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대저택의 비밀
정태영은 통통한 체구에 하얀 양복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하얀 머리와 하얀 수염, 검은색 뿔테 안경은 유달이 패스트푸드 외식업체의 할아버지 마스코트를 떠올리기 충분했다.
그는 엷은 웃음을 띤 표정으로 말했다.
-내 후손에 관한 것이네. 자네가 바쁘다고 하니, 함께 다니며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네만.
“훌륭하신 판단입니다. 저희는 지금 만복이란 미친놈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회장님의 호텔에서 난동을 부린 무당입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고 예상은 했지. 순간적으로 잠이 든 것 같은… 아니, 기절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네. 온전한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았어.
“만복이 놈이 살(煞)을 터트렸기 때문입니다. 호텔 안팎에 있던 모든 영이 충격을 받았겠지요. 우리는 미란 씨를 따라다니며 이야기 나누도록 하죠. 실력이 출중했던 수사관이었습니다.”
장미란이 유달에게 부탁했다.
“정 회장님이 옆에 계시면 제가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전해 주세요.”
유달은 바로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들으셨죠? 제 파트너가 회장님을 존경한답니다.”
-고맙다고 전해 주게. 척 봐도 욕심나는 재원이군. 내 살았다면 바로 내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을 거네.
“사람 보는 안목이 탁월하시군요?”
-내가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라네.
“그에 대한 상세한 조언을 듣고 싶군요. 저도 실은 작은 기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어 유달이 장미란에게 말했다.
“회장님께서 매우 탐나는 재원이라 하셨습니다.”
“유달 씨와 함께 다니니, 이런 장점도 있네요.”
장미란은 프론트로 향했다.
그러고는 사건이 발생했던 시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직원들에게 물었다.
로비에서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고 했다.
박만복은 프론트에서 사대신가 사람들이 몇 층에 있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로비에서 승강기를 타고 올라갔다가 바로 내려왔다. CCTV와 직원들의 증언을 모두 확인했는데, 그가 호텔에서 머문 시간은 채 20분이 되지 않았다.
띵동.
장미란과 유달이 7층에서 내렸다.
총괄 지배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50대 초반에 서글서글한 인상이다.
“어서 오십시오. 검찰에서 연락받았습니다.”
“호텔에서도 매우 난감한 상황일 겁니다.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군요.”
“이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도 난감합니다. 7층에 있는 고객분들만 쓰러지셨습니다. 저희는 식중독인가 하여 조사했는데 아니었고요. 경찰에서는 독가스 테러가 아닌지 의심했지만 아무 이상도 없었습니다.”
“상태가 괜찮아 병원에 가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 보고 싶은데요.”
“알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유달은 장미란과 함께 가지 않았다.
승강기가 있는 복도에서 정태영과 잡담을 나눴다.
“회장님, 그렇게 빼지 마시고, 부자가 될 수 있는 비책 좀 알려 달라니까요?”
“내가 말하는 건 자네에게 도움이 안 된다니까? 나는 집안 대대로 만석꾼 부자였고, 자네는 빈털터리나 다름없지 않은가? 나는 돈을 가지고 돈을 번 것이라 자네에게 도움이 될 리 없지.”
“이번 생은 글렀다는 말입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자네의 상황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야. 괜히 나를 따라 했다간 패가망신에 사기꾼으로 몰릴 수도 있다네.”
유달이 수긍하듯 말했다.
“그리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지요. 그런데 회장님은 왜 이리 쌩쌩하십니까?”
“무슨 뜻으로 물어보는 것인가?”
“선령도 아니면서 이승에 머무는 건 쉽지 않지요.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말입니다. 집안의 수호령이 되어도 3년을 넘기기 힘듭니다. 이리 멀쩡할 수 있는 비책 같은 게 있습니까?”
정태영이 대답했다.
“자네는 비책을 참 좋아하는군.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관심도 없고.”
“정확하십니다.”
