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맞선의 연장선
광무사 빌딩 로비.
미소 띤 얼굴로 다소곳이 서 있는 데스크 여직원 뒤편.
일월성신(日月星辰)을 형상화한 민속화 느낌의 수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유달이 으쓱하며 말했다.
“저거 그린 분 제가 잘 압니다. 어렸을 때 저한테 피카츄 많이 그려줬습니다. 이모님이 들어오면 재빨리 둘리로 바꿨지요. 그리하여 노란색에 번개 꼬리를 가진, 아기 공룡 ‘피카리’라는 명작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나원이 실없는 웃음을 터트릴 때다.
데스크 여직원이 인터폰을 받았다.
그녀는 간단히 통화를 마치고 유달에게 말했다.
“14층, 성심관(聖心館)에서 다리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유달이 로비 중앙의 승강기로 가려는 것을 이나원이 만류했다.
“그쪽 아니에요. 일반 엘리베이터는 12층까지만 운행해요. 광무사는 후문 쪽에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어요.”
“먼저 앞장서시지요.”
유달은 그녀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천존이라는 놈이 영혼의 배필이라며 청혼했을 때, 잠시 좋았다가 바로 짜증 났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어쨌든, 나원 씨가 마음에 들어서 부인 삼겠다는 거 아닙니까? 관심을 받는다는 건 일단 좋은 거죠. 그런데 이게 무슨 구운몽도 아니고, 일곱 번째 부인이라니 진심으로 열 받을만하죠.”
“죄송하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좋았던 적은 1분, 1초도 없었어요.”
“나원 씨가 죄송할 게 아닙니다. 오늘 그놈 면전에다 확실히 말씀하세요. 너 재수 없으니까, 다시는 얼쩡대지 말고 꺼지라고 말입니다.”
그녀는 광무사 전용 승강기 앞에 멈춰서며 말했다.
“정말 지긋지긋하게 했죠. 부탁도 하고, 화도 내고, 죽겠다고 협박도 하고요. 하지만 소용없었어요. 천존의 부인이 되는 건 운명이라 거역할 수 있는 게 아니래요.”
사르르.
승강기 문이 열리자 둘은 차례로 올랐다.
유달은 편안히 승강기 벽에 몸을 기대고, 이나원은 14층 버튼을 눌렀다.
승강기가 움직이자 유달이 말했다.
“그놈 참 교묘하더군요. 직접적으로 나원 씨를 괴롭히진 않았어요? 언제나 나원 씨와 가까운 사람들을 이용해 감시하고 설득했으니 말입니다.”
그녀의 답변서에 적혀 있는 내용이다.
이나원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제가 더 힘들었죠. 서서히 질식시키듯 압박하여, 어느 순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길 바라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아요. 저의 방식대로 버티면서 끝까지 싸울 거예요.”
“훌륭하십니다! 그래야 제가 돕는 맛이 나죠. 그런데 그놈은 왜 그리 부인의 숫자를 늘리려고 합니까?”
“천존의 영적인 능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래요. 음양의 이치에 따라 음기가 특별히 강한 여자를 영적인 부인으로 두어야 균형을······.”
“풉!”
유달은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트렸다.
이에 이나원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렇게 웃는 거지요? 음기가 강하다는 것을 뭔가 이상한 쪽으로 해석한 건······”
“당연히 아닙니다. 그놈의 주장이 너무 터무니없어 웃음 겁니다.”
“네······.”
“만약 영적인 능력이 너무 강해 여자를 얻었다면, 저는 삼천궁녀를 거느렸을 겁니다. 뭐, 그전에 몸신에게 급살 맞겠지만 말입니다.”
띵동.
14층에 도착하여 그들이 승강기에서 내렸다.
왼편 복도 중간.
‘성심관’이란 공간으로 들어가자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
광무천존은 아니다.
30대 후반의 여인은 이나원을 처음 이곳으로 데려왔던 광무사의 신자다. 이나원이 믿고 따랐던 의대 선배이며 예전 병원의 동료 의사였다.
이나원은 그녀를 만나는 게 부담스러운 반응이다.
“지수 언니······.”
주춤하며 물러서는 그녀의 손을 강지수가 덥석 잡았다.
“나원아, 이게 어찌 된 일이니? 천존님과의 인연은 함부로 끊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유달이 끼어들어 억지로 잡은 그녀의 손을 떼어놓았다.
“정신은 그쪽이 차리시기 바랍니다. 종교계의 체면이 있지, 어떻게 포교를 다단계 수법으로 합니까?”
