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버킷리스트
유달은 패닉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털썩.
허물어지듯 무릎 꿇고,
머리 위로 추켜올린 양손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내가 미쳤었나 봐! 어쩌자고 버킷리스트 치성을 드려 버렸지! 바로 취소했으면 되는데, 그걸 또 까먹고 있었어! 정말 이번 생은 꼬일 대로 꼬였구나!"
송보름도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유달의 등까지 때리며 책망하여 말했다.
"미쳤어요, 미쳤어! 아무리 술 취해도 할 짓이 있고, 안 할 짓이 있잖아요. 어쩌자고 목숨을 대가로 치성을 드리냐고요. 내가 속 터져 미치겠네요. 속 터져!"
"입이 열 개라고 할 말이 없다. 내가 왜 그런 미친 짓을 했지. 난 맞아 죽어도 싸… 더 때려줘! 더 세게 때려!"
송보름은 거부하지 않고 강하게 등을 때렸다.
짝~ 짝~!
"보, 보름아, 조그만 살살!"
"알았어요, 그럼 이 정도로……."
톡톡.
그들은 손님들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가학적인 행동을 이어 갔다.
장미란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다.
만류한다고 될 커플이 아니다.
그녀는 그들의 ‘생쇼’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우선은 자리에 앉지요? 손님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잖아요."
"그러지요."
유달과 송보름이 재빨리 소파에 앉았다.
이에 장미란이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는 짐작이 가네요. 유달 씨는 술에 취해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소원을 빌었고요. 되돌릴 기회가 있었지만 깜박해서 놓쳤으며, 이제 빌었던 그 소원들이 점차 이루어져 가는 거지요?"
송보름과 유달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는 사장님이 이리 멍청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지요."
"동감입니다. 저도 제가 이렇게 멍청할 줄은 몰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고, 그걸 또 까먹었습니다."
송보름이 답답함을 못 참고 따져 물었다.
"어떻게 그런 걸 여태까지 까먹을 수 있어요? 자기 목숨이 달린 일인데요? 사장님의 꽉 막힌 운이 풀렸을 때라도 눈치챘어야죠?"
"강원도 펜션에서 꼬마 선령이 말했다고. 자신을 도와주면 앞으로의 일이 쭉쭉 풀릴 거라고. 나는 그래서 그런 줄 알았지? 그 아이는 신령(神靈)에 가까웠단 말이야."
"신령은 단편적인 미래밖에 못 보잖아요. 사장님의 운이 트이는 건 느끼는데, 그것이 목숨을 건 대가인지는 모르는 거였죠. 그 신령도 이 정도로 멍청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거죠."
"내가 얼마나 속상했으면 그랬겠어? 네가 쫄딱 망해 가는 자영업자 사장의 마음을 알아? 나는 악마하고 거래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했다고!"
"차라리 악마와 거래를 했어야죠! 그랬으면 자폭하는 것보다 살아날 확률이 더 높았다고요."
"자폭이란 말은 쓰지 마. 무섭다고!"
"그러면, 이 멍청한 짓을 뭐라고 해요!"
장미란이 다툼을 말리며 끼어들었다.
"둘 다 그만하고요. 제가 궁금한 점을 물을게요. 유달 씨가 빌었던 소원들 말이에요. 만약 이 카페가 전처럼 파리 날리고, 그 세계여행 티켓을 다시 돌려주면 아무 문제 없는 거 아닌가요?"
유달이 한숨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지요. 벌써 이루어진 소원은 되돌린다고 어찔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낙장불입의 법칙이 적용되지요."
"그런데 소원은 대체 몇 가지나 빈 거예요?"
"술 취해서 자세한 기억이 없는데… 아마도 대여섯 가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송보름이 추가적인 설명을 했다.
"대부분은 한 가지 소원으로 끝나는데요, 사장님은 신기가 엄청나기 때문에 그 정도까지 할 수 있는 거예요."
"맞아. 내가 조금 대단하긴 하지?"
"그럼요, 신기로 따지면 사장님은 천하무적이지요."
"맞아, 맞아. 보름이, 너는 천하무적 신기를 가진 나의 첫 번째 제자인 셈이지. 여기가 강호였다면 벌써 무림을 평정했을 것인데. 강호불패검 유달, 악행을 일삼는 천마를 굴복시키고 지존의 위치에 오르도다."
