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답변서
유달은 식겁하여 고개 돌렸다.
그가 서 있는 신호등에서 50미터 정도 떨어진 도로다.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던 승합차와 불법으로 유턴하던 승용차가 추돌한 것이다.
요란했던 소리만큼 큰 사고는 아니다.
차량 운전자들이 ‘뒷목’ 잡고 내리자마자 상대방에게 고함치기 시작했다.
띠리리릭, 띠리리릭.
“!”
신호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알람이 들렸다.
유달은 서둘러 횡단보도를 건넜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뛰는 것과 다름없는 속도였다.
신호가 끝나기 전에 반대편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가 호텔이 있는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는 때다.
픽.
앞서 걷던 노인이 갑자기 고꾸라지는 것 아닌가!
“헐!”
타고난 반사신경의 유달도 어떻게 손 쓸 수가 없었다.
쿵.
땅에 머리가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났다.
“괜찮으세요!”
유달은 황급히 쓰러진 노인의 상태를 살폈다.
“으······ 으으······.”
의식은 희미하고, 머리에선 피가 흘러내렸다.
유달이 행커치프를 뽑아 상처를 지혈하며 소리쳤다.
“저기 노란 티에 청바지, 마침 스마트폰 들고 계신 여자분은 119에 신고해주시고요. 의사나 간호사, 응급처치에 능숙하신 분 계십니까?”
온갖 말썽에 휘말렸던 유달도 응급상황의 경험이 나름 풍부했다.
하지만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먼저였다.
아무도 나서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그가 응급처치해야 했다.
다행히 조심스럽게 나서는 사람이 있다.
“제가 한번 살펴볼까요?”
30대 초반의 여자였다.
“의사십니까?”
“예······.”
대답이 조금 시원치 않다.
그러나 어깨에 멘 핸드백을 뒤로 젖히고, 환자 옆에 앉는 순간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녀는 능숙하게 쓰러진 노인의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이 할아버지가 가슴이나 머리를 만지다가 비틀거리며 쓰러졌나요?”
“아니요, 그냥 갑자기 픽 쓰러졌습니다.”
그녀는 쓰러진 노인이 편히 숨 쉴 수 있게 돌려 눕히며 물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제발 들리세요?”
“으으······ 으으으······.”
파리한 안색의 노인은 희미한 신음만 발할 뿐이다.
유달이 불안하여 물었다.
“혹시 여기서 목 째서 볼펜 몸통 꽂거나, 폐에다 직접 주삿바늘 박아 숨을 트이게 하는, 그런 위급 상황입니까?”
괜한 설레발이 아니다.
하도 어이없는 일을 많이 당하다 보니, 최악의 경우가 먼저 떠올랐다.
그녀는 핸드백을 열며 대답했다.
“뇌진탕 증세가 있는데, 우려할 정도는 아닌 것 같네요. 환자의 상태를 살피며 구급차가 오기를 기다리죠. 이걸로 지혈을 계속해 주시겠어요.”
그녀는 핸드백에서 꺼낸 손수건을 내밀었다.
“알겠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쓰러졌던 노인은 다행히 의식을 되찾았다.
와앙, 와앙, 와앙, 와앙!
119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도 점점 가까워졌다.
유달이 여의사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저기요? 제가 매우 급한 약속이 있어서요. 이만 손 떼고 일어서도 되겠습니까?”
약속한 맞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환자 상태도 호전되었고, 구급대가 도착하면 어떤 상황이었는지 설명해야 하는 등, 골치 아픈 일에 얽히기 싫은 것이다.
“그래요. 어서 가보세요.”
여의사는 흔쾌히 승낙하고, 자리를 바꿔 지혈했다.
“고맙습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 진심으로요.”
유달은 미소 지어 인사하고, 사고 현장을 떠났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호텔과 이어지는 언덕길을 올랐다.
“차로는 금방인데······ 허이, 피!”
살인 현장의 법인처럼 양손이 피범벅이다.
와이셔츠 소매와 새로 드라이한 슈트도 곳곳이 검붉게 물들었다.
