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똑같은 수준
굿 카페의 평일 아침.
유달은 눈을 뜨자마자 TV 앞으로 향했다.
아침연속극 시작할 시간.
TV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유달이 앉자, 강세훈이 다가왔다.
그는 유달에게 모닝커피를 건네며 인사를 했다.
“휴일 잘 보내셨습니까? 사장님.”
유달은 리모컨으로 드라마 채널을 맞추며 대답했다.
“응, 완전히 기절해 있었지······.”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리 살인적으로 춤추시고, 어떻게 하루면 멀쩡해지십니까?”
“내가 체력 하나는 타고났어. 마라톤 했으면 올림픽 메달은 문제없었을 텐데······ 우와, 시작한다!”
유달은 ‘TV 보기’ 자세로 들어섰다.
양손을 무릎에 올리고, 상체는 앞으로 바싹, 두 눈은 TV에 고정했다.
이때 말을 붙이면 짜증 내기에, 강세훈은 재빨리 자리를 떴다.
유달은 몰입하여 TV를 시청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의 집중력이다.
거듭되는 드라마의 반전과 반전.
위기에 몰렸던 악당은 치사한 술수를 써서 풀려나고, 오히려 여주인공이 누명을 쓰고 체포되려는 찰나,
느닷없이 여주인공의 남자가 등장, 악당의 범죄를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를 내미는 장면에서 드라마가 끝났다.
짠짜라 잔짜, 짠자라 잔짜. 짜라라라······.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엔딩 음악이 나오면서, 유달의 집중력도 풀렸다.
“저 친구는 연기가 계속 늘어······.”
유달은 악당 역을 맡은 정찬일의 연기가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이어 그는 손에 든 리모컨을 위로 추켜들었다.
“고마워요.”
뒤에서 다가온 장미란이 리모컨을 받았다.
그녀는 바로 뉴스 채널로 바꿨다.
-홍대 포세이돈 클럽에 있었던 집단 난투극 사건을 계속 보도해 드리겠습니다. 경찰은 이번 사건을 마약 조직 간의 알력 다툼으로 보고 수사하고 있습니다.
난장판이 된 VVIP룸의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박중배 패거리가 줄줄이 체포되어 나오는 장면이 나오자, 유달이 소리쳤다.
“앗, 저놈 오줌 싼 놈입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이 지려놨는지, 저는 어디서 수도관이 터진 줄 알았습니다.”
장미란은 피식, 웃으며 뉴스를 지켜봤다.
-경찰은 이들이 귀신과 싸웠다는 등의 횡설수설하는 증언을 하고 있어, 환각 상태에서 벌인······.
벌떡.
유달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고상운에게 받은 증거는 어찌 되었습니까?”
“경찰에 넘겼어요.”
“헐, KTS가 조작하면 어쩌려고 경찰에게 넘깁니까?”
“대한민국 경찰은 그렇게 썩지 않았어요. 이미 조작된 증거들이라 수사가 지지부진했던 것이지, 경찰 내에서 조작된 것은 없었어요. 물론 위로부터의 압력은 있겠지만, 확실한 증거 앞에서는 그들도 어쩌지 못해요.”
유달이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어떻게 더 확실한 증거를 퍼다 줍니까? 이제 경찰과 검찰이 손잡고 나서야지요. 당장 KTS 놈들 모조리 구속하고, K당 총재는 눈물이 사퇴 기자 회견, 태황의 최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신강일보는 폐간 절차를 밟는, 사이다 같은 전개 안 됩니까?”
“······.”
안 되는 모양이다.
유달은 이내 기대를 접은 듯 말했다.
“제가 뭘 바라겠습니까? 저수지 사건의 골드윙 대표도 아직 체포 못 하고 있는데요.”
“그건 조금 기다려 봐요. 철저한 수사가 진행되고 있느니, 머지않아 검찰이 칼을 빼 들 거에요.”
“칼을 빼든 다고 뭔가 달라질까요?”
