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모두가 의심스럽다
영화 촬영은 야외 세트장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장미란과 유달은 촬영 스텝과 주·조연 배우들이 모여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유달은 매의 눈으로 사방을 관찰했다.
"대체 그놈이 어디에 숨어 있을까요. 스텝이나 단역 배우로 위장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요?"
"고개 좀 그만 내둘러요. 눈에 띄는 행동 해서 좋은 건 없어요."
그는 장미란의 충고를 바로 따랐다.
"알겠습니다. 평소 모드로 전환하겠습니다. 그런데 찬일이는 이 영화에서 어떤 역할입니까?"
"타임슬립한 고려 무사들의 대장 역이에요."
유달은 기대에 찬 음성으로 물었다.
"남자 주인공입니까?"
"아니요, 조연이긴 한데, 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고 해요."
"비중이 아무리 높아도 조연은 조연일 뿐. 이러니 현아 님 팬들의 성에 찰 리 있겠습니까. 물론 찬일이가 노력하고 있다는 건 아는데… 뭐, 그렇다는 겁니다."
이동용 트레일러 앞에는 조연급 이상 배우들을 위한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모자를 쓰고 있는 정찬일의 매니저가 보였다.
그녀는 일당백이다. 정찬일의 일정 관리와 잡심부름은 물론, 코디네이터 역할까지 겸했다.
오늘은 특히나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매의 눈으로 이리저리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천막으로 다가오는 유달과 장미란을 발견하고는 반색하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랜만이네. 이름이……."
툭.
장미란은 유달의 옆구리를 치며 매니저에게 인사했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미연 씨."
"네, 장 팀장님도 안녕하셨어요."
"아, 맞다… 허미연, 일당백의 전사이자, 우리 굿 카페의 스카우트 대상 1호."
그녀의 진가는 카페에서도 증명되었다.
정찬일이 굿 카페에서 일일 알바를 하던 날.
몰려드는 손님 때문에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그녀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인사를 마친 허미연이 착 깔린 음성으로 물었다.
"혹시 그거 때문에 오셨어요?"
유달은 무슨 말인지 척 알아들었다.
"맞아, 그거 때문에 왔어. 아무 이상 없지?"
"열심히 살피기는 하는데, 모르겠어요. 협박범이 스텝이나 단역 배우로 위장할 수도 있잖아요?"
유달은 장미란에게 들었던 충고를 그대로 따라 했다.
"어이, 고개 좀 그만 내둘러. 눈에 띄는 행동 해서 좋은 건 없다니까?"
"죄송합니다, 선생님. 이러지 않으면 긴장감을 떨쳐 낼 수 없어요. 어디선가 협박범이 불쑥 나타나 찬일이 오빠를 해칠 것만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왔잖아. 미란 씨가 FBI였던 건 알지? 이제 긴장 끝, 안심 시작이야."
"맞아요, 선생님. 두 분을 보는 순간, 안도의 기운이 확 밀려왔어요."
"매우 당연한 현상이지."
이어 유달이 천막 안을 살피며 물었다.
"그런데 찬일이는 어디 있어?"
"화장실 갔습니다."
"혼자?"
"아니요, 대표님이 고용한 경호원과 함께요. 오늘은 찬일이 오빠가 어딜 가든 같이 다니기로 했어요."
"그렇다면 다행… 잠깐만!"
안도하던 유달이 정색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에 허미연은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왜, 왜요? 선생님."
"그 경호원을 어떻게 믿지? 만약 그놈이 협박범이면 단둘이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거잖아? 시원하게 볼일을 보는 찬일은 완전 무방비 상태. 그놈이 감춰 두었던 흉기로 찬일이의 머리를……."
"으아악!"
허미연은 지레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서,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그 경호원은 대표님이 직접 선발했어요. 실력도 뛰어나고, 확실히 믿을 수 있다고 했다고요."
"진짜 경호원은 온몸이 묶여 차량 트렁크에 갇혀 있을 수도 있어. 협박범이 프로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아무래도 안 되겠어. 화장실이 어디야?"
"저, 저쪽이요!"
허미연이 낡은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그때.
절묘하게 화장실이 있는 건물에서 나오는 정찬일의 모습이 보였다.
"으아악!"
이번에는 유달이 비명을 질렀다.
