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잘살아보세
밤 10시가 넘은 시간.
서울 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 인근 작은 음식점.
간판 불도 꺼져 있고, 가게 셔터도 내려진 상태다.
유달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장미란에게 물었다.
“약속 장소가 여기 맞습니까? 저는 지금 무지하게 배가 고프거든요······.”
닫힌 곳은 이곳뿐, 다른 음식점은 계속 영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맞아요. 여기······ 모두 모였나 보네요.”
장미란은 음식점이 아닌 2층 계단을 올라갔다.
띵딩딩, 띵딩딩.
그녀가 인터폰을 누르는 곳은 일반 가정집이다.
철컥.
인터폰으로 대꾸 없이 바로 문이 열렸다.
유달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장미란을 따라 가정집 안으로 들어갔다.
50대 부부가 반갑게 그들을 맞아주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장 팀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앞치마를 두른 안주인이 그렇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은 애매한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저희야 늘 그렇지요. 어서 들어오세요. 함께 오신 손님도요.”
“네······.”
유달은 신발 벗고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장미란과 함께 거실로 향하는 그는 꼭 집들이에 초대받은 기분이다.
주방에서는 음식 만들기가 한창이고, 거실에서는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차려진 음식을 먹고 있다.
남녀가 섞인 6명인데, 유달이 아는 사람들도 있다.
호박 엔터테인먼트의 박상진 대표와 정찬일 벌떡 일어서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쪽으로 앉으세요.”
유달과 장미란은 일부러 비워둔 듯한 중간 자리에 앉게 되었다.
곧이어 안주인이 다가와 수북하게 쌓아 올린 밥그릇을 유달에게 내밀었다.
“많이 시장하셨죠?”
“아이고~ 감사합니다.”
유달은 넙죽 받아서 바로 먹기 시작했다.
푸짐한 반찬 덕분에 평소보다 먹는 속도가 더 빠르다.
순식간에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정중하게 빈 그릇을 안주인에게 내밀었다.
“추가 부탁드립니다. 새 밥그릇 필요 없이, 여기에다 마음껏 담아주시면 됩니다.”
“정말 복스럽게 잘 드시네요.”
안주인이 빈 그릇을 가지고 일어나자, 유달이 장미란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딥니까? KTS를 요절낼 중요한 회의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는 조수아 양의 부모님 댁이에요.”
“······.”
순간, 표정이 굳어진 유달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제가 부담스러운 자리 싫어하는 거 잘 알잖아요? 갑자기 소화가 안 되는 느낌이······.’
‘딸을 위해 고생하셨던 분들에게 한 끼 대접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거절해요.’
‘그렇다면 추가로 시키기 전에 말했어야죠?’
‘왜요?’
‘저는 밥값은 반드시 하는 사람입니다. 저 엄청난 밥값을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유달이 기겁하는 이유가 있다.
조수아의 어머니는 하늘을 찌를 듯 밥을 떠 왔다.
“많이 들어요.”
유달이 방긋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 잘 먹겠습니다.”
그는 주는 밥 사양한 적 없고, 많다고 남긴 일은 더더욱 없다.
아주 맛있게, 하늘을 찌를 듯한 밥그릇을 해치웠다.
***
식사가 끝나자 분위기가 진중해졌다.
음식상은 치워지고, 작은 다과상이 놓인 거실.
장미란이 조수아의 부모에게 말했다.
“힘든 싸움이 될 거예요. 언론과 여론 모두 좋지 않을 것이고, 두 분은 물론 따님분에 대한 악의적인 인격모독이 시작될 거에요.”
조수아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보통 각오로는 견디기 힘들어요. 처음에는 자식 잃은 사람이 무엇인들 못 하겠냐 하시겠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아요. 이렇게 힘들지 몰랐다며, 포기하는 경우를 저는 많이 봤어요.”
조수아의 아버지가 말했다.
“저희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포기했던 부모입니다. 그냥 조용히 사는 게 딸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었죠. 그런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이상하게 힘들더군요. 가슴 속에 뭔가 꽉 막힌 것이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풀리지 않고 더욱더 가슴을 짓눌러오는 겁니다.”
그의 아내가 덧붙여 말했다.
“저 역시 똑같은 심정이었어요. 그런데 남편에겐 내색하지 못했죠. 그렇지 않아도 수아 때문에 가슴 아픈 남편인데, 저 때문에 더 힘들게 할까 봐요. 그렇게 답답하고 무의미한 날을 보내다가 장 팀장님의 전화를 받게 된 거예요.”
