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판타지 액션
긁적긁적.
박만복은 연신 옆머리를 긁어 댔다.
"왜 깨진 거지… 아니, 어떻게 깨질 수 있지?"
봉인석은 하얀색의 주먹만 한 차돌이다.
그 단단함은 보통 돌에 견줄 바가 아니다. 공사장의 육중한 해머로도 쉽게 깨트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봉인석이 정확히 반으로 갈려 있는 상태였다.
"진짜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힘들게 구한 한 맺힌 백골은 어디로 사라진 것이고."
긁적긁적…….
옆머리는 긁는 손길이 격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
그러다 번뜩 생각난 듯,
박만복은 양복 안주머니로 급히 손을 집어넣어 작은 거울과 빗을 꺼냈다.
"한번 몸에 밴 습관은 고치기 힘들군."
그는 정성스럽게 빗질하여 흐트러진 옆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러고는 플래시 불빛을 거두고,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텅 빈 구덩이를 계속 노려본다고 사라진 백골이 다시 돌아올 리 없다. 산짐승이나 들개의 소행은 아니고, 누군가 백골을 수습해 간 것이 분명했다.
"잔소리 좀 듣겠는데."
방치된 낚시터 부근에 4륜 차량이 세워져 있다.
억대의 최고급 외제 차량이다.
박만복은 차에 오르기 전에 백시연에게 전화했다.
-어떻게 됐어?
그녀는 다급한 음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뭔가 일이 꼬인 것 같아. 봉인석은 깨져 있고, 백골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아."
-차돌보다 단단한 게 어떻게 깨질 수 있지? 그리고 백골은 왜 사라진 건데? 다시 살아나서 걸어 나왔을 리 없잖아. 우리가 얼마나 공들여 준비했던 건데!
"그래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달이 놈이 저수지에서 마물로 변한 원혼들하고 싸웠었지?"
-맞아, 정화도 안 되는 놈들과 맨주먹으로 붙었어. 나는 제대로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소멸이 아니라 원귀로 다시 되돌렸다니까?
박만복은 차량 문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자세히 다시 말해 봐."
-뭐야? 그때는 짜증 내듯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더니… 아! 내가 만복이가 누구냐고 물어서 그랬구나?
"쓸데없이 시간 낭비할 거야? 그 백골을 찾지 못하면 대마신의 행방도 알 수 없어."
-알았어. 내가 본대로 그대로 이야기할게. 처음에는 유달 사장이 비명 지르며 나가떨어졌지…….
백시연은 그날이 대결을 중계하듯 세세하게 설명했다.
박만복은 그녀의 말을 차분히 다 듣고 읊조리듯 말했다.
"맨 마지막의 일격이 문제였군. 달이의 몸신이 화를 낸 것이면 그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겠지. 대마신이 만들어 낸 혼란의 기운을 한 방에 날려 버릴 정도였으니까. 그 때문에 내 봉인석이 깨진 건가?"
-나는 유달 사장의 몸신을 본 적이 있어. 사람의 형상 같기는 한데, 기괴하고 섬뜩한 느낌이었다고.
"지금 그 얘기는 필요 없고. 그때 봉인석이 깨졌다면 보통 사람이 백골을 발견할 수 있었어. 달이와 마물들의 싸움이 끝나고, 경찰들이 출동해서 저수지에 파묻혔던 시체들을 수거했지?"
-맞아. 경찰 사이렌이 울려서 나도 자리를 피했어. 자세한 건 뉴스를 통해서 들었어.
"맨 처음 일이 꼬인 건 이곳이 폭력 조직의 시체 유기 장소라는 거였어."
백시연은 박만복을 책망하는 목소리다.
-그러게 내가 잘 좀 알아보자고 했잖아? 원귀들의 상태가 이상했다니까?
"미리 알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어. 이곳이 가장 음기가 강한 장소였어. 그런데 경찰이 발표에선 우리가 묻은 백골을 수거했다는 언급이 없었잖아?"
-꼼꼼히 몇 번이나 확인했다고. 혹시 몰라서. 그때 기사를 검색 중인데…….
잠시 끊어졌던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경찰은 14구의 시신을 수습하여 국과수로 보냈다고 했어. 그중에는 백골 상태의 십 대 소녀도 포함되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어렵게 구해서 묻은 뼈는 마흔도 넘은 여자 아닌가?
"그렇지. 200년 전 대무당의 신력을 뛰어넘는 무당이었고, 억울하게 죽었을 때의 나이가 그 정도였을 거야."
-그렇다면 국과수에서 가져간 게 아닌데? 이상하게 백골 상태라는 게 거슬리네… 아니겠지? 국과수에서 뼈의 나이를 잘못 발표할 리 없잖아.