“검찰이 작심하고 달려들면 당해낼 상대 없어요. 모든 수단·방법 다 동원해서 영혼까지 탈탈 털어버리죠. 살인 사건의 경우는 더더욱 예외 없어요.”
“그런데 조수아 사건은 언제 칼을 빼 들까요? 저는 그놈들이 현아님에게 무슨 짓을 할까, 밤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 어제만 빼고요.”
장미란이 TV를 끄며 대답했다.
“너무 서둘지 말아요. 우리는 짧은 시간에 큰 진전을 이뤘어요. 수십 명의 수사관을 투입해도 얻을 수 없는 엄청난 성과에요.”
“저는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제 몸신의 무한 지원을 받는 상황인데, 뭐가 걱정입니까? KTS 잡아넣을 수 있는 번뜩이는 방법을 생각해 보라고요.”
“알았으니까, 식사나 하고 오시죠?”
“그러죠. 제가 돌아오기 전에 꼭 생각해 두세요.”
출입문으로 향하던 유달이 의아함을 느끼고 물었다.
“그런데 왜 보름이가 안 보이죠? 아하, 벌써 게을러진 겁니까?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요. 일찍 일어나는 새와 늦게 일어나는 새는 종이 달라요, 종이.”
“그게 아니라, 보름이는 이제 오후에 출근할 거예요.”
“왜요?”
“오전에는 검정고시 학원에 가야 해서요.”
유달이 당혹하여 물었다.
“보름이가 거길 왜 갑니까?”
“왜라니요? 학교를 더 다닐 마음 없으면 고졸 검정고시 준비해야죠? 저번에 혹시나 해서 물었는데, 기초 학력이 너무 형편없어요. 대체 유달 씨는 뭐한 거예요?”
그는 왜 자기한테 불똥이 튀나 하는 반응이다.
“저는 왜요?”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에 사시패스까지 했잖아요? 보름이가 싫다고 해도 기본적인 공부는 가르쳐 줬어야죠.”
“······.”
유달은 똑같은 수준이라고 차마 밝히지 못했다.
***
유달은 단골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인근 헬스장으로 향했다.
당연히 운동하기 위함은 아니다.
명동에서는 씻을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찜질방이나 사우나는 너무 비싸다.
저렴한 헬스장 정기회원권 끊어놓고 샤워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명동 번화가 사거리.
유달은 말끔한 모습으로 길을 걸었다.
“내가 보름이의 장래에 대해 무신경하긴 했어······ 무당이 되든 말든 기초적인 학력은 있어야지. 꼭 내 수준으로 크고 있었던 거야. 잠깐······ ‘장래’인가? ‘장례’인가?”
스스로 묻고, 스스로 헛갈리는 그때.
“!”
위험을 직감한 유달이 재빨리 상체를 뒤로 젖혔다.
사아악~.
두리번거리고 걷던 여자의 머리카락이 유달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자칫 정면충돌이 일어났을 위기.
곧이어 분홍 리본을 머리에 단 여인이 연신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분홍 리본 여인은 다시 두리번거리며 길을 걸었다.
어딘가를 찾은 것이 분명한데, 너무 정신없어 보였다.
게다가 나풀거리는 하얀 드레스와 빨간 구두.
범상치 않은 패션이었다.
딩딩딩딩딩.
오랜만에 유달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번호는 장미란.
그는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KTS 잡아넣을 수 있는 번뜩이는 방법을 생각해 내신 겁니까?”
-그게 아니라, 지금 어디예요?
“카페에 거의 다 왔습니다. 왜요?”
-저번에 말한 인테리어 디자이너 있잖아요. 우리가 시간이 안 돼서 몇 번이나 약속을 미뤘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요? 짜증 나서 우리 일을 안 하겠답니까?”
-아니요. 지금 명동에 도착해서 우리 가게를 찾고 있어요. 그런데 그녀는 타고난 길치고요. 거기에 더해 뉴욕에서 살다가 한국에 온 지도 몇 년 되지 않았어요.
