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작전 타임
김현호가 무표정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실실거리고 있는 유달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다.
별것도 아닌 실력을 믿고 날뛰는 전형적인 풋내기의 느낌이다. 도박판에서 가장 돈 따기 쉬운 상대였다.
외려, 그는 장미란이 더 신경 쓰였다.
수십 년을 도박판에서 살아온 직감이다.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뚜벅뚜벅.
곧이어 양덕수도 6번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역시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고, 김현호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유달보다 장미란이 더 신경 쓰이는 것이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
스윽.
유달은 기대고 있던 테이블에서 등을 땠다.
그러고는 마치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김현호와 양덕수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거기 맹하니 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들은 서로 눈 한 번 마주치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에 유달이 장미란을 보며 독촉했다.
“어서 시작하시지요?”
그녀는 상당히 난감한 기색이다.
“꼭 해야 하나요······.”
“약속은 당연히 지켜야지요? 분명 외국인 여자 딜러가 20분도 못 넘기고 뛰쳐나갔지요?”
“······.”
“미란 씨는 자신이 불리하면 약속을 깨버리는 그런 인간입니까? 이럴 수가~ 우리 보름이가 세상에서 가장 멋있다는 사람이 어떻게······.”
“아, 알았어요! 할게요.”
“민망해하지도 말고, 웃지도 말고, 정정당당하게 집행하시기 바랍니다.”
“알았다고요.”
장미란이 다가오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양덕수 씨, 그리고 김현호 씨 맞습니까?”
그녀의 당돌한 질문에 그들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렇소만.”
“네, 맞는데요?”
이어 장미란은 수색 영장을 집행하듯, 품에서 꺼낸 종이를 힘차게 펼쳐 보였다.
촥!
“각서 집행하겠습니다. 두 분의 협조 부탁드립니다.”
양덕수는 뭔가 하여 그녀가 들고 있는 종이를 살폈다.
“이것은 한강파 김 회장이 나한테 빌린 돈을 갚겠다는 각서 아닌가?”
“맞습니다. 이 각서에 부속 조항이 있지요? 김 회장 또는 그가 지정한 대리인이 게임을 신청하면, 당신은 거부할 권리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시행해 주시지요.”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닌데, 오늘은 유난히 요란을 떠는군?”
“······.”
양덕수가 차분하게 물었다.
“게임은 어디서 하는 게 좋겠나?”
“우린 어디나 상관없습니다.”
“그럼 이곳에 세팅하기로 하지. 게임 종목은?”
이에 대해선 유달과 장미란은 미리 의견을 나눴다.
“그것도 상관없습니다.”
사실 장미란은 유달이 잘하는 게임을 관철하고 싶었다.
하지만 유달은 자신이 못하는 게임이 어디 있냐며 완강히 거부했다.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문장까지 써가며, 상대방의 종목을 무조건 받아들이라 했다.
양덕수 측에서는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다.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군요. 그렇다면 섯다가 괜찮겠군. 가장 빨리 결판낼 수 있으니, 서로 좋지 않을까?”
“그렇게 하지요.”
양덕수가 뒤따라온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서둘러 세팅해.”
“알겠습니다.”
협상을 마친 장미란이 유달에게 다가갔다.
찌릿.
눈에 힘주고 노려보는 모습이 이제 만족했냐는 표정.
유달은 흡족한 미소 지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미란 씨의 강력한 기세에 놈들은 왠지 모를 위축감을 느꼈을 겁니다. 아무리 사나운 개도 개장수를 보면 꼬랑지 내리듯, 범죄자들은 본능적으로 경찰의 기운에 반응합니다. 그래서 제가 미란 씨만 보면 괜히 기를 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장난은 그만하고요. 상대의 요구를 모두 들어줬으니, 우리가 너무 불리한 거 아닌가요? 아마도 섯다는 김현호가 가장 잘하는 도박일 거예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저놈들에게 당할 일은 없을 겁니다.”
이어 그는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곳도 아주 그냥, 득실득실~ 합니다.”
***
썰렁하게 변한 VVIP 6번 방.
커다란 블랙잭 테이블을 비롯한 대부분의 집기류가 밖으로 치워졌고, 넓어진 중앙에는 원형의 포커 테이블 하나만 달랑 놓았다.
4명이 앉으면 적당한 크기에 의자도 두 개뿐이다.
세팅이 끝낸 도박장 직원들도 모두 나가고, 도박 대결에 필요한 최소 인원만 남았다.
김현호가 테이블로 다가가며 말했다.
“그쪽도 어서 와서 앉지?”
세팅 때문에 벽 쪽으로 피해있던 유달이 대꾸했다.
“두 명씩 편 먹고 하지요? 저는 여기 있는 호구님과 커플 하겠습니다. 그쪽은 명품으로 도배한 사장님과 편 먹으면 되겠네요.”
“플레이어가 4명이 된다는 건가?”
“아니요, 패는 그쪽과 나 두 개뿐입니다. 커플이 상의하고 결정하던, 나처럼 ‘칩돌이’로 쓰겠다는 목적이든 상관없지요.”
