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굿 카페-47화 (47/183)

47화- 임의제출

김포공항과 인접한 쇼핑센터.

이동진 검사가 법무팀장에게 다가갔다.

그는 동영상까지 찍는 구경꾼들을 슬쩍 둘러보며 말했다.

“이런 모습 보이면, 양쪽 다 좋을 게 없습니다. 검찰 수사에 협조하는 차원에서 임의제출하시죠?”

법무팀장은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순순히 내줄 것 같았으면,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지도 않았다.

“죄송하지만, 저 안에 든 것은 업무상 비밀에 관계된 것입니다. 압수·수색 영장이 떨어진다고 해도 내어줄 수 없습니다.”

“제가 직접 온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업무상 비밀은 건드리지 않고, 사건에 관한 증거만 가져가겠습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시고, 임의제출하시죠.”

답답한 듯 귀밑머리를 긁적이는 법무팀장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이동진 검사님이라고 하셨습니까? 특수부 아니, 반부패수사부가 왜 이런 사건을 맡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부장님도 검사님이 이곳에 온 걸 알고 있나요?”

“제가 보고하면 곧 아시게 되겠지요? 오늘을 일찍 퇴근하셨습니다.”

법무팀장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주위를 살피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이게······ B·H의 뜻입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반부패수사부에서 나선 게 계속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이동진은 엷은 웃음 지으며 대꾸했다.

“그건 알아서 생각하기 바랍니다. 저는 증거에만 관심 있으니 임의제출하시지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영장 없이 불법적인 압수·수색을 진행한다면, 언론계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그 책임은 고스란히 검사님의 몫이 될 겁니다.”

“영장은 여기 오기 전에 미리 청구했습니다. 혹시 영장 판사가 이번 청구를 기각하리라 생각하십니까?”

“······.”

“중앙지검 반부패수사부의 검사가 중요성을 감안해 직접 현장까지 왔는데, 그런 판결을 내릴까요? 대한민국 모든 검사의 자존심을 짓밟는 짓인데요.”

“!”

이동진은 한결 더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현명하게 판단하십시오. 만약 저 보관함에서 사건의 중요한 증거가 나오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강일보는 사주의 손자가 저지른 범행을 은폐하려 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고, 그 책임은 신강일보 전체가 감당하게 됩니다. 지금이라도 임의제출할 의향이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어느 쪽이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지, 머지않아 밝혀지겠지요.”

이동진은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이에 법무팀장은 바로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김 검, 내가 물어볼 게 있는데, 중앙지검 반부패수사1부에 이동진 알아? 대체 어떤 놈이야? 뭐라고······ 개또라이!”

휙.

당사자가 뒤돌아보자, 법무팀장은 급히 목소리를 낮춰 통화했다.

이동진은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간다는 표정으로 형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영장이 발부되려면 시간 조금 걸릴 겁니다. 아직 저녁 안 드신 분 있으면, 저와 함께 식사나 하시지요.”

모두 먹었는지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는데,

“저는 짜장으로 하겠습니다.”

유달이 한 발짝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다른 분은 없으십니까?”

유달도 오늘 처음 보는 사람과 단둘이 밥 먹기는 껄끄러운 모양이다.

옆에 있던 장미란을 슬쩍 끌어당겼다.

“이분도 열심히 뛰어서 배가 꺼졌을 겁니다.”

“네······ 배가 좀 출출하긴 하네요.”

“가시지요. 제가 두 분께 맛있는 저녁 대접해 드리지요.”

“사양치 않겠습니다. 폐하······ 아, 아니, 검사님.”

그들은 위층에 있는 식당가로 향했다.

***

김포공항 쇼핑센터 4층 중식당.

식사는 이미 끝냈고, 커피 한잔하면서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유달의 손에는 이동진의 사주가 들려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하여 살피는 모습은 사뭇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이동진이 옆자리의 장미란에게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이런 걸 꼭 해야 합니까? 저는 점이나 운세 같은 걸 믿지 않습니다.”

“밥을 사신 것에 대한 유달 씨의 성의 표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검사님께 해가 될 건 없을 거예요.”

마침내 유달이 종이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작년에 아주 큰 인생의 변곡점이 있었군요?”

이동진은 담담히 대답했다.

“예······ 아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죄송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때로는 큰 슬픔이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기도 하지요.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검사님의 경우엔 매우 긍정적인 쪽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특별히 말씀드릴 게 없네요. 그런데 혹시 종교는 있으십니까?”

“아니요. 무교입니다.”

“미리미리 길 닦아 놓는 것도 좋겠지요. 크리스천이 되심이 어떠십니까? 이왕이면 아주 큰 대형 교회에 다닐 것을 권장합니다.”

