상혁은 즉각 대답했다.
"당연히 오현아 배우지요?"
"합격!"
박상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분장 도구를 챙겨 든 여자가 다가왔다.
"여기서 바로 메이크업하겠습니다."
"네, 그러시지요."
유달은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분장사는 빠른 손놀림으로 그의 머리를 정리했다.
유달은 으쓱한 표정으로 장미란에게 말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제가 진짜 배우가 된 것 같습니다. 솔직히 무속계에서 저만 한 얼굴 찾기 힘들지요."
띠리링, 띠리링…….
문자가 왔다는 알림이 연이어 울렸다.
유달은 자신의 휴대폰을 장미란에게 건넸다.
"저 대신 확인 좀 해 주십시오. 공식 홈페이지와 모바일 계정 등, 모든 채널을 망라했습니다. 수상한 접촉자는 나이, 성별, 국적 상관없이 모두 추려서 보내 달라고 했지요."
"알았어요. 제가 볼게요."
장미란은 유달의 휴대폰 살피며 물었다.
"외국에서도 접촉한 사람이 많네요?"
"최고의 한류 스타 아닙니까. 세계 각국에 현아 님의 광팬이 퍼져 있습니다."
순간, 장미란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여기서 뜻밖의 아이디를 보게 되네요……."
그녀의 음성은 무겁게 내리깔렸다.
"누군데요?"
"FBI에 있을 때 나를 농락한 놈이에요. 아니, 부서 전체를 농락했지요."
"대체 어떤 놈인데요?"
"설마 이놈이… 확실하면 알려 줄게요!"
장미란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저, 저기요? 힌트라도 좀 줘 봐요. 미란 씨? 저는 궁금한 거 못 참아요. 미란 씨~!"
그녀는 애타게 부르던 유달은 바로 주의를 받았다.
"얼굴 화장 중이니까, 잠시 말씀하시면 안 돼요."
* * *
동방 호텔 프레지텐셜 스위트룸.
띵동.
승강기에서 내린 박만복은 걸음이 무겁다.
식욕이 폭발하여 오랜만에 과식했기 때문이다.
그는 휴대폰을 놓지 못하고 백시연과 통화 중이다.
"스위트룸 층에 내려서 걸어가고 있어."
-아까도 엘리베이터 앞이라고 했다가, 갑자기 사라지지 않았나? 휴대폰까지 꺼 놔서 나를 완전히 뚜껑 열리게 만들었지.
"이번에는 진짜야. 거의 문 앞에 도착했어."
-10초 안에 노크 안 하면 진짜 끝이야. 내가 진심으로 화내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박만복은 뛰듯이 복도를 걸었다.
그러고는 지체하지 않고 스위트룸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노크와 거의 동시에 문이 열렸다.
백시연은 휴대폰을 귀에서 떼지 않은 상태다.
그녀는 눈싸움하듯 박만복을 노려봤다.
"늦어서 미안……."
진심으로 사과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백시연은 조금은 화가 풀어진 듯, 휴대폰을 거두며 막고 있던 문에서 물러났다.
"뭐 하다 이제 왔어?"
박만복은 스위트룸 안으로 들어서며 대답했다.
"밥 먹었어."
"밥~?"
백시연은 고개를 휙 돌리며 반문했다.
그처럼 어처구니없는 변명이 통하겠냐는 반응이다.
그녀는 누구보다 박만복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다급한 일도 아니고, 자기 밥 먹는 것 때문에 중요한 약속에 늦을 리 만무했다.
농담으로 여겨도 되는 대답이었지만, 백시연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제임스, 우리가 함께 일하는 조건 알지?"
"당연히 알고 있지."
"너는 나한테 거짓말하면 안 돼. 내가 묻는 말에는 반드시 진실만을 말해야 하고, 그게 싫으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마. 그거까지는 내가 뭐라 하지는 않잖아?"
"나는 정말 밥 먹고 왔어."
"혼자서?"
"그건 말하고 싶지 않은데……."