“그쪽은 둘이 앉지. 나는 혼자가 편해.”
“음, 음, 음, 음~.”
유달은 손가락과 고개를 동시에 저었다.
“내가 그쪽 사장님에게 물어볼 말도 있고, 룰은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첫판의 선을 양보하지요. 그 정도면 되겠습니까?”
양덕수가 테이블로 다가오며 대답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나는 그냥 앉아만 있어도 상관없는 것이니까.”
“웰컴입니다. 우리 모두 자리에 앉을까요?”
마침내 원형 테이블에 4명이 짝지어 앉았다.
이제 섯다판의 규칙을 정할 시간.
김현호가 말했다.
“기본으로 거는 밑돈은 천, 베팅은 무제한.”
“콜, 한쪽이 오링날 때까지 게임 포기 불가. 그쪽은 이 도박장에 있는 모든 칩이 되겠네요?”
양덕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여기에 있는 칩을 돈으로 바꾸면 강남의 빌딩 몇 채를 사고도 남아. 그런데 자네가 가지고 있는 칩은 고작 얼마나 되나? 얼추 밑천이 비슷해야 내가 받아들일 것 아닌가?”
“그렇다면 제가 보증인을 세우겠습니다.”
유달이 휴대폰을 꺼내 단축 버튼을 눌렀다.
통화가 되는 순간,
당당하기 이를 데 없던 유달의 음성이 바뀌었다.
“네~ 보름이 아버님, 바쁘십니까? 아, 다행이네요. 다름이 아니라, 깔끔하게 보증 한 번만 서주십시오.”
이어 그는 통화하던 휴대폰을 양덕수에게 내밀었다.
“받아보시죠. 명동 송 사장님이면 보증인 자격으로 충분하겠지요?”
“!”
양덕수는 놀란 기색으로 휴대폰을 받았다.
유달이 장미란에게 불만스럽게 말했다.
“보름이 아버님은 저에게 절대 돈을 안 꿔줍니다. 대신 보증은 가능하지요. 보통은 그 반대 아닙니까?”
“······.”
양덕수가 통화를 마치고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자네, 정체가 뭐지?”
유달은 휴대폰을 받아 주머니에 넣으며 되물었다.
“참 일찍도 물어보시는군요?”
“한강파 김 회장의 대리로 왔기에 전문 도박꾼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명동의 송 사장은 노름하고 얽힌 사람들은 상종조차 하지 않거든.”
“제 직업은 사주카페 사장 되겠습니다. 최고의 영험함을 타고난 무당이지요. 이제 서서히 불안감이 밀려오기 시작하시나요?”
“무슨 불안감?”
양덕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이에 유달은 바싹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내가 신기로 상대의 패를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이미 패를 알고 치는데, 무슨 수로 당하려고요? 게다가 신기로 상대의 패를 읽는 건 반칙이 아니지요?”
양덕수는 당연히 어이없어하는 반응이다.
“여기 회원 중에는 목사님도 있고, 스님도 있고, 신부님도 계시지······ 영험한 무당이라고 없었겠나? 하지만 어떤 신을 믿건 내 돈을 따지는 못하더군.”
“그리 긍정적인 마인드 나쁘지 않습니다. 사설이 너무 길었군요. 어서 시작하시죠?”
“당연히 그래야지.”
유달과 양덕수가 동시에 손을 들었다.
그들 뒤에 대기하고 있던 한강파 조직원과 도박장 직원이 칩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빠졌다.
유달이 선을 양보했기에 김현호가 화투를 잡았다.
척척척척척······.
그는 민첩한 손동작으로 화투를 섞어 내밀었다.
이에 유달이 미소 짓는 얼굴로 말했다.
“퉁~.”
슥, 슥, 슥, 슥.
김현호가 화투패를 나누어주면서, 세기의 도박 대결이 시작되었다.
***
역시나 유달은 자신의 패를 보지 않았다.
의자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댄 자세로 패를 확인하고 내려놓는 김현호를 바라보았다.
표정을 전혀 읽을 수 없는 완벽한 포커페이스.
김현호는 침착한 음성으로 베팅했다.
“5천.”
“콜!”
유달이 두 장의 화투를 뒤집었다.
8광에 6청단이니, 네 끗.
유달은 첫판을 지는 것이 목적이라 흐뭇한 표정인데,
스윽.
김민호가 던지는 패는 더 낫다.
3광에 10청단, 세 끗.
“헐!”
유달은 이긴 게 당혹스러운 반응이다.
이에 장미란이 테이블의 칩을 거둬들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는 이미 아래층에서 게임을 시작했어요. 첫 끗발이 개 끗발인 법칙이 적용되지 않아요.”
“그렇지요~?”
장미란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유달은 흔들렸던 정신력을 바로 추스를 수 있었다.
“이제 부정 탈 일이 없으니, 속전속결로 결판내죠. 어서 화투 섞어서 기리 받으세요.”
