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가장 위험한 존재
굿 카페의 구석 자리.
박만복과 송보름은 원목 느낌을 살린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다.
재미 삼아 점을 보는 분위기가 아니다.
패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바둑 대국을 보는 듯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박만복은 입신(入神)의 경지라는 9단이다.
하지만 9단에도 등급이 있으니,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전설의 경지였다.
이에 반해 송보름은 프로 초단이라 할 수 있는 수졸(守拙)의 실력이다.
절정의 고수에게 가르침을 받은 무서운 신인이었지만 상대는 너무 막강했다.
송보름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자신의 모든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려 사주·관상 풀이를 하고 입을 열었다.
"박만복 씨는 반왕(反王)의 운명을 타고났군요."
"반왕? 그게 뭐지? 게임에서나 쓰는 말 같은데."
"저의 사부님은 전통적 표현에 얽매이지 않고 현대적인 언어를 구사하지요. 더 풀어서 말하면, 역모(逆謀)의 사주라고 하겠네요. 박만복 씨가 조선 시대에 태어났으면 삼족(三族)이 몰살당할 수도 있었어요."
"재미있군. 계속해 봐."
"이는 또 살리에르 팔자라고 할 수 있지요. 살리에르가 누군지를 알겠지요? 박만복 씨."
"모차르트를 질투했던 음악가 아닌가?"
"맞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최정상이 되지 못하지요. 박만복 씨는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영원히 이인자에 머무른다는 의미지요."
송보름은 잠시 박만복의 눈치를 살폈다.
악담에 가까운 사주 풀이를 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박만복은 심기가 불편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듣기에 거북한 부분이 있군."
"박만복 씨가 기분 나빠도 어쩔 수 없어요. 저는 손님의 비위를 맞추려 거짓으로 점괘를 말하지 않았다. 제가 사주 풀이한 그대로 말했을 뿐이에요."
"나는 사주 풀이에 불만 있는 게 아니야. 완벽하진 않아도 얼추 비슷하게는 맞춘 것 같으니까."
"그럼 뭐가 문젠데요?"
"내가 사주를 보는 것이라 본명을 썼는데, 놀림을 많이 받았던 이름이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제임스 박이라고 불러 줬으면 좋겠는데?"
"싫습니다. 박만복 씨! 저는 계속 박만복이라고 부를 거예요. 박만복 씨!"
송보름은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다.
만약 진짜 손님이었다면 바로 호칭을 바꿨을 것이다.
그를 손님이 아닌 적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박만복은 괜한 분란을 원하지 않았다.
"알았으니, 사주 풀이나 계속하지?"
"끝이에요."
"……."
그는 어이없어했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의 적대적인 반응은 각오한 모습이었다.
"8천 원의 값은 한 것 같군."
좋게 넘어가려는 그에게 송보름이 말했다.
"이번에는 박만복 씨가 저를 봐 주시죠."
"점을 봐 달라는 건가?"
"네, 그래요. 영적인 능력이 대단하신 것 같은데, 얼마나 점을 잘 보는지 궁금하네요."
박만복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쳐다보는 그에게 송보름이 도발하여 말했다.
"왜요? 자신 없어요? 아니면 우리 사장님처럼 동종업계 사람들은 안 보는 거예요?"
"나는 점을 보면서 사람 가리지 않아. 다만 내 점 값이 매우 비싸. 그 금액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점을 봐 주거든."
"내가 점 본 걸로 퉁쳐요"
그러면 8천 원이다.
박만복은 점을 봤던 역사상 최저의 금액을 받아들였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그렇게 하지."
"이름하고 사주 적어 드려요?"
"아니, 그냥 이름만 말해. 내가 당돌한 그쪽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서."
"송보름이요. 사장님과 똑같이 한글 이름이에요. 둘이 합치면 보름달이 되지요."
입장이 뒤바뀐 상황.
박만복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송보름 양은 부모덕을 타고났군."
"그리고요?"
"더는 없지. 여기까지가 퉁친 값이야."
"……."
송보름이 제대로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분한 마음을 삭이며 말했다.
