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핵폭탄
총을 든 영혼들과 마물들이 펼치는 세기의 대결.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한 펜션.
기절한 척하는 송보름이 실눈 뜨고 지켜보았다.
-두두두두두.
진짜 총이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번쩍이는 총구, 빗발치듯 뻗어가는 총알들이 마물들의 몸뚱이를 꿰뚫었다.
유달이 술 취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의 병사들이여 몽땅 쓸어버려라! 내가 무한한 힘을 제공할 것이다. 우하하하하!”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마물들.
하지만 머릿수의 차이가 너무 컸다.
전력을 다해 쓰러트려도 마물들은 계속 달려들었다.
“대체 이 벌레 같은 마물들은 어디서 쏟아져 나오는 거야!”
최전선이 무너지기 직전이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마물들의 공격에 군인들의 영기가 점점 약해졌다.
“안 돼, 안 돼, 소멸하면 안 돼! 소환, 소환, 소환…….”
유달은 소멸 직전의 영혼들을 불러들이기 바빴다.
그의 몸을 통과하면 다시 멀쩡해진 상태로 마물들과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간신히 수세를 면하는 것일 뿐, 상대를 압도하지 못했다.
“이러다가는 날밤 세겠어. 핵폭탄 같은 거 없나!”
영기를 낭비하는 쓸데없는 소모전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령 역시 끊임없이 마물들을 불러냈다.
“소환, 소환, 소환, 소환… 나는 바빠 죽겠는데, 저 여자는 왜 이렇게 태연한 거야?”
게다가 그녀는 손짓 한 번으로 수십 마리의 마물을 한꺼번에 만들어 냈다.
유달에게는 짜증 나는 일이고, 송보름에겐 충격이었다.
‘사장님이 진심으로 난감해하는 상대는 처음이야!’
장미란이 그녀에게 접근하여 물었다.
“어떤 상황이야?”
그녀는 송보름이 일부러 의식을 잃은 척하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송보름은 작고 다급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용호상박이라고 할까요. 어느 쪽이 우세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정체가 묘한 악령은 물량 공세로 몰아붙이고. 사장님은 완벽한 컨트롤로 막고 있어요. 둘 다 엄청나다고 할 수 있죠.”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을까?”
“아니요, 전혀 없어요. 사장님 자존심에 이런 상황을 용납할 리 없죠. 술까지 드셨겠다, 어떤 무리한 수단을 써서라도 상대를 굴복시킬 거에요.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지요.”
송보름의 예상은 적중했다.
유달이 영혼들을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모두 내 뒤로 집결! 핵폭탄이 떨어진다.”
이어 그는 장미란에게도 말했다.
“앙큼한 보름이 데리고 제 뒤에 붙으십시오. 핵폭탄 떨어지면 사람한테도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어요.”
장미란은 유달이 시키는 대로 송보름과 함께 그의 등 뒤에 붙어 섰다.
그녀는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저번에 그건가요? 저수지 사건 때처럼이요.”
“맞습니다. 제 몸주의 힘을 빌려야 할 것 같습니다. 마물의 기운을 완벽하게 날려 버릴 결정적인 한 방이죠. 그대로 잠시 움직이지 마십시오.”
유달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번쩍!
다시 눈을 뜨는 순간, 그의 음성은 살벌하게 변했다.
“눈에 거슬리는 잡것들이 우글거리는구나… 썩 물러가지 못할까!”
화아앙~.
저수지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력한 바람이 불었다.
장미란과 송보름의 머리카락이 세차게 휘날렸다.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이럴 진데, 마물들을 향해 몰려가는 기세는 어떻겠는가!
-콰아아앙~!
원자 폭탄이 터지는듯한 굉음이 발생했다.
곧이어 강력한 섬광이 번뜩였고, 세상을 집어삼킬 것 같은 광풍이 마물들을 덮쳤다.
-후화아아앙~!
그 엄청난 위력은 저수지 때와 비할 바가 아니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닿는 순간, 마물들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놈들이 비명을 지를 시간조차 없었다. 펜션 주변에 가득했던 마물들은 단 몇 초 만에 깨끗이 사라졌다.
번쩍!
다시 눈을 뜬 유달이 광소를 터트렸다.
“우하하하하! 내 휴가를 망치려는 악의 무리는 모두 산화했도다! 신이시여, 저는 왜 이리 막강한 것입니까!”
유달은 하늘을 우러러 소리치며 승리를 자축했다.
그런데 장미란과 송보름은 환호하는 반응이 없다.