“나는 생을 마감한 지 아직 3년이 지나지 않았네. 매스컴에서도 엄청 떠들었을 것인데…….”
유달이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언제 태어나셨습니까?”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 태어났네.”
“그럼 100세를 넘기고 돌아가셨다는 겁니까? 우와~ 회장님은 정말 축복의 상징입니다. 엄청난 부와 장수를 동시에 누렸고, 세상의 존경까지 받고 계시니 말입니다.”
정태영은 씁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오래 산다는 게 좋기만 하지는 않았다네. 하나밖에 없는 자식놈이 먼저 가는 모습을 봐야 했어. 대대로 만석꾼 부자였지만 손이 귀한 집안이기도 하네.”
“그룹을 이어 갈 대가 끊긴 겁니까?”
“그건 아니네. 손자놈이 잘 맡아서 운영하고 있지. 하지만 이제 대가 끊길 것을 염려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네. 손자놈이 늦은 나이에 딸을 얻었는데, 그 아이가 많이 아프다네.”
“죄송하지만, 저는 의사가 아니데요?”
“의사가 고칠 병이 아니야. 그러니 자네한테 부탁하는 것이지.”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내 증손녀가 지금 17살이네. 친구들과 어울리면 한창 학교 다닐 때인데…….”
정태영은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상세히 말했다.
그들의 대화가 끝나 갈 무렵, 장미란이 돌아왔다.
“특별한 건 없네요. 박만복은 7층에 잠시 내렸고, 승강기를 타고 다시 내려갔어요. 그때 여기에 있던 사람들과의 접촉은 없었고요. 이번 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경찰이 조사할 상황이 아니에요.”
“그래서 그놈의 행방을 찾지 않겠다는 겁니까?”
“굳이 경찰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무슨 소립니까?”
“보세요…….”
장미란은 유달에게 휴대폰을 보여 주며 말을 이었다.
“이건 박만복이 일을 끝내고 호텔 로비를 나가는 CCTV 화면이에요. 호텔 입구에 누군가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지요?”
“웬 여자네요.”
“누군지 모르겠어요?”
유달은 화면 속 영상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상당한 미인 같은데… 연예인인가요?”
“작곡가 백시연이잖아요?”
“예? 정말이요?”
“조금 있으면 선글라스 벗을 거니까 잘 보세요.”
장미란의 말대로 화면 속의 여인이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와 동시에 유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런 앙큼한 것! 백시연이 확실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 제 예상이 맞았습니다. 이 앙큼한 것의 연기력이 쩌네요. 만복이가 누구냐고 그렇게 시치미떼더니…….”
“지금 바로 확인하러 갈까요?”
“아니요,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우선은 회장님의 부탁부터 해결하겠습니다. 그게 더 급하게 느껴지거든요.”
* * *
경기도 양평, 고급 별장이 즐비한 지역.
장미란은 조심스럽게 밤 운전을 했고, 유달은 송보름의 아버지와 통화 중이다.
“네, 보름이 아버님,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강을 따라 멋진 별장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동방 그룹의 정 회장은 저의 오랜 사업 파트너입니다. 불행히도 제가 예전에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받고 있지요.
“진작 저에게 말씀하시지요?”
-저는 약속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보름이를 구해 주시면서 이와 같은 부탁은 다시 받지 않겠다고 미리 못 박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랬나요?”
유달은 진짜 기억이 없는 표정이다.
-어쨌거나 선생님이 먼저 고쳐 주시겠다고 하시니, 저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지요. 일이 잘되면 제가 나중에 섭섭지 않은 보상을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어느 때보다 깔끔하게 해결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간다고 그쪽에는 전달하셨죠?”
-물론입니다. 정 회장은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일 겁니다. 그 애타는 심정 제가 잘 알지요. 아무쪼록 좋은 결과 기대 하겠습니다.
