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전쟁의 서막
배우 오현아의 팬클럽 ‘현아사랑’은 오랜 역사와 전통, 그리고 하나로 똘똘 뭉치는 단결력을 자랑했다.
굿 카페 VIP 룸에 모인 7명은 그 핵심 인물들.
오현아의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성공만 바라고 활동했던 전우 같은 존재다.
한류스타로 대박 났던 영광과 음이탈 제조기란 오명.
늘지 않는 노래 실력 때문에 엄청나게 욕먹었던 걸그룹의 흑역사도 함께했다.
그리고 수호기사단의 직위는 상징일뿐.
‘7인 협의체’라 실질적인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팬클럽의 창업 공신인 블랙엔젤과 유달에게 단장과 부단장의 형식적인 직위가 주어졌고, 나머지 다섯 기사는 색으로 구분했다.
패기의 청기사 토네이도가 약수를 청하며 다가갔다.
"드디어 단장님을 뵙게 되다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찰싹.
유달은 잽싸게 청기사의 손등을 내리쳤다.
"터치 금지. 병균 옮아."
청기사는 자신의 손등을 매만지며 불만을 토했다.
"부단장님 너무 하시네요. 반가운 마음에 악수를 청한 건데 병균 옮다니요? 이러면 단장님이 저를 지저분한 놈으로 알 것 아닙니까."
다른 기사들도 너무한 처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유달은 블랙엔젤 옆에 바싹 붙어서서 말했다.
"단장님께서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거야. 희귀 질환을 앓고 있어서 타인과의 접촉은 피해야 한다고. 까닥 잘못하면 병원에 실려 갈 수도 있다고."
"혹! 정말이요? 저는 진짜 몰랐어요."
"괜찮아, 이제부터 주의해."
유달은 블랙엔절이 다른 기사들과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게 미리 보호막을 쳤다.
수호기사단은 부단장이 왜 과격한 행동을 하고, 단장은 왜 그동안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지 스스로 이해하는 분위기다.
연륜의 흑기사 ‘몽테’가 블랙엔젤에게 물었다.
"무슨 안건으로 갑자기 긴급 회의를 소집한 겁니까? 우리야 단장님의 실제 모습을 봐서 좋기는 합니다만."
블랙엔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제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동안 활동을 하지 못 했어요. 다른 분들이 알아서 잘 해 주시니까, 저는 마음 놓고 치료에 전념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현아 님의 결혼 발표 이후, 큰 분란이 생겼다고 들었어요.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는……."
블랙엔젤이 차분히 말하는 동안 수호기사들은 서로 눈치의 눈치를 살폈다.
재빨리 분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방조하며 키우기까지 했던 게 그들이기 때문이다.
블랙엔젤의 목소리는 점차 간곡하게 변했다.
"…하지만 결혼은 전적으로 현아님이 결정할 문제에요.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거죠. 행복한 결혼식을 위해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뜻을 모아, 축하해 줘야 하지 않을까요?"
VIP 룸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곧바로 청기사가 총대 메듯 나섰다.
"저희도 그러고 싶지만, 축하할 마음이 들어야죠? 한류 스타인 현아님이 악역 전문 배우와 결혼이라니요? 우리는 그냥 스캔들로 끝날 줄 알았어요. 저는 인정 못 합니다."
냉철한 백기사 ‘헥토르’도 반대의 뜻을 분명하게 했다.
"저는 현아 님의 뜻을 존중합니다. 나이가 있으니 집안에서 결혼을 서두르긴 하겠죠. 하지만 한쪽으로 기울어진 결혼은 통계학적으로도 오래가지 못해요. 현아 님이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그린(green)나이트 안젤리나도 가세했다.
그녀는 원래는 녹(綠)기사로 불려야 했지만, 어감이 싫다며 혼자만 영어식 표현을 썼다. 팬클럽 결성 당시엔 가장 어린 나이였었다.
"제가 지금 팬클럽 회장이잖아요. 솔직히 쌍수 들고 환영하는 회원은 거의 없어요. 일방적으로 반대하는 분위기라고요. 수호기사단 역시도 마찬가지예요."
이어 그녀는 한층 힘주어 말을 이었다.
"청기사 오빠, 백기사 오빠, 흑기사 아저씨 그리고 저까지, 네 명이 모두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이고요. 적기사 언니는 유보, 부단장 아저씨 혼자만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어요."
유달이 발끈하여 말했다.
"야, 내가 왜 아직도 아저씨야? 흑기사 형님하고 동급으로 취급하지 마. 나는 오빠 쪽에 가깝다고?"
"싫어요. 부단장님은 오빠라고 부르면 이상할 것 같단 말이에요."
"뭐가 이상해? 예전이야 네가 고딩이었지만, 지금은 결혼해서 애 엄마 되었잖아?"
"그래도 싫어요."
"그럼 사장님이라고 불러."
"싫어요, 부단장 아저씨!"
긴급회의는 갑자기 호칭 문제로 어수선한 분위기다.
단장이 직접 나섰어도 그들의 뜻을 하나로 뭉치기에는 어려울 듯 보였다.