“오해받으면 안 되지.”
유달은 양손을 겨드랑이에 넣고 길을 걸었는데,
끼이이익!
앞에서 내려오는 고급승용차가 브레이크를 밟아대며 중심을 못 잡는다.
“뭐야?”
운전자는 하얀 장갑 끼고 있는 사모님이다.
그녀는 차가 제멋대로 움직이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끼익, 끼익, 끼익~.
휘청거리는 차가 인도에 있는 유달에게 향했다.
“아줌마, 미쳤어!”
유달이 고함치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가 움직이려 하는 방향으로 차의 진로도 똑같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핸들을 꽉 잡은 사모님은 울려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는 하소연이다.
부아아앙!
엔진이 과열되는 소리와 함께 승용차가 급발진하듯 돌진했다.
“으아악!”
“까아악~!”
유달과 사모님의 비명이 동시에 터졌다.
승용차가 사람을 덮치는 아찔한 순간,
사모님은 핸들에서 손을 떼고, 하얀 장갑 낀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쿵-!
다행히 승용차는 인도 턱에 부딪혀 멈췄다.
유달은 당황하여 엉덩방아 찧은 것일 뿐, 아무 데도 다친 곳이 없다.
이내 몸을 일으켜 승용차를 살피는 유달은, 운전대에 머리 박고 있는 사모님의 상태가 외려 더 걱정이다.
잠시 후.
덜컥······.
운전석의 사모님이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사, 사, 사, 살았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운전을 그따위로······.”
유달은 일단 겁먹은 사모님을 안심시키고, 욕을 한껏 퍼부어주려 했는데,
“까악~ 피, 피, 피, 피~!”
그녀는 피범벅인 유달의 손과 옷을 보고 난리 쳤다.
자기 때문에 크게 다칠 줄 알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다.
“119, 119, 119, 119······.”
그녀는 주문을 외우듯 연신 중얼거렸지만, 손이 떨려 제대로 핸드폰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한편 유달은 호텔 건물을 바라보며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에게 순탄한 맞선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오늘처럼 고난에 가까운 경우는 처음이었다.
***
엠파이어 호텔 로비.
남자 화장실 세면대 앞.
치이이익.
유달은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에 연신 손을 비벼대며 피를 씻었다.
“하다 하다 이제 피까지 보고······.”
힐끗 휴대폰 시간을 보니, 아직 10분 정도 남았다.
“누가 작심한 게 아니면 이렇게까지 일이 꼬일 리 없는데······ 설마?”
몸신을 의심했던 유달은 이내 고개 저었다.
흙탕물을 튀기는 작은 시샘이면 모를까,
유달이 크게 다칠 수 있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해 보자······ 이제는 어떤 말도 안 되는 사건이 터질지, 은근히 기대까지 되네!”
확, 확!
그는 세차게 손을 흔들어 물기를 털어냈다.
곧바로 북북, 핸드타올을 뜯어 꼼꼼히 손 전체를 닦아내고, 얼마나 깨끗해졌는지 확인했다.
“역시 안 되나?”
몇 번이나 비누칠해도 손에 묻은 피 얼룩을 깨끗이 없앨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에겐 마지막 비상 수단이 있다.
스윽, 스윽.
그는 사모님에게 사고 보상비 대신 받은 하얀 장갑을 끼고 화장실을 나섰다.
뚜벅뚜벅.
맞선 장소는 1층 커피숍이다.
유달이 문 앞에 있는 여자 직원에게 물었다.
“이미옥 커플매니저를 만나러 왔는데요?”
“네, 따라오십시오.”
유달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높은 천장에 피아노도 있고, 탁자 바닥엔 융단이 깔린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공간이다.
“아, 저기 계시네요.”
유달이 이미옥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맞선 상대는 아직 안 왔는지, 그녀 혼자였다.
“늦지 않았지요?”
“네, 정각이네요. 그런데 옷이······.”
유달은 정장 상의를 벗어 어깨에 걸치고, 와이셔츠 소매는 반 팔처럼 접어 올렸다.