그녀가 표독스럽게 유달을 째려보는 때다.
딩딩딩딩, 딩딩딩딩······.
“접촉 금지하고, 대화 나누시기 바랍니다.”
유달은 성심관을 나와서 전화를 받았다.
“네, 미란 씨. 성과가 좀 있습니까?”
-종교법인 광무사에 대해 급하게 알아보긴 했는데, 지금 맞선 보는 중 아닌가요?
“맞선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조사하신 것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광무사는 엘리트 종교로 알려졌어요.
유달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신자들 대부분이 고학력의 엘리트이기 때문이에요.
“무슨 종교가 학력 보고 신자를 뽑습니까? 제 손님 중 고학력자는 더럽게 의심도 많아 점괘도 안 믿어요.”
-그건 제 알 바 아니고요. 광무사의 대표가 하버드 출신이긴 하네요. 이름은 김명관, 한국에 와서 스님이 되면서 큰 화제가 된 적이 있었네요. 광무는 그때 받은 법명이고요.
“그놈이 스님이라고요?”
당연한 반문이다.
일곱 번째 부인을 얻으려 했다가 문제가 된 것이다.
물론 법적인 혼인은 아니지만, 스님이 지켜야 할 행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은 파문되었어요. 한때는 매스컴에 주목받으며 젊은 지식인들이 그에게 인생의 조언을 얻기도 했죠. 하지만 그의 기이한 행동이 시작되면서 불교계와 문제를 일으켰어요. 결국은 파문당하고, 자신의 종교를 만든 거예요.
“알겠습니다. 저는 오늘 늦을 수도 있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요. 최대한 늦게 들어오세요.
통화를 마친 유달이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강지수는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이나원을 설득 중이다.
“천존님께 선택받은 건 영광이야. 모든 신자가 부러워하는 기회를 왜 거부하는 것인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그 기회, 그쪽에 흔쾌히 양보하고 싶군요.”
매섭게 노려보는 그녀에게 유달이 물었다.
“천존이란 자는 어디에 짱박혀 있습니까? 제가 무서워서 도망친 건 아니겠지요?”
강지수는 불편한 기색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천존께서는 먼저 오신 중요한 손님을 접대하고 계시지요. 잠시 짬을 내서 내려오실 겁니다.”
“그렇다면 저하고 나원 씨는 조용한 곳에서 알콩달콩 대화나 나누고 있겠습니다. 맞선의 연장선이니 함부로 끼어드는 건 사절입니다.”
유달은 이나원을 한쪽 구석으로 데려갔다.
강수지는 유달의 경고가 있었기에 접근하지 못했다.
이나원이 불안감을 떨치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정말 광무천존이 순순히 포기할까요?”
“아니면, 강제로 포기시키면 됩니다. 아마도 그놈은 뛰어난 사기꾼이거나 엄청나게 위험한 영적인 존재겠지요. 어느 쪽이든 저는 상관없습니다.”
***
광무사 빌딩 15층.
출입이 철저히 통제된 파계승 김명관의 거처다.
조선 시대로 시간을 되돌린 것 같다.
궁중 내부를 복원한 듯 예스러운 분위기에, 사람들 역시 옛날 의복을 입고 있었다.
응접실 중앙에 놓인 식탁.
쩝쩝쩝쩝쩝······.
김명관이 난잡한 소리를 내며 음식을 탐했다.
식탁 위의 차려진 것은 육류뿐이다.
곤룡포 차림의 그는 포트나 젓가락을 쓰지 않고, 양손으로 고기를 집어 먹으며 뼈를 발랐다.
툭.
뼈가 쌓인 큰 접시는 산이 되어 무너질 것 같다.
이를 말 없이 지켜보는 여인이 있다.
김명관 맞은 편에 앉은 그녀는 뒷모습은 유일하게 현실에 맞는 옷차림이다.
그녀는 김명관이 먹는 걸 끝내고, 기름기 가득한 손을 비단 수건으로 닦아내자 물었다.
“누구에게 또 살(煞)을 날린 거지?”
김명관은 차갑게 대꾸했다.
“그건 네년이 알 바 아니야.”
의자에 삐딱하게 앉은 그녀는 기죽지 않고 말했다.
“주교님이 함부로 힘을 쓰지 말라고 당부하지 않았나?”
“그것도 네년이 상관할 바 아니고······.”
현실 차림의 여인이 자세를 바꾸며 물었다.