* * *
한편, 밖에서는 송보름이 이를 엿듣고 있었다.
VIP 룸에 귀를 붙이고 있는 그녀를 장미란이 봤다.
"뭐 하는 거야?"
"깜짝이야! 놀랐잖아요… 매니저 언니."
"남의 말을 함부로 엿들으면 안 되지."
"별로 많이 못 들어요. 무슨 이야기를 하나 했는데, 오빠, 아저씨 하며 말싸움하고 있어요."
"이리 와."
장미란은 송보름을 계산대 쪽으로 끌고 갔다.
송보름은 VIP 룸을 턱짓하며 한심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 사장님 정말 대책 없네요. 대마신이 깨어났는데, 팬클럽과 노닥거리고 있다니요. 대체 뭐 때문에 몸신까지 현신하게 만든 거예요?"
"나도 몰라. 아까 통화할 때, 내가 도와줄 건 없는지 물어봤지. 유달 씨는 외부 도움 없이 자신들이 직접 알아서 해결할 거라고 하더라고."
"정말 팔자 좋으시네……."
장미란이 기회라 싶어 물었다.
"대마신은 대체 어떤 존재야? 보통 사람들은 그 존재도 모르는데, 영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세상이 끝장난 듯 반응하잖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송보름은 옆머리를 긁어 대며 고심했다.
그녀도 썩 머리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유달보다는 남을 이해시키는 능력이 나은 편이다.
송보름이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엄청난 힘을 가진 존재가 사람의 모습으로 현신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을 좋아하지 않아서 멸망시키려 하는 습성이 있어요."
"그래서 영기를 가진 사람들이 대마신을 없애려고 하는구나. 하지만 대마신을 추종하는 세력도 있는 것 같던데, 그놈들이 아주 나쁜 놈인 거네?"
"아니요, 꼭 그렇다고는 볼 수 없어요. 그들은 인간이 타락했기에 대마신이 재림한다고 생각해요. 대마신이 사람들을 해치는 건 당연한 벌이라고 여기고요."
"당연하게 죽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대마신과 싸우면 외려 그 피해가 더 커진다는 거죠. 실제로도 그런 역사가 있었고요. 대마신은 뜻을 이루면 스스로 떠날 것이니, 차라리 방해하지 말자는 것이죠.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라고는 할 수 있을까요?"
장미란은 잠시 생각하고 물었다.
"어쨌든 대마신은 인간에게 재앙을 가져오는 존재잖아.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알려서 함께 대처하면 되잖아. 약간의 군대를 동원해도 쉽게 물리칠 것 같은데?"
"노, 노, 노, 노, 노!"
송보름은 유달을 흉내 내듯, 손가락과 고개를 동시에 흔들었다.
"영적인 능력이 없는 보통 인간은 대마신을 상대할 수 없어요. 대마신은 사람을 조종하는 능력이 있어요. 만약 총으로 대마신에게 대항하면, 그 총으로 자신이 당하게 되고요, 핵폭탄을 동원하면 그 핵폭탄으로 당하게 된단 말이지요."
"대마신의 능력이 정말 그 정도야?"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이상이에요. 그러니까 보통 사람은 절대 대마신과의 싸움에 끼어들면 안 돼요."
"나는 아직도 이해를 못 하겠는 게… 대마신의 재림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
"맞아요. 몇 번이나 재림해서 세상을 뒤집어 놓았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대마신이 재림할 때마다 보통 난리가 아니었을 텐데,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거지? 어쩌면 1·2차 세계 전쟁보다 인류에게 더 위험한 상황이었잖아."
"대마신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지요."
이는 유달이 했던 대답과 똑같았다.
장미란은 표정을 부드럽게 하며 물었다.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줄 수 있겠니?"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영적인 사람들의 리그예요. 대마신이 어떤 식으로 세상을 떠나든, 보통 사람은 그와 관계된 기억을 모두 잃어버려요. 영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만 기억하죠."
"……."
송보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장미란은 기색을 살피며 물었다.
"어째… 더 모르겠다는 표정이에요? 저는 최선을 다해서 설명했는데."
"아니, 이해는 하겠는데, 믿기지 않아서."
"매니저 언니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방금 말했지만, 이건 영적인 사람들의 리그에요. 대마신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만 치열하죠. 아마도 전 세계 무당들이 대한민국으로 본격적으로 몰려들고 있을 거예요. 이런 상황에 우리 사장님은 연예인 팬클럽에 목숨 걸고 있지요."
송보름의 시선이 VIP 룸으로 향하는 때다.
덜컹!
거칠게 문을 열고, 유달이 나왔다.
그는 답답함을 금치 못하겠다는 듯 소리쳤다.
"우와~ 이러니까 남북통일이 안 되지! 뭔 놈의 의견이 통일이 안 돼? 이야~ 진짜 대마신하고 맞짱 뜨는 게 낫지. 속 터져서 미치겠네."
장미란이 그 모습을 보며 송보름에게 물었다.
