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마지막 승부
유달의 베팅이 더욱 과감해졌다.
“깔끔하게 100억.”
“다이.”
유달은 빨리빨리 패를 돌리라는 손짓을 거듭했다.
이번에는 패가 안 좋은 듯 조심스럽다.
“이게 뭡니까······ 천만 원.”
“천만 원 받고 1억.”
“1억 받고 100억~!”
“······.”
유달은 덤빌 테면 덤벼보라는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김현호의 고민이 길어지자 양덕수가 물었다.
“자네, 황기준과 무슨 관계지?”
유달은 양덕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반문했다.
“그게 누군데요?”
“좀 전에 분명 눈치 100단이라 하지 않았나?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그런 별명을 가진 이가 있지.”
“그냥 아는 사이라고요? 그쪽이 누명 씌워서 억울한 옥살이 하다가 죽었는데 말입니다.”
양덕수가 경계하며 물었다.
“복수하러 온 것인가?”
“그럼 내가 놀러 왔겠습니까?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벌 받아야지요. 일단은 내가 그쪽이 가진 돈을 모두 털어드리겠습니다.”
이어 그는 김현호 앞을 노크하듯 두드렸다.
똑똑.
“이보세요? 100억 받아요, 안 받아요?”
김현호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콜.”
“호~ 받았네? 자기 돈 아니라고 너무 막 쓰는 거 아닌가? 아홉 끗도 안 되면서 감히 100억을 받으셨어요?”
김현호를 바라보는 양덕수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저, 정말인가?”
“······.”
조용히 패를 내려놓는 김현호는 여덟 끗.
양덕수가 화를 참지 못하고 고함쳤다.
“자, 자네 제정신인가? 여덟 끗에 100억이라니!”
“진정하십시오, 회장님. 제가 무슨 패를 가졌든 저놈보다 높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유달이 얄밉게 끼어들었다.
“지금 내가 뻥카친다고 생각하는 거야? 무슨 근거로 그런 말도 안 되는 판단을 했을까? 내가 아무리 간덩이가 부었어도 그럴 배짱은 없어. 100억이라는 돈을 먹으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유달이 뒤집은 패는 2땡이다.
“!”
양덕수는 현기증까지 느끼는 반응이다.
자신의 뒷덜미를 부여잡고 치솟는 화를 억눌렀다.
유달이 불난 집에 기름 부었다.
“도박장 사장님, 테이블에 있는 칩은 100억이 안 될 것 같군요. 어서 칩을 더 가져오라 시키시지요?”
“나한테 원하는 게 뭐지?”
“내가 뭘 원하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지 않습니까?”
“왕 구단주를 죽인 건 기준이 놈이 맞아. 대한민국 사법부가 정당한 결정을 내렸고, 이미 공소시효도 지난 일이란 말이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1998년, 공소시효 폐지가 적용되지 않기에 2013년 공소시효가 성립되었다.
유달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당신 쪽박 차게 만들려고요. 죽는 순간까지 비참한 비렁뱅이 신세를 면치 못할 겁니다.”
이어 그는 장미란에게 패를 돌리라는 손짓했다.
두 장의 화투가 그들 앞에 놓이고,
유달이 김현호에게 고개 돌리며 말했다.
“이렇게 연달아 패가 좋을 수 있나······ 천억!”
양덕수의 고함이 터졌다.
“그만! 여기서 게임 끝. 더는 안 해!”
유달이 나설 필요가 없다.
그의 뒤에 있던 한강파 조직원들이 다가왔다.
“앉으시지요. 양 회장님. 그리고 게임은 계속 진행합니다.”
“······.”
양덕수도 낯익은 얼굴이다.
한강파 보스가 항시 데리고 다녔던 최측근 조직원.
그의 말이 곧 한강파 보스의 명령이다.
“이보게, 내가 김 회장과 통화해 보겠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각서대로 이행하십시오.”
이어 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와 통화했다.
“애들 안으로 들여보네. 환전소부터 점거해서 현금 빼돌리지 못하게 막고, 안에 있는 칩 모두 가지고 올라와.”
털썩.
양덕수는 맥이 빠져 주저앉았다.
한강파와 맞서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다.
평생 모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면 유달을 이기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패도 안 보고,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거지? 속임수 쓰는 거 아니야?”
“내가 미리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저는 영험한 무당이라 어떤 패가 들어올지 다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그런 일은 존재할 수 없어!”
“그럼 그렇게 믿으시던가요.”
유달이 김현호를 독촉했다.
“깔끔하게 천억인데······ 받을 것인지?”
김현호가 고심하는 기색을 보이자, 양덕수가 성내어 소리쳤다.
“그냥 죽어!”
순간, 김현호의 눈빛이 달라졌다.