“네~ 염려 마시고, 푹 주무십시오.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으니, 이만 끊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유달은 매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일석이조에 일거양득 아니겠습니까? 정태영 회장과 송 사장에게 동시에 사례를 받게 생겼습니다. 아니지! 딸에게 붙은 악령을 쫓아 주면 지금 동방 그룹의 회장도 그냥 있지는 않겠지요? 엄청난 후사를 할 것이니, 일석삼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장미란은 너무 긍정적인 유달의 생각을 경계했다.
“그야 일이 잘 풀릴 때 이야기지요. 동방 그룹에서도 별별 방법을 다 써 봤을 것인데, 결국엔 실패한 거잖아요.”
“모든 방법이 통하지 않을 때, 짠하고 등장하는 게 바로 접니다. 최후의 보루하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미란 씨는 송 사장님과 동방 그룹의 정 회장이 친하다는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보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가 알게 되었죠. 저는 유달 씨가 그걸 몰랐다는 게 이해되지 않네요. 만날 둘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 떨잖아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전부 쓸데없는 이야기라 보면 된다.
유달이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군요. 별장이 아니라 대저택 수준입니다.”
장미란의 승용차가 정 회장의 별장 정문에 멈췄다.
육중한 철문 안쪽.
별장지기인 듯한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장미란이 창문을 열고 대답했다.
“명동 송 사장님이 보내셨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별장지기가 리모컨을 조작하자 육중한 철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부르릉.
장미란이 차를 운전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조수석의 유달이 창밖을 살피며 탄성을 터트렸다.
“영화 속에 나오는 영국의 대저택 같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도 돈 많은 사람 참 많아요. 이게 정원입니까? 말을 키워도 될 정도로 광활하네요.”
부러움에 사무치는 유달의 말처럼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별장이다.
장미란과 유달은 손님 전용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러고는 웅장한 별장 본채 현관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려고 했는데,
덜컹.
안에서 먼저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왔다.
성경책을 모두 들고 있는 모습이 교인들인 모양이다.
배웅하는 집주인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50대의 귀티가 흐르는 신사였다.
현 동방 그룹의 회장인 정명철이 분명했다.
“멀리까지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
“아닙니다. 회장님이 상심이 정말 크시겠습니다. 그토록 아끼셨던 따님이 몹쓸 병에 걸리셨으니 말이지요.”
“염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올라가십시오.”
교인을 보낸 정명철이 한쪽에 물러나 있는 유달과 장미란을 쳐다보았다.
“송 사장님이 보내셨습니까?”
“맞습니다. 저는 유달입니다.”
“장미란이에요.”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들어가시지요.”
그들은 간단히 인사 나누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정명철이 직접 서구식 인테리어로 꾸며진 응접실로 안내했다.
“송 사장과 저는 사업적 파트너이기도 하며 개인적인 친분도 두텁습니다. 예전 송 사장이 자신의 딸에 대해 말했을 때 저는 믿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정신병을 이상하게 받아들여 난리를 친다 싶었는데, 저한테도 그런 문제가 생길 줄이야…….”
장미란이 물었다.
“따님은 언제부터 그런 증상이 나타났습니까?”
“한 달 정도 되었지요. 처음에는 그냥 몸이 안 좋은가 했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도 하며 증세가 점점 심해졌습니다.”
“병원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질문은 장미란이 도맡아 했다.
유달은 소파에 앉은 상태에서 집안 곳곳을 살피는 때다.
그의 눈에 2층 난간을 힘없이 지나는 여인이 보였다.
“정 회장님, 저기 계신 분은 누구신지요?”
정명철이 고개 돌려 확인하고 대답했다.
“제 아내입니다. 딸아이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써서 몸이 좋지 않은 상태입니다.”
“다른 가족분은 계십니까?”
“아니요, 저도 송 사장과 똑같이 딸 하나뿐입니다.”
유달의 질문이 계속 이어졌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은 몇 명입니까?”
“별장 관리인 서 씨하고, 집사, 가사 도우미, 간호사 등을 합치면 7명 정도입니다.”