“혹시 내가 네놈이 무서워서 참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년이 참고 안 참고는, 내 상관할 바가 아니고······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해.”
“내 살을 받아 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확히 말하면, 살이 튕겨서 다른 사람에게 맞았다면 말이다.”
“살이 튕길 수도 있나?”
“그러니까, 네년에게 묻는 거잖아?”
현실 차림의 여인이 잠시 생각하고 대답했다.
“주교님 빼고는 가능할 법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데?”
“그렇지? 그런 존재는 주교님밖에 없는 게 맞을 거야. 후후후, 내가 인생 처음으로 실수라는 것을 했군.”
“선무당도 아니고, 살을 잘못 날린 거야?”
“지겹게 말을 안 듣는 년 때문에 화가 난 상태였거든. 지금 자기 발로 찾아왔다니, 끝장을 내야지. 그렇지 않으면 신도들이 내 능력을 의심할 수도 있거든.”
식탁에서 일어서는 김명관에게 그녀가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앉지? 나는 승려였던 네놈이 고기 처먹고, 여자에 환장하는 거 상관하지 않아. 그런데 지금은 주교님의 전언을 듣는 게 먼저 아닐까?”
“금방 끝나니까, 조금만 기다리라고.”
김명관은 그녀의 경고를 바로 무시했다.
거들먹거리며 응접실을 나서는 그를 여섯 명의 부인이 따랐다.
탁자에 앉은 여인은 분을 삭이는 한숨을 발했다.
“후우······.”
이어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단축 버튼을 눌렀다.
“제임스, 나야······.”
이를 가는 그녀의 음성에도 전화 상대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무슨 일이야?
“땡중, 이 새끼를 언제까지 봐줘야 하지? 점점 더 심하게 미쳐가고 있어. 이제는 주교님의 전언을 무시하는 행동까지 한다고?”
상대방에게 좋은 소리 나오지 않았다.
-나한테 이런 화풀이 전화, 하지 말라고 했지?
“네가 이놈이 먹는 모습을 안 봐서 그래. 마기를 이기지 못해서 마신에게 흡수되고 있다고. 주교님은 왜 이런 놈을 일곱 사제에 포함 시킨 거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끊어.
“언제 통제 불능 상태가 될지 모른다고. 조직을 위해서 뭔가 조치해야 할 것 같은데?”
-그냥 둬.
“왜?”
-미친놈은 미친놈대로 써먹을 수 있어. 대마신의 부활을 막으려는 놈들에게 악몽을 선사하는 거지. 마신에게 먹힐수록 더욱 강력한 힘을 갖게 되고, 그런 힘을 가진 미친놈과 싸우고 싶어 하는 영적인 능력자가 있을까?
“잔인하지만 괜찮은 방법이네. 나도 그런 미친놈과는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
***
광무사 성심관 한쪽 구석.
이나원이 답변서 뒤쪽에다 무언가 열심히 그리고 있다.
그런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던 유달이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음~ 아니지요, 아니지요. 피카리는 그렇게 귀엽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두 종족이 혼합되어 기괴한 느낌이죠. 나원 씨는 글솜씨는 괜찮은데, 그림 실력은 꽝인 것 같습니다.”
“죄송해요.”
“뭐, 죄송할 것까지 없고요. 이번에는 끝말잇기 할까요?”
그들이 어떡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다.
째에엥~!
어디선가 거대한 징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뭐야? 어디서 이런 장엄한 소리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그에게 이나원이 말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거예요. 광무천존이 나온다는 걸 알리는 신호지요.”
“참, 가지가지 하는 놈이네······.”
유달은 팔짱 끼고 출입문 쪽을 지켜보았다.
성심관 안에 있던 신도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여섯 명의 부인을 거느린 김명관이 곤룡포를 휘날리며 등장했다.
그 모습은 마치 사극 속의 왕의 행차와 같다.
대동한 여섯 명의 부인 또한 고전적인 차림이었다.
유달이 불안에 떨고 있는 이나원에게 말했다.
“대박!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 미친놈인데요? 마기를 감당 못 하고 반쯤 먹힌 상태입니다.”
“위, 위험한가요?”
“당연히 위험하지요?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상대이기도 합니다.”
“왜요?”
“아무 걱정 없이 패도 됩니다. 마신이 떨어지면 누가 때렸는지 기억도 못 합니다. 설령 기억한다고 해도 문제없지요. 미친놈 말을 누가 믿어줍니까?”
유달은 누구의 예상과 달리 매우 기뻐하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