박만복은 침통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국과수가 정확하면 우리가 틀렸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너나 나나, 뼈를 보고 몇 살 때 죽었는지 알 수 있어?"
-그럼, 그때 도굴꾼이 우리를 속였다는 뜻이야?
"아니, 그자는 우리가 말해 준 무덤을 파헤친 것뿐이야. 다른 유골과 바꿀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바꿔서 이득 될 게 없었어."
-그럼 뭐가 잘못된 거냐고?
"우리가 무덤을 잘못 찾았거나. 제대로 찾기는 했는데, 그곳에 다른 사람이 묻혀 있었던 거지."
백시연의 목소리가 짜증스럽게 변했다.
-아, 진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네? 그러면 우리가 그동안 공들여서 엉뚱한 짓을 했다는 거잖아. 황당하고 기운 빠지는 건 둘째 치고, 조직에는 어떻게 보고하냐고?
"우선은 모든 인맥 동원해서 국과수에서 가져간 백골을 어떻게 했는지 알아봐. 그리고 조직에는… 조만간 성과를 보고하겠다고 전해."
-나보고 거짓말을 하라는 거야?
"성과는 내면 거짓말이 아니지. 대마신이 현신한 인간은 내가 가장 먼저 찾게 될 거야."
-제발 그러기를 바랄게. 진심으로!
덜컹.
박만복이 차량 문을 열고 물었다.
"혹시 여자 명품에 대해 잘 아는 사람 있어?"
백시연은 잠시 뜸 들이다 대답했다.
-있어…….
탐탁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가르쳐 주는 기색이다.
그녀가 모른다고 하면 다른 사람을 통해 알아볼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에 사는지 나한테 문자 보네. 약속까지 잡아 주면 더욱 좋고."
박만복은 차에 올라 서둘러 저수지를 떠났다.
* * *
굿 카페의 분위기가 변했다.
사장과 매니저를 포함한 직원들의 마음가짐이 하룻밤에 달라졌다.
더 성심껏 친절히 손님을 응대함은 물론, 자기 계발에도 힘을 쏟았다.
강성호가 평소보다 일찍 퇴근 준비를 하고 나왔다.
"사장님, 들어가겠습니다."
"어디 들른다고 했지?"
"제가 예전에 일하던 커피 전문점이요. 거기 사장님이 유명한 바리스타입니다. 제가 도움을 청했더니 흔쾌히 오라고 하셨어요."
"나중에 우리 카페 한번 오시라고 전해. 내가 스페셜로 사주 관상 봐 드린다고."
"알겠습니다. 들어온 메뉴는 다 처리했고요. 손님이 뜸해질 시간이라 주방 보조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 네가 수고가 많다. 파이팅!"
송보름과 신소미도 박 카페 타도의 의지를 다졌다.
"언니, 우리는 그쪽한테 외모하고 유명세 모두 안 돼요. 결국은 점 보는 실력으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뭔가 특색이 있어야 하니까, 싸가지 컨셉으로 밀고 나갈까요?"
"그게 뭔데?"
"반말로 독설 날리며 점 보는 거죠. 가끔은 욕도 섞고요. 손님들에게 강력한 이미지를 심어 주는 거예요."
"글쎄, 여기가 전문적인 점집도 아니고, 가벼운 마음으로 점 보는 손님들이 많잖아. 좋은 기분으로 왔다가 불쾌해하지 않을까? 게다가 너는 고등학생 나이고, 나는 경찰인데."
"그런가요……."
유달은 매니저 사무실로 들어갔다.
장미란은 컴퓨터 모니터를 살피고 있었다.
"뭐 하십니까?"
그녀는 자판에서 손을 떼며 대답했다.
"잡지사에 넘겨줄 광고 시안을 살피고 있어요.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는 제 후배가 기본적인 시안을 보내왔거든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잠시 머리 좀 식히러요. 번아웃 증세가 왔습니다."
장미란은 유달 쪽으로 회전의자를 돌렸다.
"무엇이 그리 유달 씨를 골치 아프게 만들까요? 박 카페의 도전 때문인가요?"
"그것도 중요한 일부를 차지하죠. 제 머리 용량으로는 감당이 안 되게 문젯거리가 쌓였습니다. 벌여 놓은 건 많고, 해결되는 건 없으니, 머리가 매우 복잡합니다."
장미란이 고민 상담을 들어 주듯 말했다.
"저도 그런 경우가 많아요. 조언을 드리자면, 그 문제들의 우선순위를 중요도로 나눠 봐요."
"저에게 가장 중요한 건 현아의 행복한 결혼식입니다. 그래야 저의 죄책감이 조금은 덜어질 것 같습니다."
"그것을 위해 팬클럽의 핵심 간부들을 소집했는데, 아무 성과도 없었고요."
유달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픈 모양이다.