“그렇군요. 지금 따님의 상태를 봐도 될까요?”
“그 전에 식사부터 하시지요? 송 사장님이 아무리 늦더라도 끼니는 반드시 챙겨 드려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더군요.”
“우리 송 사장님이 섬세한 면이 있지요. 하지만 오늘은 따님분을 만나고 먹도록 하지요.”
“알겠습니다. 강 집사를 따라가시면 제 딸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40대 후반의 남자 집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유달과 장미란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자 정중히 안내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강 집사는 후덕한 체구에 소탈한 인상이다.
그의 뒤에서 바싹 붙어 걷는 유달이 별것 아닌 듯 물었다.
“아까 교회분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던데, 정 회장님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십니까?”
“글쎄요. 독실하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건 왜 묻는 것인지요?”
“집안 곳곳에 부적이 붙어 있었던 것 같은데, 뗀 흔적이 있어서요.”
“그 부적들은 돌아가신 선대 회장님께서 붙이신 겁니다. 선대 회장님이 돌아가시자 현 회장님의 사모님께서 떼라고 하셨지요.”
“원래 이곳에 지금 회장님 가족이 살지는 않았지요?”
“네, 이 별장은 선대 회장님께서 요양하던 곳입니다. 가영 아가씨 때문에 회장님이 잠시 머무르고 계십니다.”
그들은 덩치 좋은 사내가 지키고 있는 문 앞에 도착했다.
강 집사가 유달에게 누군지 알려 주었다.
“회장님의 경호원입니다. 아가씨가 있는 방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지키고 있지요.”
이어 그는 경호원에게 말했다.
“회장님의 손님이시네. 회장님께서 허락하셨으니 문을 열어도 되네.”
“알겠습니다, 집사님.”
찰칵.
끼이익…….
덩치 좋은 경호원이 문을 여는 순간,
지독한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강 집사가 먼저 안으로 들어서고. 그 뒤를 유달과 장미란이 뒤따랐다.
103
대저택의 비밀
정태영은 통통한 체구에 하얀 양복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하얀 머리와 하얀 수염, 검은색 뿔테 안경은 유달이 패스트푸드 외식업체의 할아버지 마스코트를 떠올리기 충분했다.
그는 엷은 웃음을 띤 표정으로 말했다.
-내 후손에 관한 것이네. 자네가 바쁘다고 하니, 함께 다니며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네만.
“훌륭하신 판단입니다. 저희는 지금 만복이란 미친놈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회장님의 호텔에서 난동을 부린 무당입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고 예상은 했지. 순간적으로 잠이 든 것 같은… 아니, 기절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네. 온전한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았어.
“만복이 놈이 살(煞)을 터트렸기 때문입니다. 호텔 안팎에 있던 모든 영이 충격을 받았겠지요. 우리는 미란 씨를 따라다니며 이야기 나누도록 하죠. 실력이 출중했던 수사관이었습니다.”
장미란이 유달에게 부탁했다.
“정 회장님이 옆에 계시면 제가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전해 주세요.”
유달은 바로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들으셨죠? 제 파트너가 회장님을 존경한답니다.”
-고맙다고 전해 주게. 척 봐도 욕심나는 재원이군. 내 살았다면 바로 내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을 거네.
“사람 보는 안목이 탁월하시군요?”
-내가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라네.
“그에 대한 상세한 조언을 듣고 싶군요. 저도 실은 작은 기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어 유달이 장미란에게 말했다.
“회장님께서 매우 탐나는 재원이라 하셨습니다.”
“유달 씨와 함께 다니니, 이런 장점도 있네요.”
장미란은 프론트로 향했다.
그러고는 사건이 발생했던 시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직원들에게 물었다.
로비에서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고 했다.
박만복은 프론트에서 사대신가 사람들이 몇 층에 있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로비에서 승강기를 타고 올라갔다가 바로 내려왔다. CCTV와 직원들의 증언을 모두 확인했는데, 그가 호텔에서 머문 시간은 채 20분이 되지 않았다.