"맞아요. 우리 아빠가 좀 대단해요.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 중에는 모르는 이가 없어요. 우리나라 뒷골목 경제에 군림하는 존재라고 할까요."
"난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
그녀는 박만복의 반응과 상관없이 말을 이었다.
"명동의 송 사장이 우리 아빠예요. 돈에 관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다고 알려졌지요."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이긴 하군."
"그리고 또 굿 카페에는 FBI 출신의 매니저 언니가 있어요. FBI가 어떤 곳인 줄은 알고 있죠? 그 언니는 광역 수사대 팀장까지 했어요. 경찰은 물론 검찰과의 인맥도 엄청나지요."
박만복은 송보름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런 말을 나한테 하는 거지?"
송보름은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우리 사장님 건드리면, 저하고 매니저 언니가 가만있지 않아요. 내가 어리다고 깔보는 것 같은데, 나중에 단단히 후회할 거예요."
"……."
"아빠의 사업체를 이어받아서 사장님 복수에 내 모든 인생 걸 거예요. 매니저 언니도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박만복 씨를 평생 쫓아다닐 것이고요,"
송보름이 바싹 얼굴을 들이밀고 말했지만, 씨알도 안 먹히는 위협이었다.
"달이 놈이 열성적인 직원들을 뒀군."
"농담으로 받아들지 말아요."
그녀가 앙칼지게 노려보며 대꾸하는 때다.
"커피 나왔습니다."
바리스타 강성호가 직접 가져왔다.
신소미가 박만복의 영적인 기운에 위축되어 그에게 부탁했기 때문이다.
"고맙……!"
반사적으로 고개 돌린 박만복이 흠칫하며 놀랐다.
송보름의 어떠한 위협에도 눈도 깜박하지 않은 그였다.
하지만 강성호의 얼굴을 본 순간, 할 말을 잃은 듯한 반응을 보였다.
강성호가 무안하여 말했다.
"왜 그러시죠?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아니, 어디선가 본 것 같아서……."
"제가 좀 흔한 인상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커피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만든 겁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강성호가 꾸벅 인사하고 물러갔다.
그의 인상이 흔할지 몰라도, 관상은 결단코 아니다.
"세상에 저리 불운한 관상이……."
박만복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고개까지 저었다.
이에 송보름이 우쭐하여 말했다.
"사주 보면 더 놀랄걸요? 박복함이 쩔어요."
"설마?"
믿을 수 없다는 그의 모습에, 송보름은 뭔가에 이겼다는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 * *
조용히 커피를 즐기는 박만복.
송보름과 신소미는 그를 곁눈질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리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절대 속지 마요. 저 인간은 사장님과 원수 사이에요."
"위원님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자세히는 모르는데요, 저 사람 때문에 사장님이 죽을 뻔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뒤로 사장님이 단단히 벼르고 있잖아요."
"그럼, 위원님께 전화해야 하지 않아?"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사장님은 박만복이란 이름만 들어도 혈압 올라가거든요. 오늘은 편히 쉴 수 있게, 내일 전화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송보름이 손에 든 휴대폰을 내려놓는 때다.
박만복이 커피를 다 마시고 일어났다.
그는 바로 계산대로 오지 않고 신당으로 향했다.
검은 커튼 앞에서 멈춰 선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안하다……."
짧게 사과를 마친 박만복이 카운터로 다가왔다.
신소미는 황급히 도망치듯 자리를 뜨고, 송보름은 전장을 지키는 장수처럼 당당하게 서서 기다렸다.
"얼마지?"
"점 보는 건 퉁쳤으니까, 커피값으로 만 원만 내세요. 메뉴에도 없는 특별 커피예요."
박만복은 카드를 꺼내려다 도로 넣었다.
그러고는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서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저는 만 원이라고 했는데요?"
"한 장은 커피값. 그만한 가치가 있는 맛이었어. 그리고 나머지는 바리스타에게 주는 팁. 내가 까다로운 입맛인데, 맛있게 잘 마셨다고 전해 줘."
정말 맛있었는지, 동정심인지는 알 수 없다.
계산을 끝낸 박만복이 송보름에게 물었다.