정찬일의 머리가 피범벅이기 때문이다.
"내가 저럴 줄 알았어! 빨리 119 불러!"
놀라서 흥분하는 유달을 허미연이 진정시켰다.
"괜찮아요, 선생님. 저거… 특수 분장한 거예요."
"정말?"
"네,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과 똑같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유달이 뻘쭘하여 뒷말을 흐렸다.
곧이어 장미란과 유달의 모습을 발견한 정찬일이 서둘러 달려왔다.
"선생님, 장 팀장님,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유달이 대답했다.
"그냥 이쪽이 일이 있어서. 그런데 얼굴하고 머리, 확실히 분장한 거 맞지."
"네, 그런데요?"
"우와, 정말로 실감나네… 진짜로 다친 것보다 더 진짜 같아?"
유달은 신기한 듯 특수 분장한 상태를 살폈다.
정찬일이 집히는 게 있어 물었다.
"혹시 그거 때문에 오셨습니까?"
유달은 특유의 얼버무리기로 대꾸했다.
"뭐, 겸사겸사… 결혼식 준비는 잘 되어 가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곧 새신랑 될 사람이 다치면 안 되잖아."
"매번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그러게, 언제쯤 주연 꿰차고, 한류 스타로 거듭나 현아 님과 걸맞다는 평가를 받을까?"
"노력하겠습니다."
정찬일이 면목 없어 고개 숙이는 때다.
뚜벅뚜벅.
훤칠하게 키가 큰 사내가 정찬일에게 다가왔다.
"벌써 분장 끝냈나 보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정찬일은 깍듯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러나 인사를 받는 선배 배우는 뭔가 못마땅한 기색이 느껴졌다.
"너 때문에 촬영장 분위기 싸한 거 알지? 제발 부상당하지 않게 조심 좀 하자. 의지가 있으면 다치지도 않아. 정신머리가 썩어 빠진 놈이 놈들이 꼭 사고를 치지."
"조심하겠습니다. 선배님."
그는 주변에서 다 들을 수 있게 중얼거리며 떠났다.
"나는 도대체 현아 씨의 생각을 할 수가 없네? 저런 놈의 어디가 좋다고……."
유달이 그의 뒷모습을 턱짓하며 허미연에게 물었다.
"저놈은 누구야? 되게 고압적인데?"
"정말 모르세요? 요즘 가장 잘나가는 배우잖아요.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고요."
"몰라."
유달 아는 연예인은 유명세와 비례하지 않는다.
오현아와 함께 출현했는지 아닌지에 달렸다. 고로, 그는 오현아와 함께 작품을 한 적이 없는 배우였다.
허미연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말했다.
"박상혁이란 모델 출신의 배우예요. 금수저 집안이고요. 오현아 배우를 좋아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유독 찬일이 오빠에게만 쌀쌀맞게 굴어요."
"호~ 그렇단 말이지……."
유달이 장미란에게 고개 돌리며 말했다.
"저놈도 상당히 수상합니다. 질투심에 사로잡혀 못된 짓을 꾸밀 수도 있습니다."
"감정적이긴 해도 무모한 성격은 아니에요. 질투심 때문에 모든 걸 잃을 짓을 벌일 가능성은 희박한데요."
"일말의 가능성도 외면하면 안 됩니다. 은근히 재수 없는 게 만복이랑 똑같단 말이지요. 성도 똑같은 박 씨예요."
장미란은 그의 엉뚱한 추측에 동조하지 않았다.
"보다 논리적으로 협박범을 찾아보죠. 저는 영화 스텝과 배우들의 신상을 확보하여 의심스러운 인물을 추려 볼게요. 유달 씨는 팬클럽 기록을 조사하여 외로운 늑대 형의 극성팬을 조사해 주세요. 그리고 두 자료를 비교해 보죠."
"저희 팬클럽에 그런 미친놈은 없습니다."
"……."
장미란이 눈에 힘주고 노려보자, 유달은 이내 말을 바꿨다.
"혹시 모르니 조사는 해 보라 하겠습니다. 우리 개는 안 물어요, 우리 아이는 착해서 그런 짓 안 해요, 등의 우를 범하면 안 되겠죠."
장미란은 영화 관계자를 수소문하여 찾다가 유달에게 경고했다.
"최대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요."
유달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의자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장미란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바로 몸을 일으켰다.