띵동.
장미란과 유달이 7층에서 내렸다.
총괄 지배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50대 초반에 서글서글한 인상이다.
“어서 오십시오. 검찰에서 연락받았습니다.”
“호텔에서도 매우 난감한 상황일 겁니다.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군요.”
“이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도 난감합니다. 7층에 있는 고객분들만 쓰러지셨습니다. 저희는 식중독인가 하여 조사했는데 아니었고요. 경찰에서는 독가스 테러가 아닌지 의심했지만 아무 이상도 없었습니다.”
“상태가 괜찮아 병원에 가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 보고 싶은데요.”
“알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유달은 장미란과 함께 가지 않았다.
승강기가 있는 복도에서 정태영과 잡담을 나눴다.
“회장님, 그렇게 빼지 마시고, 부자가 될 수 있는 비책 좀 알려 달라니까요?”
“내가 말하는 건 자네에게 도움이 안 된다니까? 나는 집안 대대로 만석꾼 부자였고, 자네는 빈털터리나 다름없지 않은가? 나는 돈을 가지고 돈을 번 것이라 자네에게 도움이 될 리 없지.”
“이번 생은 글렀다는 말입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자네의 상황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야. 괜히 나를 따라 했다간 패가망신에 사기꾼으로 몰릴 수도 있다네.”
유달이 수긍하듯 말했다.
“그리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지요. 그런데 회장님은 왜 이리 쌩쌩하십니까?”
“무슨 뜻으로 물어보는 것인가?”
“선령도 아니면서 이승에 머무는 건 쉽지 않지요.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말입니다. 집안의 수호령이 되어도 3년을 넘기기 힘듭니다. 이리 멀쩡할 수 있는 비책 같은 게 있습니까?”
정태영이 대답했다.
“자네는 비책을 참 좋아하는군.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관심도 없고.”
“정확하십니다.”
“나는 생을 마감한 지 아직 3년이 지나지 않았네. 매스컴에서도 엄청 떠들었을 것인데…….”
유달이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언제 태어나셨습니까?”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 태어났네.”
“그럼 100세를 넘기고 돌아가셨다는 겁니까? 우와~ 회장님은 정말 축복의 상징입니다. 엄청난 부와 장수를 동시에 누렸고, 세상의 존경까지 받고 계시니 말입니다.”
정태영은 씁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오래 산다는 게 좋기만 하지는 않았다네. 하나밖에 없는 자식놈이 먼저 가는 모습을 봐야 했어. 대대로 만석꾼 부자였지만 손이 귀한 집안이기도 하네.”
“그룹을 이어 갈 대가 끊긴 겁니까?”
“그건 아니네. 손자놈이 잘 맡아서 운영하고 있지. 하지만 이제 대가 끊길 것을 염려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네. 손자놈이 늦은 나이에 딸을 얻었는데, 그 아이가 많이 아프다네.”
“죄송하지만, 저는 의사가 아니데요?”
“의사가 고칠 병이 아니야. 그러니 자네한테 부탁하는 것이지.”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내 증손녀가 지금 17살이네. 친구들과 어울리면 한창 학교 다닐 때인데…….”
정태영은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상세히 말했다.
그들의 대화가 끝나 갈 무렵, 장미란이 돌아왔다.
“특별한 건 없네요. 박만복은 7층에 잠시 내렸고, 승강기를 타고 다시 내려갔어요. 그때 여기에 있던 사람들과의 접촉은 없었고요. 이번 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경찰이 조사할 상황이 아니에요.”
“그래서 그놈의 행방을 찾지 않겠다는 겁니까?”
“굳이 경찰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무슨 소립니까?”
“보세요…….”
장미란은 유달에게 휴대폰을 보여 주며 말을 이었다.
“이건 박만복이 일을 끝내고 호텔 로비를 나가는 CCTV 화면이에요. 호텔 입구에 누군가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지요?”