"유달 씨는 대마신을 별로 신경 쓰지 않더라고. 그냥 허세는 아닌 것 같고… 유달 씨의 영적인 능력은 어느 정도인 거야?"
송보름은 장미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문제를 냈다.
"세계 정복을 가장 쉽게 하는 방법이 뭔지 알아요?"
"그게 뭔데?"
"대마신과 사장님이 손잡으면 돼요. 참 쉽죠?"
* * *
인천 국제 공항 입국장.
백시연은 박만복과 함께 유럽에서 도착한 비행기 승객들이 나오는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대마신의 재림이 확실히 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우르르 몰려나왔던 승객들이 뜸해져도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백시연은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또 이상한 거 들고 오다가 걸린 거 아니야?"
그녀가 속한 조직은 대마신을 추종하는 쪽이다.
세계 각지에서 뜻을 같이하는 영적 능력자들이 입국하는데, 그들이 사용하는 무구(巫具)가 문제다.
수정구나 지팡이 등의 평범한 것이 아닌, 도검 종류를 가지고 들어오다가 적발되는 경우가 있었다.
박만복은 별 관심 없는지 팔짱만 끼고 있다.
귀찮은 듯 그녀에게서 멀어지는 모습은 억지로 끌려 나온 티가 역력했다.
"나왔다!"
백시연이 손 흔들며 뛰어갔다.
그녀는 유창한 외국어로 금발의 중년 여자를 맞이했다.
대한민국은 처음이냐는 등의 환영 인사를 나누고는, 박만복에게도 소개해 주었다.
"마리아, 이쪽은 제임스 박이에요."
"오~ 소문은 익히 들었어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경지의 샤먼이라고요. 같은 편으로 싸우게 되어 힘이 나네요."
박만복은 미소짓는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왜 이 지랄을 하고 있지. 얼굴마담은 너 하나로 충분하지 않나?"
백시연은 직역하여 말하지 않았다.
"제임스도 함께 일하게 되어 영광이라고 하네요. 이쪽으로 오시죠."
그녀는 마리아 몰래 박만복에게 눈총 주고는, 출구 쪽으로 향했다.
입국장 밖에는 고급 밴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다.
"마리아, 먼저 타세요."
지이잉~ 툭.
차량 문이 닫히자, 백시연이 바로 쏘아붙였다.
"뭐야? 왜 그리 삐딱하게 나오는 거지. 조직이 공들인 일을 망치고 싶어?"
"그러니까 다음부터 날 부르지 마."
"누군 부르고 싶어서 불러? 조직에서 내려온 명령이니까 나도 어쩔 수 없잖아.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긴장 좀 해. 저기 안 보여?"
백시연은 박만복의 등 뒤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박만복이 고개 돌려 보니, 영적인 능력자들이 떼 지어 나오는 게 보였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부류이니 싸워야 할 적이다.
백시연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거야.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당하게 된다고."
하지만 박만복은 여전히 무신경했다.
"저런 놈들까지 신경 쓸 필요 있나. 그보다, 내가 부탁한 것은 어떻게 됐어?"
"지금 이 시국에 그게 중요해?"
"나한테는 조직 일보다 그 일이 더 중요해. 그러니까 절대 차질 생기게 하지 마."
백시연은 질렸다는 듯 머리채를 휘휘 흔들었다.
* * *
해방촌 인근, 운치가 느껴지는 골목길.
굿 카페 식구들이 잡담을 나누며 함께 걸었다.
유달과 송보름, 장미란, 강성호는 물론 신소미도 포함된 무리다.
특히나 송보름과 신소미는 어린아이처럼 신나 했다.
"언니, 언니, 여기는 예쁜 카페가 엄청 많아요?"
"나도 여기는 처음인데, 마음에 드는 카페가 진짜 많네. 나중에 시간 있을 때 꼭 오고 싶다."
들떠 있는 그녀들과 달리, 장미란과 나란히 걷는 유달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다.
"왜 우리가 다른 카페를 가고 있을까요?"
"백시연 씨가 초청한 거잖아요? 굿 카페 식구들에게 근사한 곳에서 대접하고 싶다고요. 오늘이 마침 카페 휴일이라 다 같이 가는 중이고요."
"저는 그게 수상하단 말입니다. 내가 그동안 한 짓을 생각하면 근사한 곳에서 대접받을 리 없거든요. 만나기로 한 카페 이름이 뭐죠?"
"박 카페요."
"가게 이름도 뭔가 수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수상할 게 있어요. 카페 이름이 거기서 거기죠. 거의 다 왔어요… 바로 저기네요."
"헐! 내가 저럴 줄 알았습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한 순간, 유달은 경기를 일으키는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박 카페 입구엔 거대한 오픈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사주 카페
"이건… 초청이 아니라 도발 아닙니까?"
"……."
장미란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녀도 만나는 장소가 사주 카페일 줄은 몰랐다.
유달은 누구의 짓인지 눈치채고 이를 갈았다.
"만복이, 이 자식… 저한테 선전 포고 날린 겁니다. 굿 카페를 짓밟아 버리겠다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