“하하하, 무속계에 몸담고 있다면서 상당히 관대한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나중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어 그는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저는 수사기관의 권위를 내세워 민간인의 수사를 만류할 마음 없습니다. 특히나 저는 장 팀장님이 퇴직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곤란한 일이 생기면 언제라도 연락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커피도 다 마셨으니 이제 일어날까요?”

“네, 그러지요.”

이동진이 계산을 하기 위해 먼저 일어나 계산대로 향하는 때다.

유달이 극히 수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영부인이 될 마음은 없으신지요?”

“······.”

장미란은 대꾸할 가치를 못 느꼈는지, 설레설레 고개 저으며 가게 밖으로 나갔다.

유달이 쪼르르 따라붙으며 말했다.

“내 욕심 채우자는 게 아니고요. 이 나라를 위한 충언입니다. 고금의 역사를 보면, 현명했던 왕들이 여자 잘못 만나 정사를 그릇 친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저는 대한민국의 승승장구하는 미래를 위해 미란 씨를 영부인으로 정중히 추천······.”

장미란이 살심을 품은 듯 노려보자, 유달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이동진과 조금 떨어져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바로 아래 내려다보이는 3층.

검찰 수사관들이 보관함 쪽으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동진은 성큼성큼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내려가 그들과 만났다.

곧바로 그는 발부받은 압수·수색 영장을 들고 법무팀장에게 다가갔다.

“강제적으로 집행할까요?”

법무팀장이 난감하여 입술을 깨무는 때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는 손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받았다.

“네, 회장님······ 네, 네······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법무팀장이 이동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꺼낸 보관함 열쇠를 건네주며 말했다.

“검찰 수사에 협조하는 차원에서 임의제출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동진이 열쇠를 받아 쥐는 순간,

“아, 씨! 미치겠네······.”

문일진이 짜증 내며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이에 유달이 고자질하듯 이동진에게 말했다.

“저놈 체포해야 하지 않습니까?”

“임의제출하는 성의를 보였는데,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 출국 금지 내리면 어디 숨을 곳도 없습니다. 조만간 소환해서 조사하면 됩니다.”

“의뢰로 너그러운 모습인데요?”

“제가 요즘 바쁩니다. 저놈보다 먼저 일망타진할 놈들이 있어서요.”

“그놈들이 누굽니까?”

“내일 뉴스 보십시오.”

이동진은 기대하라는 웃음 지으며 보관함으로 걸어갔다.

@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실내 공간.

유달은 장미란과 나란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오늘 오전 9시, 글로벌 투자회사 골드윙의 권도훈 대표가 전격 체포되었습니다.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부의 발표에 따르면, 권도훈 대표는 저수지 사건의 주범으로 12건의 살인 및 살인 교사. 그리고 고(故) 이재형 경장의 살인 교사 협의까지 더해서 체포했다고 합니다. 이날 검찰은 대규모의 인원을 동원하여······.

유달은 재미난 영상을 보듯 경박한 웃음을 터트렸다.

“오호호호, 이게 바로 사이다지요. 이렇게 제대로 설거지해주는 사람 있으니 얼마나 편합니까? 이동진 검사는 우리와 뭔가 인연이 있나 봅니다. 오호호호, 그놈의 조직원들까지 깡그리 체포되었어요.”

툭.

장미란이 그의 어깨를 치며 목소리를 낮추라 주의 주었다.

갑자기 조용해진 실내 공간.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카메라 불빛이 터지고, 강단에 올라선 남자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사건·사고가 많은 날임에도, 이렇게 많이 참석해주신 내외신 기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는 침울한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은 ‘큰 나라 큰 일꾼당’ 홍선택 총재님의 아드님이지요. 홍세준 ‘바른 소리 정책연구소’ 대표님이 직접 나오셔서, 말도 안 되는 루머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유달과 장미란이 앉아 있는 곳은 K당 총재의 아들, 홍세준이 자청한 기자 회견장이다.

짝짝짝짝짝짝.

열성 당원들의 박수를 받으며 홍세준이 등장했다.

그는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 주듯, 힘없는 발걸음에 초췌한 얼굴이다.

중앙에 놓인 탁자에 앉은 그는, 울먹이는 듯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나날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입에 담을 수 없는 루머가······.”

유달은 의자에서 축 늘어지는 관람 자세로 돌입했다.

“저놈이 KTS의 마지막 놈이군요. 바른 소리 정책연구소의 대표라······ 저는 무슨 헛소리를 할지 은근히 기대되는데요.”

홍세준은 한참이나 울분을 토했다.