“웬 여자네요.”
“누군지 모르겠어요?”
유달은 화면 속 영상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상당한 미인 같은데… 연예인인가요?”
“작곡가 백시연이잖아요?”
“예? 정말이요?”
“조금 있으면 선글라스 벗을 거니까 잘 보세요.”
장미란의 말대로 화면 속의 여인이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와 동시에 유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런 앙큼한 것! 백시연이 확실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 제 예상이 맞았습니다. 이 앙큼한 것의 연기력이 쩌네요. 만복이가 누구냐고 그렇게 시치미떼더니…….”
“지금 바로 확인하러 갈까요?”
“아니요,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우선은 회장님의 부탁부터 해결하겠습니다. 그게 더 급하게 느껴지거든요.”
* * *
경기도 양평, 고급 별장이 즐비한 지역.
장미란은 조심스럽게 밤 운전을 했고, 유달은 송보름의 아버지와 통화 중이다.
“네, 보름이 아버님,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강을 따라 멋진 별장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동방 그룹의 정 회장은 저의 오랜 사업 파트너입니다. 불행히도 제가 예전에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받고 있지요.
“진작 저에게 말씀하시지요?”
-저는 약속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보름이를 구해 주시면서 이와 같은 부탁은 다시 받지 않겠다고 미리 못 박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랬나요?”
유달은 진짜 기억이 없는 표정이다.
-어쨌거나 선생님이 먼저 고쳐 주시겠다고 하시니, 저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지요. 일이 잘되면 제가 나중에 섭섭지 않은 보상을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어느 때보다 깔끔하게 해결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간다고 그쪽에는 전달하셨죠?”
-물론입니다. 정 회장은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일 겁니다. 그 애타는 심정 제가 잘 알지요. 아무쪼록 좋은 결과 기대 하겠습니다.
“네~ 염려 마시고, 푹 주무십시오.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으니, 이만 끊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유달은 매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일석이조에 일거양득 아니겠습니까? 정태영 회장과 송 사장에게 동시에 사례를 받게 생겼습니다. 아니지! 딸에게 붙은 악령을 쫓아 주면 지금 동방 그룹의 회장도 그냥 있지는 않겠지요? 엄청난 후사를 할 것이니, 일석삼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장미란은 너무 긍정적인 유달의 생각을 경계했다.
“그야 일이 잘 풀릴 때 이야기지요. 동방 그룹에서도 별별 방법을 다 써 봤을 것인데, 결국엔 실패한 거잖아요.”
“모든 방법이 통하지 않을 때, 짠하고 등장하는 게 바로 접니다. 최후의 보루하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미란 씨는 송 사장님과 동방 그룹의 정 회장이 친하다는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보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가 알게 되었죠. 저는 유달 씨가 그걸 몰랐다는 게 이해되지 않네요. 만날 둘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 떨잖아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전부 쓸데없는 이야기라 보면 된다.
유달이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군요. 별장이 아니라 대저택 수준입니다.”
장미란의 승용차가 정 회장의 별장 정문에 멈췄다.
육중한 철문 안쪽.
별장지기인 듯한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장미란이 창문을 열고 대답했다.
“명동 송 사장님이 보내셨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별장지기가 리모컨을 조작하자 육중한 철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부르릉.
장미란이 차를 운전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조수석의 유달이 창밖을 살피며 탄성을 터트렸다.
“영화 속에 나오는 영국의 대저택 같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도 돈 많은 사람 참 많아요. 이게 정원입니까? 말을 키워도 될 정도로 광활하네요.”
부러움에 사무치는 유달의 말처럼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별장이다.
장미란과 유달은 손님 전용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러고는 웅장한 별장 본채 현관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려고 했는데,
덜컹.
안에서 먼저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왔다.
성경책을 모두 들고 있는 모습이 교인들인 모양이다.
배웅하는 집주인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50대의 귀티가 흐르는 신사였다.