"아~ 그 얘기는 꺼내지도 마십시오. 일치단결해도 모자랄 판에 서로 싸우고 난리입니다. 제 몸신까지 현신시켰는데 소용없었어요. 이래서 언제 남북통일이 되며……."
장미란이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끊었다.
"두 번째 순위는요?"
"그야 당연히 만복의 놈의 도전이지요. 제가 어떻게 이 카페를 지켰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이는 무명 가수가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고 고생하다가, 대박을 친 경우라 할 수 있지요. 이제야 빛을 보나 하는데, 예전 배신자가 툭 튀어나와 저를 저격하는 상황이지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놈한테는 절대 안 집니다."
"그리고 또 있나요?"
"세 번째는 버킷리스트 소원입니다. 아직도 마지막에 무엇을 빌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마지막은 대마신에 관한 겁니다."
장미란이 의아한 듯 물었다.
"유달 씨는 대마신에 관해선 어느 쪽도 편들지 않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나요?"
"저도 무당입니다. 그것도 대무당의 적손이지요. 말은 그리했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 순 없지요. 이 모든 걸 한 방에 해결하려니 골치가 너무 아프군요. 모두 엮어서 손쉽게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요?"
장미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미소를 지었다.
"너무 큰 욕심을 부리니 머리가 아픈 거네요. 중요도와 시급함을 고려하여 차근차근 풀어 가면 되겠네요."
"어느 세월에 하나하나 풀어 갑니까? 한 방으로 깔끔히 끝내고, 편안히 내 인생 살아야지요."
"가능성 없는 욕심은 버리고요. 저와 함께 시급한 문제부터 차근차근 풀어 볼까요. 우선은 이것부터 봐 주세요."
"뭔데요?"
유달은 장미란이 건네는 두 장의 컬러 프린터 인쇄물을 받았다.
"잡지사에 보낼 광고 시안이요. 하나는 우리 카페의 고급스러움을 강조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주 카페임을 강조한 거예요. 어느 게 나은 것 같아요."
"저는 둘 다 좋은데요……."
"한 가지만 고르세요."
"그럼 저는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유달은 사주 카페임을 강조한 시안을 선택했다.
"좋아요, 우선은 중요도는 낮으나, 시급한 것 한 가지를 끝냈고요. 그다음에는 정찬일 씨를 협박한 용의자를 찾죠. 매우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헐, 어떻게 아셨습니까? 미란 씨에겐 일부러 말을 안 했는데요?"
"박 대표님에게 전화했어요. 거기 갔다 와서 계속 저기압이었잖아요. 일어나시죠!"
유달은 겉옷을 걸치는 장미란에게 물었다.
"어디 가게요?"
"정찬일 씨의 영화 촬영장이요."
"이 시간에 거기는 왜요?"
장미란은 겉옷을 다 입고 대답했다.
"담당 형사하고도 통화했어요. 단순 협박범인지 프로인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후자라면 정찬일 씨를 다시 노릴 거예요. 오늘 촬영이 고도의 액션 신이라고 하네요. 진짜 프로라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겠지요?"
"미란 씨에게 상담하길 잘한 것 같습니다. 벌써부터 머리가 맑아짐이 느껴집니다."
"빨리 따라와요. 그렇게 나사 빠진 표정 짓지 말고요."
* * *
경기도 가평의 액션 촬영 현장.
장미란과 유달은 촬영 준비 중인 배우들 사이를 걸었다.
수많은 사람이 검을 휘두르며 연습 중이다.
유달은 호기심과 의아함이 반반인 표정이었다.
"양복 입은 사내들이 왜 검을 들고 싸우지요?"
"정찬일 씨가 출연한 영화는 판타지 액션물이에요. 고려 시대의 무사가 타임 슬립하여 조폭들과 싸우는 게 주된 내용이래요."
"호~ 칼질이 아주 현란한데요?"
장미란은 유달의 칭찬이 의아하다는 반응이다.
"매우 의외네요? 유달 씨는 검술에 일가견이 있잖아요. 저게 뭐냐고 하면서 트집 잡을 줄 알았는데."
"분야가 다르죠. 저건 합이 잘 맞아야 하는 겁니다. 연습을 무지하게 한 거지요. 반면 저는 실전 검술이라 무조건 이기는 게 목적이고요."
"실전 검술 고수의 여유인가요?"
"뭐, 그렇다고도 볼 수 있죠. 그나저나 사방에서 칼 들고 설치고, 와이어 액션에 총도 쏘는 것 같은데, 이러면 프로 킬러에게 기회를 퍼 주는 거 아닙니까?"
"박 대표님은 보디가드를 고용하고, 스턴트 안전에도 만전을 기했다고 하네요. 우선은 정찬일 씨부터 만나러 갈까요?"
"그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