더 심한 것도 있다.
“하얀 장갑은 포인튼가요?”
“아직 여자분이 안 오셨으니, 이 장갑에 얽힌 사연을 들려드리지요. 사거리에서 교통사고가 날 때부터 뭔가 불안했습니다.”
유달은 소파에 앉자마자 커피숍에 오는 과정을 모험담처럼 늘어놓았다.
이미옥은 한 편의 괴담을 듣는 듯 놀랍다는 표정이다.
그렇게 둘은 심심치 않게 시간을 보내고, 30분이 지났을 때다.
유달이 핸드폰 시계를 보여 주며 말했다.
“아쉽게도 여성분은 안 오시나 봅니다. 30분 늦으면 일어나도 된다고 사전에 약속했죠?”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요. 일이 생겨서 늦겠다는 문자를 받았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약속을 칼같이 여기는 사람이라.”
유달이 단호히 거절하고 일어서는 때다.
통통통통통.
커피숍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오는 여자가 있다.
하얀 원피스 곳곳에 붉은 얼룩이 번져 있고, 그녀 역시 호텔직원들이 쓰는 하얀 장갑을 낀 모습이다.
“헐, 다른 사람들이 커플룩인 줄 알겠는데요?”
유달은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그녀는 쓰러진 노인을 돌봐줬던 여의사였다.
끝까지 남아 그 노인을 구급차에 태워 보내느라 손을 씻을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 역시 억지로 맞선을 보러온 게 분명했다.
만약 30분 이상 지각이면 맞선 횟수 추가된다.
그녀는 이를 피하려 호텔직원의 장갑을 빌려 끼고 달려온 게 분명했다.
통통통통통통.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녀는 많이 늦은 게 염치없던지 연신 고개 숙여 사과했다.
“사과는 제가 해야지요. 쓰러진 노인분은 구급차에 태워 잘 보내드렸습니까?”
“어?”
그녀가 깜짝 놀라 고개 들자, 유달이 하얀 장갑을 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오늘의 맞선남 유달입니다. 이나원 씨, 맞지요?”
“급한 일이라는 게 이거였군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이미옥은 손뼉 치며 기뻐했다.
“세상에 이런 인연이 있다니요?”
그녀는 이 둘이 하늘이 내려준 인연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표정이다.
***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호텔 커피숍.
이미옥은 떠나고 유달과 이나원만 남았다.
유달이 먼저 그녀에게 궁금한 점을 물었다.
“힘들게 공부해서 의사가 되셨을 것인데, 왜 관두시고 미용사가 되셨습니까?”
“그게요······.”
이나원은 핸드백에서 꺼낸 종이를 내밀었다.
프린트 한 A4 용지를 반으로 접은 것이다.
“이게 뭔가요?”
“왜 의사를 관뒀느냐, 그 질문을 하도 많이 들어서 적어서 가지고 다녀요. 편하게 보시고 돌려주세요.”
“이런 신박한 방법이!”
유달은 그녀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역시 비슷한 질문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매우 잘 봤습니다. 이해가 쉽게 잘 쓰셨네요.”
답변서를 돌려주는 그에게 이나원이 물었다.
“유달 씨는 왜 사법고시에 붙고도 사주카페를 하고 계시나요?”
“저는 적어 온 게 없으니 직접 말씀드리지요. 무당은 무당답게 무당짓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약간의 일탈이나 방황은 상관없는데, 완전한 전업은 불가능합니다.”
“어찌 보면 잔인한 천직이네요?”
“생각하기 나름이지요. 요즘처럼 일자리 구하기 힘든 세상에선 이보다 고용보장 확실한 직업도 없지요. 그런데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손 씻는 것에 열중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볼일을 못 봤네요.”
“네······ 그러세요.”
유달이 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커피숍 내에 있는 화장실이 아니라 아까 손을 씻었던 로비 화장실이다.
유달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몸을 벽에 바싹 붙였다.
바로 뒤따라 들어오는 남자가 있다.
30대 중반에 말끔한 정장 차림이다.