그녀들은 동시에 식겁하며 유달의 코를 손가락질했다.
“왜? 내 코에 뭐 묻었어?”
유달은 반사적으로 코에 손이 갔다.
뭐가 묻은 게 아니라 코피가 흘러내렸다.
“허걱! 소중한 내 몸에서 쌍코피가… 아니, 아니, 괜찮아. 이번 상대가 워낙 강력했잖아. 나도 코피 정도는 흘려줘야 승리가 더욱 값지게 되는 것이지.”
유달이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그때.
쇳소리가 섞인 여자의 음성이 바로 옆에서 들렸다.
“괴이한 존재를 몸신으로 받은 무당이구나?”
“뭐야!”
유달은 깜짝 놀라 옆을 돌아봤다.
30대 초반의 여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유달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도대체 뭐지? 악령이 어떻게 완벽한 인간으로 현신할 수 있는 거야? 그보다, 왜 소멸하지 않고 멀쩡한 거지?”
“네놈에겐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어. 대들지 않고, 피하길 천만다행이지.”
유달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
“과연 그럴까? 좀 전에 소멸하지 않을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아주 처절하게…….”
그녀는 싸울 의사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나는 여기서 더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아.”
“아하, 불리하니까 바로 꼬랑지를 내리시네? 아까는 바로 쌩까고 마물들을 불러내더만? 내가 지금 휴가 기간이라도 사람을 해치는 악령을 그냥 용서할 수는 없어.”
“용서?”
그녀의 눈빛이 바뀌었다.
“나의 평안한 삶을 망친 건 이승의 인간들이다. 내가 사는 터에 집을 짓고,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이 떠들었지. 만약 내가 해칠 마음이 있었다면 저들이 지금까지 무사했을까? 나는 그저 저들이 조용히 떠나길 바랐을 뿐이다.”
“다른 꿍꿍이가 있었겠지? 보름이를 보자마자 냉큼 몸을 차지했잖아? 내가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마물부터 소환한 게 누구시더라?”
“나는 저들이 퇴마사를 불렀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참고, 잘해 줬는데… 괘씸한 마음이 들어서 본때를 보여 주려 했지.”
“이제 그 본때, 내가 보여 줄 수도 있어. 죽었으면 승천하는 게 이승의 이치야. 악령까지 되어서 자신이 사는 터라고 주장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지. 하지만 펜션 가족은 함부로 건들지 않았다는 건 인정. 그쪽이 조용히 떠난다면 소멸은 면하게 하주지.”
그녀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긍정보다는 부정의 의미가 강하게 느껴졌다.
“그러기 싫다면?”
유달 역시 엷은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
“소멸하고 싶다는데 누가 말려? 묵사발을 내서 싹싹 빌게 만들어야지.”
“쌍코피 흘린 게 누구시더라…….”
“방금 너는 돌이킬 수 없는 발언을 했어. 반드시 소멸시켜서 영원히 비밀로 만들 거야…….”
그들의 말이 점점 늘어졌다.
상대를 향한 적대감이 더욱더 커지는 상황.
“우리 널찍한 곳에서 승부를 볼까?”
유달이 앞마당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함이다.
“그러시던가.”
그녀는 거부하지 않고 유달을 따랐다.
야외 탁자에서 멀리 떨어진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섰다.
유달이 마지막으로 제안했다.
“조용히 떠나거나 승천하지? 아직 정신이 온전할 걸 보면 승천의 기회가 남았다는 것인데?”
“그럴 마음 없어. 나는 아직 이승을 떠나고 싶지 않아.”
“나는 기회를 줬는데, 그쪽이 차 버린 거야.”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눈싸움이 펼쳐졌다.
이제 누구도 말릴 수 없고,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대결임이 분명했다.
장미란이 송보름에게 물었다.
“이번엔 어떤 상황이야?”
“악령인 여자의 기운이 어마어마해요. 마신의 경지를 훨씬 뛰어넘었어요.”
“유달 씨가 위험한 거야?”
“그럴 리가요. 저런 상황이 되면 사장님의 몸신이 직접 나서요. 절대 사장님이 다치게 놔두지 않지요. 여자 악령도 위험을 직감한 것 같은데, 늦었죠. 사장님의 몸신은 자비가 없어요. 이제 저 악령은 끝장이에요.”
장미란이 보이기에도 현신한 악령이 위축된 듯 보였다.
유달의 몸신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려는 때다.
“타임!”
갑자기 유달이 대결을 중지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경계를 풀지 않고 물었다.
“무슨 수작이지?”