“지금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겠군요.”
-네, 제가 전화로 설명을 해도 못 찾아와요. 성호 씨가 장 보러 가서, 제가 자리를 비울 수도 없고요.
유달이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인상착의가 어떻게 됩니까?”
-이름은 정세리, 20대 초반이고요. 키는 160정도, 머리에는 분홍색 리본을 달고······.
그 뒤는 유달이 이야기했다.
“나풀거리는 하얀색 드레스에 빨간 구두들 신고 있지 않습니까?”
-맞아요?
“제가 찾았습니다. 곧바로 데리고 가지요!”
유달은 전화를 끊고, 뛰기 시작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정세리는 굿 카페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유달이 연신 두리번거리며 걷는 그녀를 불렀다.
“정세리 씨?”
“네!”
사아악~.
유달은 급히 뒤돌아보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피하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유달입니다. 그쪽이 찾는 굿 카페의 사장이지요.”
순간, 그녀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아, 다행이네요. 디자이너 세리 정이에요.”
“우리 카페는 이쪽입니다.”
유달과 정세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지점에서 정세리가 물었다.
“카페는 여기서 멀어요?”
“아니요, 앞에 보이는 바로 저 건물입니다. 1층 화장품 가게에서 북적대는 거 보이시죠?”
“이상하네요······ 제가 저기서 사람들한테 계속 물었는데, 아무도 모르더라고요.”
“하하하, 우리 가게는 명동의 숨겨진 핫플레이스입니다. 너무 숨겨져 있다는 게 문제지요. 그런데 이 길은 안 되겠습니다. 옆길로 돌아가지요.”
급하게 방향을 트는 유달에게 그녀가 물었다.
“다 왔는데, 왜 길을 돌아가요?”
“전방에 외국인 출현입니다.”
명동에는 외국인이 넘친다.
그건 한국 생활이 얼마 되지 않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혹시 영어로 길 물어볼까 봐 그런가요?”
“아니요, 그런 건 그냥 쌩까면 되는데, 사람이 아닌 존재들은 계속 따라다니며 쏼라쏼라 거립니다. 나는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말이죠.”
“죄송한데요, 쌩이 뭘까요? 그리고 사람이 아닌 존재는 또 뭐지요?”
“아, 그런 게 있습니다.”
그들은 아주 가까운 길을 최대한 멀리 돌아갔다.
***
딸랑딸랑.
유달이 정세리를 데리고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장미란과 간단히 인사하고 카페 내부를 살폈다.
그냥 둘러보는 수준이 아니라, 어떻게 인테리어를 바꿀지에 대한 스케치도 했다.
유달이 장미란에게 물었다.
“패션이 독특한 분인데요?”
“뉴욕에서도 인지도 높은 인테리어 디자이너예요. 정세리의 작품이라는 것만으로도 우리 가게의 홍보 효과가 엄청날 거예요.”
“그리 유명하신 분이 왜 우리 가게에 왔을까요?”
“나도 한 다리 건너서 알게 된 사람이에요. 한국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는 사람 통해서 부탁했는데, 흔쾌히 승낙해 주더라고요.”
“우리가 운이 좋은 걸까요?”
“그건 두고 봐야죠. 하지만 인테리어 실력만큼 확실히 믿어도 돼요.”
스케치하던 정세리가 물었다.
“여기는 어떤 공간인가요?”
유달이 대답했다.
“거기는 제 신당입니다.”
“안을 봐도 될까요?”
“죄송하지만, 거긴 나중에 보여드리겠습니다. 사전에 허락이 필요해서요.”
“네, 그러세요.”
다시 스케치하는 그녀에게 장미란이 말했다.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아니요. 나중에 먹을게요.”