“회장님, 저는 지금 게임 중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제 판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약속 잊으셨습니까?”
목소리와 눈빛 모두 살기 어린 기운이 느껴졌다.
양덕수는 이내 기세가 꺾였다.
“저놈은 무슨 패가 들어올지 알고 있다고. 분명 우리가 모르는 속임수가 있을 거야. 그걸 알아낼 때까지 잠시 기다리잔 말이야.”
“회장님······.”
지극히 낮게 깔리는 음성은 더는 귀찮게 하지 말라는 위협에 가까웠다.
하지만 천억이 어느 집 강아지 이름이던가.
양덕수는 참을 수 없는 불안감을 드러냈다.
“천억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야. 우리 둘 다 길거리로 내몰릴 수 있다고!”
“저를 믿으십시오. 제 말을 들어서 손해 난 적이 있었습니까? 왕 구단주의 일을 포함해서 말이지요.”
“!”
양덕수는 순간적으로 겁먹은 반응이다.
“자네는 점점 이상해지고 있어······ 가끔은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알아야지. 내가 한강파의 김 회장은 건들지 말라고 했잖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든 건 제가 책임집니다.”
“어떻게 책임을 진다는 건가? 저놈은 자네 패를 다 읽고 있어. 전 재산 털리는 건 시간문제라고!”
상대편의 내분은 바람직한 일이다.
유달은 이를 흐뭇하게 지켜보다 물었다.
“다 싸우셨으면 이제 결정을 내리시지요? 제가 베팅하는 천억 받겠습니까?”
“나는 한 번도 큰 게임에서 진 적이 없어······ 콜.”
순간, 양덕수는 뒷덜미를 잡고 휘청거렸고, 유달은 뜻밖이라는 반응이다.
“대단한 배짱이네? 도대체 무슨 패를 가졌을까······ 솔직히 이번엔 그쪽 패가 뭔지 나도 애매했거든?”
“절대로 질 수 없는 패라고 할 수 있지.”
그가 뒤집은 화투장은 4하고 9.
판을 무효로 만드는 패였다.
양덕수는 죽다 살아난 표정.
일단 천억은 날리지 않은 것인데,
김현호가 유달에게 제안했다.
“판돈을 가져가지 말고, 다음 판에 승부를 내지?”
“묻고 더블로 가자는 건가?”
“무제한 베팅이니, 더블까지는 필요 없지?”
“무조건 오케이.”
하지만 양덕수는 둘의 합의가 미치도록 못마땅한 기색이다.
그는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는지, 애타는 목소리로 김현호를 책망했다.
“자네답지 않게 왜 이리 무모한 건가? 어떤 도박판이건 자네가 주도권을 쥐고, 상대가 미쳐 날뛰게 하지 않았나?”
김현호는 그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꼼꼼히 정리해 주며 말했다.
“회장님, 그냥 평상시와 똑같이 모든 걸 저한테 맡겨두시면 됩니다, 이것이 저 괴물 같은 놈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어떻게 그렇다는 것인가?”
“저놈이 패를 읽는 능력이 있을지는 몰라도, 이미 나누어진 패를 유리하게 바꾸는 타짜 기술은 없습니다. 죽지 못하는 판이 되면, 승패의 확률은 똑같이 50%이지요. 저놈과의 승부에서 이보다 더 높은 확률은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장미란은 그들의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김현호의 말이 맞아요. 우리 들으라고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은 것 같아요.”
“무슨 상관입니까? 미란 씨가 저에게 좋은 패를 주면 깔끔하게 끝납니다. 가능하지요?”
“예?”
“농담입니다. 저놈을 끌어들여 철저히 벗겨 먹으려면, 어느 정도 위험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어 그는 한층 낮아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마지막 판은 제가 패를 돌릴 겁니다. 깜짝 놀랄 타짜 기술을 보여드리죠.’
‘그러다 걸리면 어쩌려고요?’
‘걸리면 기술이 아니죠. 저놈들도 눈치 200단 아저씨 같은 억울함을 당해야 합니다.’
그들이 조심스럽게 귓속말을 나누고 있을 때다.
덜컹.
6번 방의 문이 열리고,
도박장 직원들과 한강파 조직원들이 엄청난 양의 칩을 가지고 들어왔다.
유달이 어린애처럼 반색하며 다가갔다.
“우리 2천억 판돈 깔고 시작할까요? 한국 도박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 겁니다.”
***
양측을 합하여 판돈이 2천억.
이 금액의 칩을 테이블 중앙에 놓는 건 불가능했다.
500만 원짜리 블랙칩만 쌓아도 4만 개.
사설 도박장에는 그 정도 개수의 블랙칩도 없다.