이어 남편이 아내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이렇게 살기는 정말 싫습니다. 힘들게 싸우다 보면, 적어도 가슴 속 응어리는 풀리겠지요. 어떤 진흙탕 싸움이 되던, 우리가 먼저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두 분의 확고한 결심 감사드립니다. 전화로도 말씀드렸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상황이 훨씬 좋아요. 기소는 문제없이 갈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때처럼 여기 모이신 분들이 변함없이 두 분을 도울 거고요.”
조수아의 부모는 정중히 거실에 모여 있는 이들에게 다시 한번 인사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때도 여러분에게 심려만 끼쳐드렸는데, 또다시 신세 지게 되었습니다.”
박상신 대표가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수아 부모님. 귀한 따님을 저에게 맡기셨는데, 그런 불상사가 벌어진 것 아닙니까.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곧이어 거실에 있던 이들이 차례로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넸다.
그들은 기자와 변호사 등, 조수아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몇 년 만에 다시 뭉친 이들은 심기일전을 다짐하며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할 때다.
유달이 장미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잠시 저 좀 보실까요?”
“그래요.”
그들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획.
유달이 곧바로 고개 돌리며 불만을 쏟아냈다.
“대체 이게 뭡니까? KTS를 박살 낼 거창한 계획을 논의할 줄 알았는데, 이건 그냥 단합대회 아닙니까?”
장미란은 이런 유달의 반응을 예상한 듯 말했다.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에요.”
“왜요?”
“경찰이나 검찰이 수사할 때 가장 기운 빠지는 일이 뭔지 아세요? 피해자 가족이 그만 좀 괴롭히라며, 수사기관을 적으로 취급하는 거예요. 형사나 검사도 사람이라 맥이 안 빠질 수 없죠. 유달 씨와 제가 아무리 힘들게 싸우면 뭐 해요? 조수아 양의 부모님이 언론에 나와서, 더는 죽은 딸을 괴롭히는 짓을 말아 달라 호소하면 끝이에요. KTS 역시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고요.”
유달이 바로 알아듣고 대꾸했다.
“수비를 단단히 하고, 공격하겠다는 것이군요?”
“그렇지요. 수비가 단단하니 마음 놓고 공격에만 집중할 수 있겠지요?”
“제가 어떻게 공격하면 되겠습니까? 감독님.”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상대에게 페어플레이 같은 건 필요 없겠죠? 작전은 간단해요. 미친개들이 날뛰는 들판에 사나운 맹수 한 마리 조용히 풀어놓는 거죠. 물론 뒷수습은 제 몫이 되겠지만요.”
“사나운 맹수가 바로 접니까?”
유달은 장미란의 표현이 무척 마음에 드는 표정이다.
“그렇죠. 이제부턴 KTS를 괴롭히는 일이라면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진행합니다. 그 첫 번째는 저번에 유달 씨가 태황가에서 말한 거예요.”
“그때 제 무슨 말을 했었죠?”
“주식동아리요? 이제는 신기가 막혀 돈은 벌 수 없지만, 전설적인 명성은 남아 있다고 했잖아요. 아직도 유효한가요?”
“물론입니다. 제 아이디로 접속해서 태황 주가가 ‘떡락’할 거란 내용 한 번 올리면, 바로 폭락입니다.”
장미란이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정말 그 정도로 파급력이 대단한가요?”
“미란 씨는 주식 투자를 한 번도 안 하셨군요? 제가 올리는 글은 흔하디흔한 증권가의 찌라시가 아닙니다. 주식을 조금이라고 알고 있는 이들에겐,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서이자 증권가의 바이블이지요.”
“좋아요. 그렇다면 당장 시작하죠. 주가 하락의 이유가 창업주 일가의 범법 행위, 그것도 살인죄에 관한 것이라고 하면, 손해를 본 투자자들이 가만있지 않겠지요?”
“생돈 날리고 누가 좋아합니까? 대체 무슨 사건인지 진실을 밝히라고 난리를 칠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바네요.”
“그러게요? 흐흐흐······ 한 마리 맹수가 날뛰게 되었으니, KTS는 내일부터 피똥 싸는 겁니다.”
이제야 유달은 만족 하는 모습을 보였다.
***
금요일 저녁.
서울 시내 신강일보 본사 건물.
대한민국 메이저 신문사인 신강일보는 언론 재벌이다.
수많은 사업체를 거느리고 종편 TV 방송까지 진출했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드나드는 신문사 로비.
오늘의 최고 화제는 태황 그룹의 주가 폭락이다.