“제가 그때 맨하탄 호텔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악의적인 루머처럼 친구들과 함께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은 분은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때의 진실을 밝혀줄 분을 모셨습니다. 바로 제 약혼녀입니다.”

검은색 바지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여인이 당당히 걸어와 그의 곁에 앉았다.

“저는 세준 씨의 약혼녀 주혜빈입니다. 그날 호텔에서 세준 씨는 저와 함께 있었습니다.”

유달의 영혼 없는 탄성이 터졌다.

“와······ 이런 반전이······.”

주혜빈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때는 우리가 만난 지 300일이 되는 날이었어요. 저는 세준 씨와 약속한 대로 호텔 칵테일 바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지요.”

“썩을 연놈들이 지랄을 떠는구나.”

“!”

장미란이 돌아보니 유달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같잖다는 듯 주혜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약속을 개뿔, 기념일을 잃어버린 썩을 놈 찾으러 호텔에 간 것이고. 칵테일 바는 열 받아서 술 처먹으러 들어간 것이지.”

장미란은 유달과 주혜빈을 번갈아 살폈다.

“세준 씨는 약속보다 조금 늦게 왔고, 우리는 바로 호텔 방으로 들어갔어요. 세준 씨가 저를 위해 근사한 이벤트를 마련했거든요. 아마도 많은 분이 칵테일 바에서 저를 보셨을 거예요. 이것이 그때 지불한 칵테일 바의 카드 영수증이에요.”

그녀가 들고 있는 영수증은 크게 확대되어 곳곳에 설치한 TV에 나왔다.

유달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호텔 방에서 이벤트는 지랄, 섞을 놈이 바람 피는 줄 알고 다른 호텔 가서 맞바람 핀 주제에.”

장미란이 침착히 물었다.

“어떤 호텔이었죠?”

“강남에서 제일 큰 호텔이지.”

“누구를 만났는지 알 수 있을까요?”

“오호라, 한국놈이 아니라 미국놈이었네? 그러니까 저리 당당히 거짓말을 하는 것이로구나.”

장미란은 더욱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미국 남자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저 섞을 년은 실베스터라고 불렀다. 시애틀이란 곳에 살고, 돈을 만지는 놈이구나. 다음 날 바로 비행기 타고 떠났다.”

“생김새는 어떤가요? 백인, 흑인, 히스패닉, 아니면 동양계인가요?”

유달이 물었다.

“무슨 ‘계’요?”

원상태로 돌아온 것이다.

장미란은 재빨리 이동진 검사에게 전화했다.

“미국인 한 명 찾아주세요. 이름은 실베스터, 금융계에 종사하고요. 조수아 사건이 있던 날 강남 엠파이어 호텔에서 묵었고요. 다음날 시애틀행 비행기를 타고 떠났어요.”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조사해서 알려드리죠.

강단 위의 주혜빈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그때의 상황을 설명했고, 이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기 충분했다.

기자 회견이 거의 끝나갈 때다.

띵동.

장미란에게 문자가 왔다.

“그렇지!”

서둘러 이를 확인한 장미란의 얼굴에 회심이 미소가 감돌았다.

이어 그녀는 번쩍 손을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사회자가 만류했다.

“조금 있으면 주혜빈 씨의 설명이 끝납니다. 질문은 그때 따로 받겠습니다.”

“아니요. 지금 하겠습니다. 저는 그때 수사를 담당했던 형사입니다. 주혜빈 씨가 하는 거짓말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좌중의 웅성거림 속에 주혜빈의 마이크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무슨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가요?”

“사건이 있던 그 시간, 당신은 강남 엠파이어 호텔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있지 않았나요?”

주혜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그때 세준 씨와 함께 있었습니다. 형사님께서 뭔가 잘못 알고 계시는군요.”

이를 기다렸다는 듯 장미란이 휴대폰을 추켜들며 목청을 높였다.

“이 핸드폰에는 실베스터 베넷이라는 미국인의 SNS 사진이 있습니다. 과학 수사팀에선 사진 찍은 시간이 사건 발생 전후이고, 찍은 장소는 강남의 엠파이어 호텔, 그리고 함께 찍은 여인은 당신임을 확인했습니다. 주혜빈 씨에게 다시 묻겠습니다. 사건이 있었던 그날 밤, 당신은 누구와 함께 있었습니까?”

순간, 표정이 굳어지는 주혜빈.

장미란은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았고, 군중들은 긴장한 기색으로 둘의 눈싸움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장미란 옆에 앉아 있는 유달은,

“밤밤 바라밤.”

아침 드라마의 마지막 정지 장면처럼,

긴장된 상황을 극대화하는 음악을 입으로 연주했다.

“밤밤 바라밤! 바라바라바라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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