양측은 게임 하는 포커 테이블 옆에 카트를 놓고 최대한 많은 칩을 쌓았다.
양덕수 쪽은 500만 원짜리 블랙칩과 100만 원짜리 노란색 칩으로 액수를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유달 측은 블랙칩이 현저히 부족했다.
여러 색상의 칩을 총동원하여, 상대방과 얼추 비슷한 높이로 쌓았기에 아이들 장난감처럼 알록달록했다.
그러고도 부족한 금액은 메모지에 적었다.
찰칵.
유달은 카트 위에 높이 쌓은 칩을 배경으로 셀카 사진을 찍었다.
얼마나 잘 나왔는지 확인하고는 무척 흐뭇한 표정이다.
“미란 씨도 찍으시죠?”
“아니요, 저는 사양할게요. 이 많은 돈이 걸린 중요한 판을 앞두고 사진까지 찍을 정신이 없네요.”
유달이 그녀가 앉아 있는 포커 테이블로 다가갔다.
“안타깝게도 저는 도박으로 딴 돈을 가져갈 수 없으니, 남는 것은 이 사진밖에 없지요.”
“약간의 수고비는 챙겨도 되지 않을까요? 고생한 대가는 받아야지요. 제 눈치 보지 말고 적당히 가져가세요.”
좋다고 할 줄 알았던 유달이 손사래 치며 거부했다.
“절대 그럴 마음 없습니다.”
“왜죠? 유달 씨는 저와 달리······ 이런 돈 쓰는 것에 죄책감 같은 거 느낄 성격이 아닌데요?”
“저번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일생의 모든 욕심을 한꺼번에 쏟아부었습니다. 그 이상을 욕심내면 감당할 수 없는 이별을 하게 되지요.”
“이별이요?”
“그런 게 있습니다. 뭐, 그래도 말이지요. 저는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돈도 벌어 봤고, 여한 없이 써도 봤습니다. 아직은 그 추억으로 버틸 수 있습니다.”
조용히 테이블에 앉아 있던 김현호가 한소리했다.
“게임 안 할 건가?”
“무슨 소리를~ 얼른 털어드리고 여기를 떠야지요.”
유달이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테이블 위의 화투를 잡는 순간, 양덕수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뭐 하는 거지! 왜 자네가 화투를 돌려?”
“그야 당연히 기술······ 아, 아니, 마지막 승부가 될 게 뻔하니, 유종의 미를 거두려는 거지요.”
척척척척.
유달이 능숙하게 화투를 섞으며 물었다.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여기서 속임수 쓰다 들키면 영화처럼 막 팔 자르고 그럽니까?”
김현호가 대답했다.
“영화가 심하게 과장되었어. 그랬다가는 손목이 멀쩡한 도박꾼을 찾아보기 힘들 거야. 보통은 판돈 몰수하고, 다시는 도박장에 출입 못 하게 하는 선에서 끝내지.”
“너무 가벼운데요?”
“도박꾼들은 하루라도 노름을 안 하면 미쳐버리지. 그런 자들에게 도박장 출입금지보다 더한 처벌이 있을까?”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스윽.
유달은 뭔가 아쉬운 표정으로 잘 섞은 화투를 테이블 중앙에 갖다 놓았다.
김현호는 화투를 반으로 나누어 기리하고, 조용히 팔을 거둬들였다.
유달은 맨 앞장부터 주고, 받고, 주고······ 또 받고.
그들은 두 장의 화투가 나누어지는 동안 서로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김현호가 살짝 화투장의 밑을 들어 확인하고, 재빨리 덮었다.
유달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괜찮은 족보가 들어온 모양인데요?”
“아마도 그쪽 패보다는 높겠지.”
“그렇다면 내 베팅도 받을 수 있겠네요?”
“얼마나 걸려고?”
“돈 액수 높여봐야 그쪽에서 감당되지 않겠지요? 나는 올인 받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서 바로 회수할 수 있는 게 좋겠는데······ 그쪽 양쪽 손목을 걸면 어떠신지? 이제야 고백하는데, 처음 보는 순간부터 그쪽 손목아지가 미치도록 탐났거든요?”
김현호는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양손을 걸면, 그쪽은 무엇을 내놓을 거지?”
“나도 역시 손목아지를 걸지요.”
“그따위 것을 어디다 써먹나? 나는 좀 더 유용한 것이면 좋겠는데?”
“그렇다면 한 손목 당 100억. 도합 200억 어떻습니까?”
“좋아, 그쪽 200억에 내 양쪽 손목을 걸지.”
둘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유달이 여유롭게 팔짱 끼며 말했다.
“그쪽이 콜 했으니, 먼저 오픈하시지요?”
김현호도 긴장한 모양인지, 매우 조심스럽게 자신의 패로 손을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