그는 유달이 어디 있는지 찾으려 두리번거렸는데,
“나와 맞선 보는 여자와는 어떤 사이야?”
“!”
흠칫하는 그에게 유달이 추궁하듯 물었다.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서로 사랑? 짝사랑? 스토커? 첫 번째면 내가 순순히 물러날 용의도 있는데, 그쪽은 암만 봐도 세 번째 같단 말이지. 쥐새끼처럼 남의 맞선 자리를 엿보는 이유가 뭘까?”
순간적으로 당황했던 남자가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유달이 뭔가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말투였다.
“맞선보는 게 불법인가?”
“그 여자에겐 이미 주인이 있단 말이다.”
“주인? 커플매니저가 유부녀를 소개해 주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똑바로 들어. 네놈이 넘보는 여인은 광무천존께서 점 찍은 배필이다. 험한 꼴 당하고 싶지 않으려면 당장 여기서 떠나.”
“싫다면?”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네놈에게 벌어졌던 일이 모두 우연일 것 같은가? 갑자기 사람이 쓰러지고, 이상하게 움직이는 차가 네놈을 덮치려 했지?”
“오호, 그게 바로 광무천존이 한 짓이라고?”
“그렇다. 천존께서 마음먹으면 못 하는 일이 없지. 지금 떠나지 않으면 어떤 사고가 또 벌어질지 몰라. 그때는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 내가 장담하지.”
유달은 전혀 겁먹은 기색이 아니다.
자신을 손가락질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감히 나를 협박하시네······ 광무천존? 사이비 잡신을 믿는 놈들이 어디서 까불고 있어. 그 손가락 확 부러트려 줄까!”
“!”
“천존이고 만존이고, 도전 받아준다고 전해. 내가 뜨는 순간, 네놈들은 전부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 장담하지. 너부터 덤벼볼래?”
그는 유달의 사나운 기세에 완전히 위축되었다.
“어, 어, 어리석은 놈, 나는 분명히 경고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그는 도망치듯 화장실을 빠져나갔고,
유달은 세면대 거울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 빼고 그런 게 가능한 놈이 있나······ 초능력자? 외계인?”
잠시 후.
뚜벅뚜벅.
유달은 씩씩거리는 발걸음으로 이나원에게 다가갔다.
그는 자리에 앉지 않고, 탁자를 손바닥으로 쳤다.
탕.
깜짝 놀라 올려보는 그녀에게 유달이 물었다.
“대체 광무천존이란 놈이 누굽니까? 의사를 때려치운 이유도 그놈 때문인 것 같은데, 아까 주신 답변서에는 그런 내용이 없더군요.”
그녀의 손이 조용히 핸드백으로 행했다.
곧이어 그녀는 종이 뭉치를 내밀며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말재주가 너무 없어서······.”
처음 답변서와는 비교도 안 되게 두꺼웠다.
@
강남구 삼성동 광무사(廣無寺) 빌딩.
유달과 이나원은 호텔 라운지 같은 대기실에 앉아 있다.
“정말이지, 나원 씨는 작가를 해야 했어요. 어쩌면 이렇게 머릿속에 속속 들어오게 잘 씁니까?”
그는 거듭해서 읽고 있는 답변서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나원은 어색한 웃음만 지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 빌딩에 있는 광무천존이란 놈이 스토커 짓을 한다는 거 아닙니까? 경찰에는 신고하셨습니까?”
“했는데······ 소용없더라고요.”
“알겠습니다. 일어나시죠.”
유달이 안내데스크로 걸으며 말했다.
“요즘은 무당도 기업화 하나 봅니다? 이리 좋은 15층짜리 빌딩의 주인이라니 말입니다.”
이어 그는 데스크 여직원에게 말했다.
“광무천존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놈이 스토킹하는 여자분과 그녀의 맞선남이 왔다고 전해주시면 됩니다.”
이나원이 우려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정말 우리끼리 괜찮을까요?”
“경찰 소용없다면서요?”
“······.”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분명 말씀드렸죠? 복 받을 거라고 말입니다. 지금부터 불행 끝, 행복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