백시연은 바로 전에 말한 게 있어 더는 캐묻지 않았다.
박만복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말했다.
"문제의 그녀는 어디 있어? 혜성 백화점의 막내딸 ‘이다연’이라고 했지."
현관과 이어진 커다란 거실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백시연은 반쯤 열린 방문을 턱짓하며 대답했다.
"저기 손님 접대용 응접실에 있어."
"알았어."
곧이어 응접실 안으로 들어선 박만복은 순간적으로 주춤하고 말았다.
이다연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소파 위에서 방방 뛰며 춤추고 있었다.
그는 백시연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테이블 위엔 과일 안주와 와인 잔이 놓여 있고, 바닥에는 술병들이 굴러다녔다.
백시연이 팔짱 끼며 대답했다.
"술 취한 거 아니야. 원래 저래. 자기 멋대로 하는 게 완전히 ‘노답’이야."
그녀는 단단히 질렸는지 휘휘 머리채를 저었다.
소파에서 방방 뛰던 이다연이 박만복을 발견했다.
"시연 언니, 누구야?"
"응, 내가 말했던 그 사람."
이다연은 이내 춤을 멈추고 다가왔다.
그러고는 활기찬 음성으로 먼저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이다연이에요."
"제임스 박입니다."
그녀는 박만복을 쭉 한번 훑어보고 말했다.
"명품으로 치장을 했네요? 나쁘지 않아요. 고급스러움을 내비치면서도 과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무시할 수 없는 존재라고 어필하네요. 따로 코디 받는 사람이 있나 봐요?"
그녀의 안목은 정확했다.
박만복은 미소짓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이다연은 소파에 다소곳이 앉으며 말했다.
"무슨 일로 저를 만나고 싶다고 했나요?"
좀 전과는 아주 딴판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도도함이 느껴졌다. 소문처럼 철부지 부잣집 막내딸이 아니다.
박만복은 그녀가 보통내기가 아님을 직감했다.
* * *
촬영 시작이 임박한 야외 세트장.
검을 쥔 유달이 조폭들로 가득한 도심의 폐허를 바라보며 섰다.
황룡이 그에게 열심히 반복하며 설명했다.
"…알아들었죠? 이 장면은 롱 테이크 신으로 갑니다."
유달이 씩 웃을 얼굴로 물었다.
"그게 뭔데요? 롱 테이… 어쩌고……."
황룡은 유달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다.
"여기서 출발해서, 저기 보이는 조폭 두목이 있는 곳까지 한 방에 가는 거지요. 사소한 실수가 있더라도 멈추지 말고 계속 달리세요."
"알겠습니다. 한 방은 제 전공이지요."
"그럼, 준비됐나요?"
"아직이요."
황룡은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문제이신지……."
"미란 씨 좀 불러 주십시오. 긴히 할 말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황룡이 서둘러 떠나고, 장미란이 다가왔다.
"왜 저를 불렀나요?"
"아까 말한 그놈이 누굽니까? FBI 부서 전체를 농락했다는 놈이요. 저는 궁금한 건 못 참습니다.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촬영을 망칠지도 모릅니다."
장미란은 그러고도 남을 성격임을 잘 알았다.
"자칼이란 놈이에요."
"뭐가 킬러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이름인데요?"
"맞아요. 아직 그 정체조차 밝혀지지 않은 전설적인 히트맨이에요. 제가 수사해서 잡을 기회가 있었는데, 결국은 놓치고 말았죠."
"그리 유명한 거물급 킬러가 왜 찬일이를 노릴까요?"
"자세한 얘기는 촬영 끝나고 하죠. 만약 촬영 망치면 뒷얘기는 못 들을 줄 아세요."
"저는 다루는 방법을 확실히 마스터하셨군요. 역대급 액션 신을 만들겠다는 의욕이 활활 타오릅니다,"
"다치지 말고, 파이팅이에요."
장미란이 물러가자,
번쩍!
유달은 손을 높이 들어 준비됐다는 사인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