* * *
유달은 어슬렁어슬렁 액션 배우들과 합을 맞추는 정찬일에게 다가갔다.
"폼 좋은데?"
정찬일이 검술 연습을 멈추고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선생님."
"그게 영화 찍을 때 쓰는 소품용 칼인가?"
"네, 그렇습니다."
유달이 관심을 보이자 정찬일은 자신의 모형 검을 넘겨주었다.
휙, 휙, 휙!
유달은 몇 번 휘둘러 보고 말했다.
"예상보다 더 가볍네?"
"진짜 쇠로 만든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건 격검용으로 제작되어 무척 단단합니다. 합이 어긋나면 크게 다치기도 합니다."
"응, 간만에 몸 좀 풀어 볼까… 찬일이, 들어와."
"예? 무슨 말씀이신지?"
"합 생각하며 칼질하면 골치 아프잖아. 마음껏 휘두르며 스트레스 좀 풀라고."
정천일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위험합니다, 선생님. 만약 다치기라도 하시면……."
"어허! 나 장난으로 이러는 거 아니야. 어서 들어와."
유달의 말은 그에게 지엄한 엄명이다.
"네, 그럼……."
정찬일은 동료에게 검을 받아 앞으로 나섰다.
유달의 탁월한 운동 능력은 그도 알고 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지만, 정찬일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유달의 깝죽거리는 모습 때문이다.
"어서 들어와. 어서, 어서, 어서……."
그는 현란한 스텝을 밟으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말로는 형용 못 할 경박스러움이다.
"자,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정찬일은 공격 예고를 하고 검을 휘둘렀다.
사악.
그는 당연히 있는 힘을 다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너무 티 나게 늦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였는데, 휙.
헛손질이 나는 순간,
"!"
정찬일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유달의 모습이 마술처럼 사라진 것이다.
곧이어 그의 귓가에 속삭이는 유달의 말소리가 들렸다.
‘내가 협박범이면 너는 벌써 죽었어.’
정찬일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선생님, 어떻게 그런 움직임이 가능합니까?"
"내가 검술 천재니까 그렇지. 이제 마음껏 들어와."
정찬일은 사양치 않고 검을 휘둘렀다.
따딱. 따닥, 따다다닥.
모형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유달은 정찬일의 파상공세를 여유롭게 막아 내며 말했다.
"찬일이와 연습했던 분들도 들어오시지요."
그들은 사양치 않고 합세하여 유달을 공격했다.
호승심이 아니다.
뛰어난 고수에게 한 수 가르침을 받겠다는 자세다.
따따따따따따따…….
격검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합을 맞추지 않은 실전의 칼싸움이라 모여드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늘어났다.
* * *
서울 중심지의 동방 호텔.
박만복은 호텔 출입문에 스포츠카를 세웠다.
덜컹.
급히 문을 열고 내리자, 발레파킹 직원이 뛰어왔다.
그는 핸드폰 통화를 하며 자동차 키를 넘겨주었다.
"방금 도착했어."
그는 로비로 들어서며 백시연과 계속 통화했다.
"어제 내가 전화했더니 귀찮아하며 끊더라고. 목소리가 상당히 젊던데 어떤 여자야?"
-혜성 백화점의 막내딸이야. 제계에서는 철부지라고 소문났는데, 명품에 관해서는 그녀가 대한민국 최고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지. 연예계에도 관심이 많고, 오늘 사교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지. 여기로 끌고 오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박만복은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디로 가면 되지?"
백시연도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프레지텐셜 스위트룸에 나와 함께 있어. 그녀의 품위에 맞는 격식을 갖춰줘야 하거든.
박만복은 승강기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알았어, 곧 올라갈게."
-제발 빨리 좀 와 줄래? 나한테 노래 좀 해 달라는데, 지겨워 죽겠다고!
"엘리베이터 앞이야. 지금 바로……!"
스르륵.
박만복은 문이 열린 승강기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미안한데, 조금만 기다려 줘야겠어."
-무슨 소리야? 더 이상 부를 노래도 없다고?
"미안, 나중에 통화해."
박만복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승강기에서 내리는 한복을 입은 여인에게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이모님……."
"만복이 너도 신수가 좋아 보이는구나.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고?"
조금순은 복잡한 심경의 눈빛으로 박만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