"사장님, 저는 천하제일미 하고 싶어요!"
착각에 빠진 둘에게 장미란이 말했다.
"그리 신기가 뛰어나니, 소원이 다 이루어지면 죽는 것도 확실하겠네요."
"헐……."
유달은 이내 고개를 숙이며 조용해졌다.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정확히 말해봐요. 그래야 대책을 세우지요."
"확실히 기억나는 건, 굿 카페 대박 나는 거랑… 이모 세계 일주 여행시켜 주는 것하고, 현아가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는 거 그리고 또… 로또 당첨! 맞습니다. 로또 당첨되는 걸 빌었지요."
유달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아하! 이제야 방법을 찾았습니다. 제가 로또를 사지 않으면 됩니다. 로또를 사지 않으면 당첨될 일도 없고, 소원도 이루어지지 않는 겁니다. 제가 로또 중독증이 있지만 어쩌겠어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참아야지요. 목숨보다 소중한 건 없지 않습니까?"
송보름은 덩달아 반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유달을 불렀다.
"사장님?"
"왜?"
"로또에 대한 소원을 빌 때 말이에요. 정확하게 1등 당첨되게 해 달하고 했어요, 아니면 그냥 로또 당첨 되게 해 달라며 빌었어요?"
"그야 당연히……!"
생각 없이 대답하던 유달의 말문이 막혔다.
"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아! 내가 대체 어떻게 빌었지? 당연히 1등 되게 해 달라고 빌지 않았을까? 제발 그래야 하는데!"
"사장님, 이건 정말 중요하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만약 1등이란 조건이 없었다면 정말 끝장이라고요."
"왜 끝장인데?"
"사장님 저번 주에 로또 4등 당첨됐잖아요? 복권 판매점에서 당첨금 5만 원 받아도 되는 것을 굳이 농협 본사까지 갔었잖아요?"
"로또 4등은 나한텐 엄청난 의미야. 그동안은 5등도 한번 되지 않았다고. 로또 1등은 어떤지 기분 좀 내고 싶었는데, 그게 뭐가 잘못이야?"
"그러니까, 사장님이 정확히 로또 1등 빌지 않았으면 그 소원도 이루어진 거라고요."
"마, 맞아… 로또 4등도 당첨은 당첨이야……."
유달은 아주 사소한 실수로 엄청나게 큰돈을 날려 버린 반응이다.
장미란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지금 확실히 이루어진 소원은 두 개예요. 카페 대박하고 효도 여행. 로또 1등은 아직 소원성취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 혹시 모르니까, 유달 씨는 앞으로 로또 구입 금지예요."
유달은 중독자처럼 떨리는 손을 비비며 대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어떤 유혹이 있어도 참아야지요. 로또에 ‘로’ 자도 꺼내지 않겠습니다."
"소원이 무엇인지 확실하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건 하나네요. 오현아 씨의 결혼… 그녀가 결혼식을 해야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물론입니다. 행복한 결혼식에서 현아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확실히 빌었습니다."
"그렇다면 말이에요, 현아 씨에게 부탁하여 결혼을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유달이 발끈하여 소리쳤다.
"그것만은 절대 안 됩니다. 제 목숨이 끊어져도 결혼식 연기나 취소는 없습니다."
"유달 씨의 결심이 확고하니 어쩔 수 없네요. 우선은 현아 씨의 결혼식 날짜가 언제인지 알아보는 게 순서일 것 같은데……."
때마침 그에 관한 내용이 TV에서 나왔다.
연예가 뉴스의 사회자가 리포터에게 물었다.
-톱스타 배우 부부가 또다시 탄생하는 것이군요. 화촉을 밝히는 날짜는 정해졌습니까?
오현아와 정찬일의 결혼 발표를 취재했던 여자 리포터가 대답했다.
-공식적으로 발표는 하지 않았는데요. 양가 쪽에서 최대한 빨리 식을 치르는 것으로 합의했다고 하니, 올해를 넘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 두 분의 바쁜 스케줄을 고려하면 11월 말이나 12월 초쯤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략 100일 정도 남은 셈이군요?
-그렇습니다.
"크읍!"
유달은 복잡한 심경이 담긴 탄성을 삼켰다.
오현아의 행복한 결혼은 그가 진심으로 바랐던 것.