현 동방 그룹의 회장인 정명철이 분명했다.
“멀리까지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
“아닙니다. 회장님이 상심이 정말 크시겠습니다. 그토록 아끼셨던 따님이 몹쓸 병에 걸리셨으니 말이지요.”
“염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올라가십시오.”
교인을 보낸 정명철이 한쪽에 물러나 있는 유달과 장미란을 쳐다보았다.
“송 사장님이 보내셨습니까?”
“맞습니다. 저는 유달입니다.”
“장미란이에요.”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들어가시지요.”
그들은 간단히 인사 나누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정명철이 직접 서구식 인테리어로 꾸며진 응접실로 안내했다.
“송 사장과 저는 사업적 파트너이기도 하며 개인적인 친분도 두텁습니다. 예전 송 사장이 자신의 딸에 대해 말했을 때 저는 믿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정신병을 이상하게 받아들여 난리를 친다 싶었는데, 저한테도 그런 문제가 생길 줄이야…….”
장미란이 물었다.
“따님은 언제부터 그런 증상이 나타났습니까?”
“한 달 정도 되었지요. 처음에는 그냥 몸이 안 좋은가 했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도 하며 증세가 점점 심해졌습니다.”
“병원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질문은 장미란이 도맡아 했다.
유달은 소파에 앉은 상태에서 집안 곳곳을 살피는 때다.
그의 눈에 2층 난간을 힘없이 지나는 여인이 보였다.
“정 회장님, 저기 계신 분은 누구신지요?”
정명철이 고개 돌려 확인하고 대답했다.
“제 아내입니다. 딸아이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써서 몸이 좋지 않은 상태입니다.”
“다른 가족분은 계십니까?”
“아니요, 저도 송 사장과 똑같이 딸 하나뿐입니다.”
유달의 질문이 계속 이어졌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은 몇 명입니까?”
“별장 관리인 서 씨하고, 집사, 가사 도우미, 간호사 등을 합치면 7명 정도입니다.”
“그렇군요. 지금 따님의 상태를 봐도 될까요?”
“그 전에 식사부터 하시지요? 송 사장님이 아무리 늦더라도 끼니는 반드시 챙겨 드려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더군요.”
“우리 송 사장님이 섬세한 면이 있지요. 하지만 오늘은 따님분을 만나고 먹도록 하지요.”
“알겠습니다. 강 집사를 따라가시면 제 딸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40대 후반의 남자 집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유달과 장미란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자 정중히 안내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강 집사는 후덕한 체구에 소탈한 인상이다.
그의 뒤에서 바싹 붙어 걷는 유달이 별것 아닌 듯 물었다.
“아까 교회분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던데, 정 회장님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십니까?”
“글쎄요. 독실하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건 왜 묻는 것인지요?”
“집안 곳곳에 부적이 붙어 있었던 것 같은데, 뗀 흔적이 있어서요.”
“그 부적들은 돌아가신 선대 회장님께서 붙이신 겁니다. 선대 회장님이 돌아가시자 현 회장님의 사모님께서 떼라고 하셨지요.”
“원래 이곳에 지금 회장님 가족이 살지는 않았지요?”
“네, 이 별장은 선대 회장님께서 요양하던 곳입니다. 가영 아가씨 때문에 회장님이 잠시 머무르고 계십니다.”
그들은 덩치 좋은 사내가 지키고 있는 문 앞에 도착했다.
강 집사가 유달에게 누군지 알려 주었다.
“회장님의 경호원입니다. 아가씨가 있는 방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지키고 있지요.”
이어 그는 경호원에게 말했다.
“회장님의 손님이시네. 회장님께서 허락하셨으니 문을 열어도 되네.”
“알겠습니다, 집사님.”
찰칵.
끼이익…….
덩치 좋은 경호원이 문을 여는 순간,
지독한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강 집사가 먼저 안으로 들어서고. 그 뒤를 유달과 장미란이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