로비 휴게실에 설치된 대형 TV에서는, 그와 관련된 신강일보의 종편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다.
패널을 초청하여 핫이슈에 대한 의견을 듣는 형식이다.
경제학자라는 노년의 남자 패널이 목청을 높였다.
-이건 정말 개탄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건실한 대기업이 말도 안 되는 증권가 찌라시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보다니요? 이는 한국 금융 시장의 불안정성을 보여 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아나운서가 말했다.
-이런 사태까지 벌어진 것은 정보의 원천이, 닉네임 ‘잘살아보세’가 올린 글이기 때문이죠.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증권가에서는 여전히 전설로 통하는 이름이라고 들었습니다.
-전설은 무슨 전설입니까? 그런 놈이 바로 사기꾼입니다.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서 정보를 조작하고, 이득을 얻는 파렴치한 놈이지요.
TV를 보는 사람 중에는 유달과 장미란도 있다.
유달은 의외로 ‘쿨’하게 넘어갔다.
“저 사람 방송에선 저렇게 말해도, 가장 먼저 태황 주식을 팔았을 겁니다.”
이어 그들은 안내데스크로 걸어갔다.
장미란이 몸을 일으키는 도우미에게 말했다.
“한일구 편집장님과 7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저희가 조금 일찍 온 것 같네요.”
미리 언질이 있었는지 도우미가 깍듯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지금 한 편집장님은 15층 특별면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걸 목에 걸고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유달과 장미란은 방문증을 차고 직원들이 드나드는 스피드게이트를 통과했다.
승강기로 향하던 장미란이 전방을 고갯짓하며 말했다.
“저기 보이는 체크무늬 슈트가 신강일보의 문일진 영업 이사예요.”
“KTS 중 S에 해당하는 놈이군요.”
“맞아요. 성격이 급하고, 직원들에게도 거침없이 짜증을 낸다고 하네요.”
문일진은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 비서와 함께 있었다.
띵동.
올라가는 승강기가 도착했다.
문일진과 그의 비서가 오르자, 더는 타는 사람이 없다.
나머지 기다리던 직원들은 바로 옆 승강기 칸으로 옮겼다.
사르르······.
승강기 문이 거의 닫히기 직전.
퉁.
“세이프!”
유달이 잽싸게 발을 넣어 막았다.
사르르.
곧이어 다시 문이 열리자, 그는 아주 당당하게 장미란과 함께 승강기에 올랐다.
순간, 문일진은 인상 쓰며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들의 목에 걸린 방문증을 보고 이내 포기했다.
우웅.
승강기가 움직이자 문일진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그 개새끼 확 죽여버리고 싶은데······ 잘살아보세? 주식이나 사고파는 새끼가 어디서 헛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는 거야.”
“이사님······.”
그의 수행비서가 목소리가 크다고 눈치 주어도 상관치 않았다.
“한 편집장이 그 새끼하고 몇 시에 인터뷰한다고 했지?”
“특별면담실에서 7시니까······ 30분 정도 남았습니다. 모든 언론사 통틀어 최초이고, 얼굴 사진은 찍지 않는 것으로 합의했다고 합니다.”
띵동.
승강기가 15층에 멈추자 그들이 내렸다.
그런데 문일진은 영업 이사실로 가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이사님, 어디 가십니까?”
“그 새끼 얼굴 좀 보려고. 아니, 무슨 근거로 나를 살인범으로 몰았는지 내가 따져야겠어.”
“이사님, 참으십시오. 그건 한 편집장님과 법무팀이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문일진은 수행비서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특별면담실 문을 열었다.
덜컹.
“한 편집장?”
인터뷰 대상을 기다리고 있던 한일구가 엉거주춤 일어서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사님?”
“잘살아보세, 그 새끼 아직 안 왔지?”
“네, 그런데요?”
“아무래도 인터뷰할 때 나도 있어야겠어. 그 새끼한테 내가 직접 따질 게 있어서 말이야.”
“이사님······.”
한일구가 좋은 말로 안 된다고 거절하려는 때다.
“그렇게 합시다.”
“!”
문일진이 흠칫하여 뒤돌아보니, 유달이 방긋 웃고 있다.
그는 이내 특별면담실 안으로 들어가서 한일구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잘살아보세 아이디를 쓰는 유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강일보 한일구 편집장입니다.”
이어 유달은 자기 가게처럼 편히 자리하며 말했다.
“모두 앉으시지요. 인터뷰합니다. 체크무늬 그쪽도 포함해서. 나한테 따질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
유달은 자신 있으면 앉아보라는 눈빛으로 문일진을 도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