하지만 자칫하면 그날이 유달이 살아 있는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었다.
장미란이 고개를 푹 숙인 유달에게 물었다.
"다른 소원은 기억나는 거 없어요? 지금까지 나온 건 네 가지뿐이에요. 유달 씨의 신기는 대여섯 가지가 가능하다고 하니, 그 숫자를 꽉 채웠을 것 같은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제 평소의 행동으로 추측해 보면, 만복이 놈과 결판은 내는 것은 반드시 들어 있었을 겁니다."
"그것도 애매한 소원이네요? 유달 씨가 박만복의 행방을 찾고 싶다고 한 것인지, 결판을 내고 싶다고 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잖아요. 첫 번째 것이라면 반쯤은 이루어졌지요?"
"그러네요."
동방 호텔에서 박만복과 백시연이 연관이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혹시 또 모르니까, 백시연을 통해서 박만복의 행방을 찾아내는 건 당분간 보류하도록 하죠."
"어쩔 수 없지요……."
"이제 소원의 총합이 다섯 개가 되었군요. 맥시멈이 여섯 개니까, 나머지 한 개는 뭘까요?"
"그건 정말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가 5개의 소원만 빌었을 수도 있고요."
"좋아요, 나머지 한 개는 차근차근 생각해 보도록 하죠."
이어 장미란이 분위기를 전환하듯 물었다.
"제대로 사고 친 기분이 어떠세요?"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 같습니다. 진짜 버킷리스트를 만들어야겠어요."
"착잡한 기분을 달랠 겸, 오랜만에 저의 미제 사건을 도와주는 건 어때요?"
"이 시국에요?"
유달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장미란을 쳐다봤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 유달 씨의 생명은 100일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때까지 선행을 쌓는 게 올바른 대처법이 아닐까요?"
유달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느냐 성내지 않았다.
"매우 타당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자포자기하면 죗값만 늘어날 뿐이죠. 조금이라도 죄의 무게를 줄여야 하는데… 제가 동방 그룹 사모님 일로 아직 우울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더 암울한 사건을 접했다가는 진짜로 자포자기할 것 같은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에는 힐링이 되는 사건이에요."
"세상에 그런 사건도 있습니까?"
* * *
무더위가 한풀 꺾인 한강 공원.
시원한 강바람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유달과 장미란은 유람선 선착장이 보이는 잔디밭에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 어떤 사건인지 들고 있던 유달이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어린아이 납치 사건이 힐링이 됩니까?"
"생각해 보세요? 잃어버렸던 아이를 찾은 그 부모님은 얼마나 기뻐하겠어요?"
유달은 그 반대의 상황이 걱정이다.
"그 아이가 잘못됐으면 어떡합니까? 공개수사 전환하고 아직도 찾지 못했잖아요?"
"여러 정황상 살아 있을 확률이 높다고 봐요."
유달은 심하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 미치겠네… 그러니까 여기서 납치범을 놓쳤다는 것이죠?"
"네, 납치범은 어머니에게 딸을 살리고 싶으면 현금 3억을 가지고 이곳으로 나오라고 했어요. 물론 경찰에게 알리지는 못하게 했죠."
"딸의 안전이 걱정인 어머니는 납치법의 지시대로 경찰에 알리지 않고 이곳으로 나왔고요."
"자세한 내용은 어머니에게 직접 들어 보세요."
유달은 적잖이 당황했다.
"헐, 그 어머니가 여기 계십니까?"
"저기 오시네요."
30대 중반의 여인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장미란을 보자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장 팀장.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장 팀장님의 전화를 받고 너무 기뻤습니다. 그때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포기하지 않으셨구나, 마음의 위로가 되었습니다."
장미란은 그녀에게 어떻게 지냈느냐 묻지 않았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가 어떻게 지냈을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장미란이 유달을 소개해 주었다.
"소은이 어머니, 여기 계신 분은 유달 씨예요. 외자 이름이지요. 따님을 찾는 데 큰 도움을 주실 겁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납치당한 이소은의 어머니 윤미리는 90도가 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이는 유달은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아, 예……."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이던 그는 이내 작심한 듯 말했다.
"이별 중에서 가장 가슴 아픈 것이 생이별이고, 그중에서 천륜이 끊어지는 이별보다 슬픈 게 어디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그래야 저도 지옥을 면피할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