“제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요. 장세리 씨는 왜 저의 부탁을 들어주신 거죠? 세계 각지에서 인테리어 요청이 쇄도하는 상황이라고 들었는데요. 저는 당신이 1순위로 여길 만큼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게다가 우리가 몇 번이나 약속을 어겼어도, 이렇게 일부러 찾아왔잖아요?”
정세리가 스케치를 멈추고 걸어왔다.
그녀는 장미란과 유달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자리하며 말했다.
“커피 대신 물 좀 주세요.”
“그러죠.”
그녀는 장미란이 가져온 물을 마시고 입을 얼었다.
“저는 입양아예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보육원에 맡겨졌어요.”
“네, 프로필에도 그렇게 나와 있더군요.”
장미란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반면 유달은 즉각 꺼리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남들의 애처로운 사연에 약했다. 멀리서 폐지 줍는 할머니만 보여도 피해 다녔다.
정세리는 낮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인정받고 부모님을 찾았어요. 아기 때 잠시 있었던 보육원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었어요. 그래서 사설탐정을 고용했어요. 여기서는 흥신소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부모님을 찾으셨나요?”
“엄마를 찾았어요. 그런데 저를 만나기를 거부한다고 했어요.”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고, 설득해 달라고 했죠. 그 때문에 뉴욕에서 한국으로 거주지까지 옮겼어요. 그렇게 몇 년을 기다린 끝에 만날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잠시 감정에 북받쳤던 그녀 말을 이었다.
“엄마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만나기로 했던 바로 전날······ 자살했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어요? 나를 버린 것도 부족해서, 만나기 직전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요. 세상에 그렇게까지 자식에게 상처를 주는 엄마가 있을까요?”
장미란은 그녀가 왜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어머님의 성함과 언제 돌아가셨는지 알려주시겠어요?”
“여기, 흥신소에서 보내온 기록이 있어요.”
장미란은 그녀가 내미는 서류를 살피고 몇 군데 전화했다.
그녀는 한 시간 가까이 통화를 하고 나서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정세리 씨, 안타깝지만 어머님 일은 자살이 확실해요. 타살을 의심할 어떠한 증거도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요······.”
“너무 실망하지 말아요.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그 사건에 접근할 거예요.”
“어떻게요?”
장미란은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고, 유달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저를 보십니까?”
장미란이 쪽지를 건네며 말했다.
“여기 있는 주소로 가서 조사 좀 해주세요. 정세리 씨의 어머니가 살았던 집이에요.”
“저 혼자요?”
“나는 여기서 할 일이 많고, 거기 간다고 특별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네요. 정세리 씨와 함께 가면 되겠네요.”
“저는 좋아요.”
그녀는 바로 승낙했다.
@
경기도 용인의 작은 마을.
촤르르르······.
택시 한 대가 허름한 집 앞에 멈췄다.
곧이어 차량 문이 열리고 유달과 정세리가 내렸다.
허름한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들에게 택시 기사가 물었다.
“손님들도 그겁니까?”
유달이 고개 돌려 반문했다.
“그거라니요?”
“귀신 나온다는 흉가 찾아다니는 사람들 말입니다. 만약 그거라면 제대로 찾아오신 겁니다. 거기서 귀신보고 자지러지는 사람 여럿 봤습니다.”
“예······ 조금만 기다리세요. 저희는 곧 나옵니다.”
끼이익.
유달과 정세리가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음침함이 엄습했다.
그들은 작은 부엌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유달이 갑자기 멈춰서며 말했다.
“혹시 어머니 사진 있어요?”
“네, 여기요.”
유달은 정세리가 건네는 핸드폰 사진을 보며 물었다.
“정말 이 사진의 여자가 어머니 확실해요?”
“네, 맞아요.”
곧바로 유달은 허공을 향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굴까?”
유달의 눈에는 천장에 목을 매고 죽은 영혼이 보였다.
시신처럼 허공에서 흔들리는 몸뚱이······.
원망의 눈빛으로 유달을 노려보는 모습은 사진 속의 여인과 다른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