“제가요?”
“저는 관찰에 집중해야 합니다. 상대가 보통이 아니라 까딱 실수하면 우리가 골로 갑니다.”
“알았어요. 그런데 제가 화투를 쳐본 적이 없어서······.”
장미란은 화투를 만지는 것이 처음이나 마찬가지다.
TV나 주위에서 하는 것은 많이 봤지만, 직접 끼어들어 쳐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김현호 했던 식으로 바닥에서 화투를 잘 섞어서 양손으로 쥐었다.
척······ 척······ 척······.
카드와 달리, 손으로 잡고 가볍게 두드리듯 섞는 게 쉽지 않다.
생전 처음 화투를 잡아본 것을, 의심할 수 없는 손놀림이다.
김현호는 그녀가 내미는 화투를 턱짓으로 퉁했다.
유달이 베팅액수를 올렸다.
“1억.”
“다이.”
“헐······.”
김현호는 주저 없이 포기.
그 뒤로 소극적인 전개가 계속되었다.
유달이 배팅 액수를 높이며 김현호가 죽고, 김현호가 배팅 액수를 올리면 유달이 죽었다.
하지만 유달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서두르는 사람이 불리하게 됩니다. 멘탈이 중요한 도박은 더 심하죠.”
몇 판이 더 돌고 마침내 기회가 왔다.
유달은 자신의 패에 몰려 있는 원귀들을 살폈다.
‘쌍따봉!’
패를 살피는 원귀들 모두 쌍으로 엄지 척.
이는 광땡임이 틀림없다.
“1억.”
“1억 받고 5억.”
김현호가 죽지 않고 판돈을 더 올렸다.
그의 패도 만만치 않게 좋은 것이 들어왔다.
바글거리는 원귀들이 모두 엄지 척을 하고 있다.
이는 두 장의 패가 같은 땡이라는 반응.
하지만 쌍으로 엄지를 치켜들고 있는 원귀는 없다.
아무리 높아야 장땡, 유달의 광땡을 이길 수 없다.
“5억 받고 10억 더.”
“10억 받고 20억.”
판돈을 키워주니, 유달은 고마울 따름이다.
테이블 중앙이 500만 원짜리 블랙 칩으로 가득했고, 장미란은 계속 칩을 세느라 정신없다.
베팅 금액이 끊임없이 올랐기 때문인데,
“어쩌지요? 칩이 턱없이 부족해요. 올인 선언할까요?”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그러면 이겨도 올인한 금액밖에 못 받잖아요?”
“칩이 없는데 어떡해요?”
유달이 메모장을 주며 말했다.
그는 사주를 적을 수 있는 종이를 항상 가지고 다녔다.
“여기다 금액 쓰십시오. 송 사장님이 보증 섰으니 현금과 똑같이 취급됩니다.”
이어 유달은 더욱 과감히 베팅했다.
“20억 받고 50억 더.”
“······.”
김현호는 바로 베팅을 받지 않았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판돈에 양덕수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유달의 도발이 시작되었다.
“생각보다 새가슴이네?”
“······.”
김현호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
“아무리 머리 굴려도 소용없다고. 섯다는 머리 싸움이 아니라 눈치 싸움이야······.”
이어 유달이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아마도 눈치 100단은 넘어야, 나한테 이길 수 있을걸?”
그들이 누명을 씌운 황기준의 별명이 눈치 100단이다.
“!”
움찔한 반응을 보인 건 양덕수뿐이다.
“다이.”
김현호는 도발에 넘어오지 않고, 포기했다.
큰판을 가져간 유달이 외려 당혹스러운 기색이다.
“잠시, 작전 타임!”
유달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장미란에게 물었다.
“봤어요?”
장미란도 손으로 입을 가리며 대답했다.
“네, 똑똑히 봤어요.”
“김현호, 저놈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어요. 아무리 포커페이스라도 말이 안 되는 건데요?”
“내 추리가 틀린 것 같아요. 저들이 왕 구단주를 죽이고 황기준 씨에게 누명을 씌운 건 맞아요. 사기도박이 들통나서 먼저 선수 친 거지요. 저는 양덕수가 주범이고 김현호는 어쩔 수 없이 따랐던 종범이라 판단했는데, 제대로 빗나갔네요.”
“김현호가 주범이고 양덕수가 꼬봉이란 말입니까?”
“맞아요, 김현호는 완벽한 사이코패스에요. 양덕수는 자신도 모르게 조종당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무너트려야 할 목표는 양덕수가 아니라 김현호였네요.”
“그렇죠.”
유달과 장미란은 작전 회의를 마치고 김현호를 노려보았다.
수십억을 한 번에 날리고도 전혀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다.
유달은 그를 노려보며 시선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어서 패 돌리십시오. 저 뻔뻔한 얼굴, 조만간 길길이 날뛰며 환장하게 만들어 드리지요.”
그의 불타는 의지에 호응하듯 장미란도 능숙하고 전투적으로 화투를 섞었다.
척척척척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