"내가 왜 달이를 해칠 거라 생각하는 거지?"
"전작이 있잖아요? 사장님은 박만복 씨를 아주 위험한 인간이라고 했어요. 언젠가 초대형 사고 칠 거라고요."
"그건 맞는 말이야. 하지만 달이가 그런 소리를 할 자격이 있을까? 위험도를 따지자면, 그놈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야."
"물귀신 작전 쓰지 마요."
"괜한 모함이 아니야. 달이는 이미 초대형 사고를 쳤어. 세상이 그걸 모르고 지나간 것뿐이지. 나는 그걸 막으려다 그놈과 원수 사이가 된 것이고. 영적인 능력이 있는 이들은 대마신만을 두려워하는데 어리석기 짝이 없지. 그보다 몇 배나 위험한 존재가 이미 활보하고 다니는데 말이야."
송보름의 인상이 구겨졌다.
"박만복 씨가 어떤 소리를 해도, 나는 무조건 사장님 편이에요."
"그건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 달이에게 전해 줘. 카페 새롭게 단장한 거 축하한다고."
박만복이 출입문으로 향했다.
딸랑딸랑.
그가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신소미가 송보름에게 다가왔다.
"저 사람은 위원님과 비슷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무슨 냄새요?"
"루시퍼 사건 때 명성고 체육관에서 났던 냄샌데. 위원님은 지옥의 냄새라고 그러더라고. 그 냄새가 아주 엷게 위원님과 저 사람에게 배어 있는 것 같아."
* * *
귀도에 있는 하늘교의 기도원.
유달과 장미란은 아침 10시경에 다시 찾아갔다.
어제처럼 문전 박대당하지는 않았다.
기도원의 관계자는 그들을 목회실로 안내했다.
유달은 기도원의 책임자가 오기를 기다리며 송보름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만복이가 찾아 왔다고?"
장미란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유달이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유달과 박만복이 어떤 관계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갑자기 유달의 목청이 높아졌다.
"뭐라고!"
장미란은 순간 긴장했는데, 별것 아니다.
"빈손으로 왔다고? 어이가 없네… 카페 새롭게 단장한 거 축하한다는 놈이 빈손? 알았어. 그놈에 대해선 너무 신경 쓰지 마. 여기 일 끝내고, 바로 올라갈게."
통화를 마친 그에게 장미란이 물었다.
"박만복이 어제 카페에 왔데요?"
"그렇다고 하네요. 빌어먹을 자식… 자기 죄를 알면 집을 팔아 와도 부족한데, 빈손으로 왔답니다. 아, 그리고 오해할까 봐서 미리 말씀드리는데요."
"네, 오해하지 않게 미리 말해 봐요."
박만복에 대한 말은 아니었다.
"제가 무당이라서 무조건 기독교를 배척하지는 않습니다. 저 고등학교 때 미션 스쿨 다녔습니다. 2학년 담임 선생님이 목사님이었지요. 이해심이 많고, 열정도 넘쳤던 분이라 지금도 존경하고 있습니다."
"누가 뭐래요?"
"제가 앞으로 하게 될 행동이 종교적 편향성이 없음을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장미란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걸 미리 말해 두는 거죠?"
"여차하면 제가 과격해질 수도 있습니다. 상식적인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이 되겠죠."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길 바라야지요."
유달은 집게손가락과 고개를 동시에 흔들었다.
"노, 노, 노. 노. 제 경험상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사이비 종교는 무서운 거 없어요. 종교 탄압 어쩌구 하면 공권력도 쩔쩔매며 맥을 못 춰요. 그러니까 여기도 경찰이 아닌 우리가 온 것 아닙니까?"
"맞아요. 압수 수색 영장을 신청했는데, 보기 좋게 거부당했어요."
"어제도 말씀드렸는데, 제가 사이비 종교 박살 전문가입니다. 여차하는 순간, 저한테 모든 걸 맡겨 주십시오."
"네, 그러지요."
유달과 장미란이 합의를 끝낼 때다.
끼이익.
목회실 문이 열리며, 기도원의 책임자가 들어왔다.
선한 인상에 뿔테 안경을 쓴 50대 목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