“오늘 그쪽을 소멸시키면 휴가 내내 찝찝할 것 같아. 싸움 대신 우리 내기할까?”
“뜬금없이?”
“목숨 걸고 싸우는 것보다 내기가 낫지. 그쪽도 큰 말썽 일어나는 거 원치 않고, 나도 그렇지.”
그녀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어떤 내기지?”
“나는 그쪽을 소멸시키지 않고, 승천하게 할 거야. 기간은 내 휴가가 끝날 때까지. 내가 지면 그쪽 마음대로 해. 나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을 테니까. 어때, 콜?”
* * *
송보름이 누워 있는 침대방.
유달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내가 왜 그런 내기를 했지? 그냥 소멸시켰으면 깨끗이 끝났을 일인데?”
“저도 모르죠?”
“그 악령이 받아들였어?”
“네, 잠시 생각하더니 그러자고 했어요.”
유달은 머리를 부여잡고 벌떡 일어섰다.
“와~ 미치겠네? 이승에 머물겠다는 악령을 어떻게 승천시켜? 내가 술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나?”
“사장님이 본격적으로 주사를 부린 건 내기가 성사된 다음이죠.”
“뭐라?”
“갑자기 술기운이 올라서는 해롱해롱, 술 없다고 고성방가, 탁자 위에 올라가 혼자 춤추고, 오바이트 3번, 양도 엄청났죠. 저는 용가리가 불 뿜는지 알았어요. 그러다가 결국엔 주변에 있던 영혼들 다 깨워서는, 매니저 언니 차 타고 마을로 가 버렸어요.”
유달은 어이없음에 넋이 나간 모습이다.
“정말로… 내가?”
“네, 사장님이요. 매니저 언니가 막으려는 걸 제가 괜찮다고 했어요. 운전병 영혼이 사장님 몸속으로 들어가는 걸 봤거든요. 그때 사장님은 누구도 말릴 수 없었어요.”
유달은 침대 끝단을 붙잡고 자책하여 말했다.
“우와~ 만취 상태가 이렇게 무섭구나! 완벽한 내 인생에 큰 오점으로 남을 거야.”
“저는 있는 그대로를 말씀드렸어요. 어느 정도 기억이 돌아왔어요?”
“전혀! 아무것도 생각 안 나? 빨리 기억이 돌아와야… 아니, 아니, 아니야. 그냥 이대로 기억이 안 났으면 좋겠어. 모두 기억나면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닐 것 같아.”
“창피한 것보다 먼저 뒷수습을 하셔야죠. 여자 악령을 어떻게 승천시킬 건데요?”
“모르겠어!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기억이 나야 방법을 생각하지?”
송보름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저와 함께 여자 악령을 만나 봐요. 직접 보면 생각이 날지 모르잖아요.”
“그렇지! 일단 대화를 해보고, 가능하면 없던 것으로 하자고 꼬드겨 봐야지.”
유달과 송보름이 A동 건물에서 나왔다.
야외 탁자 주변에서 강성호가 열심히 물청소하고 있다.
어젯밤 유달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성격이 온화한 강성호도 짜증을 낼 정도였다.
“이게 사람의 몸에서 나올 수 있는 양이야?”
얼굴이 붉어진 유달은 멀찍이 돌아서 B동으로 향했다.
그들이 B동 1층 문 앞에 도착했을 때다.
찰칵.
문이 열리며, 주인 여자가 나왔다.
그녀는 안쪽을 향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또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이어 그녀는 유달과 송보름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잠은 편안히 주무셨어요? 우리 남편 때문에 과음하신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이렇게 멀쩡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점심 준비되면 말씀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유달은 멀어지는 여주인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왜 저리 해맑은 반응이지? 방금 나온 곳에는 악령이 있을 텐데, 무서워하지도 않고.”
“여자 악령이 다른 사람의 기억을 지웠어요. 저 안에 있는 여자 악령이 손님인 줄 알아요.”
“정말? 그렇다면 내가 술주정한 것도 기억 못 하겠네?”
“그렇죠.”
유달은 펄쩍 뛰며 반색했다.
“앗싸~!”
“하지만 매니저 언니의 기억은 안 지워졌어요. 영기에 너무 무뎌서 그런 것 같아요. 사장님과 저는 영기가 강해서 아예 통하지 않았고요.”
“괜찮아, 미란 씨에겐 이미 추한 모습 다 보였거든. 이제 여자 악령만 잘 해결하면 되는 거야.”
유달은 표정을 진중히 하고, 문을 노크했다.
똑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