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등산
경기도 소재의 드라마세트장 가는 길.
유달과 장미란은 정찬일의 승합차에 탔다.
10년이 넘은 차량으로, 오현아의 고급 벤과는 극명하게 비교되었다.
덜컹덜컹······.
승차감은 최악에 가까웠다.
노면의 상태가 탑승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승합차의 운전은 당차 보이는 정찬일의 여자 매니저가 했다.
그녀는 정찬일의 일정 관리와 잡심부름은 물론, 코디네이터 역할까지 겸했다.
덜컹, 덜컹, 덜그럭!
비포장도로를 달리듯 충격이 더욱 심해졌지만, 유달은 기분은 좋아 보였다.
박상신 대표에게 받은 선물 덕분이다.
“우와, 많이도 챙겨 주셨어!”
비싼 물건은 없다.
종이 쇼핑백 안에는 볼펜, 부채, 물병, 우산 등, 지방 행사에 쓰였던 기념품들이 들어 있었다.
유달은 효자손을 꺼내서 열심히 등을 긁어댔다.
“어우, 시원해. 어우, 어우, 미치도록 시원해······.”
장미란은 이런 유달의 모습이 재밌고도 신기했다.
“정말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네요?”
“돈 봉투보다는 이런 게 훨씬 낫지요. 아주 부자가 된 느낌입니다.”
“내가 받은 것도 드려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건 호박 사장님이 미란 씨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챙겨 주신 것 아닙니까? 그런 물건은 함부로 탐내는 게 아니지요.”
“천성적으로 욕심이 없나 봐요?”
“세상에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제 인생의 모든 욕심을 한 번에 쏟아부었습니다. 그냥 만족하고 사는 것이지요······.”
유달은 갑자기 심오한 표정이 되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약간은 후회하는 기색도 느껴졌다.
덜컹덜컹.
승합차 안이 조용해지고.
장미란과 유달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정찬일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장 팀장님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네, 물어봐요.”
“수아 사건의 그놈들······ 왜 기소조차 하지 않은 겁니까? 물론 그때 검사가 기소할 의지가 없기는 했지요. 하지만 장 팀장님이 좀 더 강하게 밀어붙였으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았나 싶어서요.”
“확실한 물적 증거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있기는 했지만, 그놈들이 모두 빼돌렸겠죠. 압수수색 영장조차 발부되지 않았으니까요.”
“맞아요. 저도 그렇게 외압이 많은 수사는 처음이었죠. 내가 할 수 있던 건 한 가지밖에 없었어요. 조수아 사건을 자살로 종결짓지 않고, 미제로 남겨두는 것이요.”
“네······.”
정찬일은 이해가 되기는 하면서도, 섭섭함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한 표정이다.
이에 장미란이 정색하고 말했다.
“만약 그때 무리하게 기소했다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았어요. 그들에겐 정당한 면죄부를 주고, 피해자는 죽음보다 더한 인격 살인까지 당했을 거예요.”
“무슨 말씀입니까?”
“그들은 법정에서 조수아 양을 추잡한 악녀로 만들 준비를 마친 상태였어요. 배역을 따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희대의 악녀로 낙인찍혔을 것이고, 그녀의 가족은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졌을 거예요. 이기지도 못하고, 피해만 큰 싸움을 벌일 필요가 있었을까요?”
정찬일이 잠시 생각하고 물었다.
“지금 싸우면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때보다는 가능성이 커요. 나는 조수아 양 사건을 그냥 미제로 남겨두지 않았어요. 그들의 주장을 반박할 증거를 차곡차곡 수집해 두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KTS의 거대한 배경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를 얻었거든요?”
정찬일은 그 무기가 무엇인지 매우 궁금한 표정이다.
이에 장미란은 바로 옆자리의 유달을 살짝 눈짓했다.
그는 창밖을 보며 여전히 자책하고 있었다.
“욕심을 너무 쏟았어······ 조금은 남겨놨어야 했는데······.”
만약 그가 유달의 이 모습부터 봤다면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무실에서 조폭들을 물리치는 모습을 먼저 봤기에, 진정한 힘을 가진 자의 여유처럼 느껴져다.
촤르르르.
서행하던 승합차가 멈추고, 운전석의 당찬 여자 매니저가 소리쳤다.
“도착했습니다!”
장미란과 정찬일이 먼저 내리고, 퍼뜩 상념에서 깨어난 유달이 뒤늦게 내렸다.
정찬일이 깍듯이 말했다.
“저기가 우리 드라마의 야외촬영하는 장소입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장미란이 대답했다.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촬영에만 집중하세요.”
“알겠습니다.”
정찬일은 바리바리 짐을 챙겨 든 매니저와 함께 드라마 촬영장으로 향했다.
유달과 장미란은 조용히 그를 뒤따랐다.
방송 장비와 스텝, 연기자와 그들의 수행원들이 몰려 있는 촬영 현장.
정찬일이 다가가자 드라마 스텝들이 축하의 인사를 전했다.
“너무 부러워요. 축하해요!”
“언제 오현아와 사귀고 있던 거야? 정말 축하해.”
정찬일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스텝들 사이를 통과했다.
곧이어 그는 연기자들이 앉아 있는 자리로 향했다.
그곳에서도 축하 인사가 쏟아졌다.
정찬일에게 뺨 맞았던 여자가 제일 좋아한다.
“오빠, 오빠, 정말 축하해요. 내가 왜 눈물 날 것 같은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아침 연속극에서 정찬일의 부인 역이다.
그의 수많은 외도 사실을 알고 ‘부셔버리겠다’고 독기 품었었다.
믿었던 사위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뒷목’ 잡았던 장인과 장모도 축하해 주었다.
“언제 국수 먹는 거야?”
“이젠 행복하게 잘 살아야지. 그동안 고생 많았잖아.”
그 밖에도 정찬일 때문에 눈물 흘렸던 여자들이 줄줄이 다가와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건넸다.
드라마와 전혀 다른 분위기에 유달은 얼떨떨한 기색이다.
곧이어 조연출이 다가왔다.
“촬영 준비하십시오!”
그는 정찬일과 막연한 사이인 모양이다.
축하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듯 말을 꺼냈다.
“형, 괜찮아? 그 새끼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나는 괜찮은데, 드라마가 문제지. 나를 괴롭히는 짓이라면 무엇이든 할 놈들이잖아.”
조연출이 목청 높여 대답했다.
“그런 걱정은 하지를 말아요. 우리 연출 감독이 성격은 뭣 같아도 강단은 있잖아요? 작품에 지장 있는 요구를 받아들일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작가님도 형에게 전해주래. 갑자기 급사해서 드라마에서 하차할 일은 없을 거라고.”
“다행이네······.”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말고, 촬영이나 잘합시다.”
조연출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다, 유달과 장미란을 힐긋 보고 물었다.
“그런데 뒤 있는 사람들은 누구?”
“아, 이분들은······.”
조연출은 그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확신했다.
“보디가드 채용했군요! 잘 생각했어요, 형. 저도 당분간은 필요하지 않나 생각했거든요.”
조연출이 충분히 오해할 만했다.
유달은 오랜만에 검은 정장으로 빼입었다.
그리고 장미란은 드러내지 않아도, 만만히 볼 수 없는 위압감이 풍겼다.
조연출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찬일이 형님 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제가 좋은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유달과 장미란은 조연출 덕분에 편한 자리에서 드라마 촬영을 구경하게 되었다.
잠시 후.
배우들과 스텝들이 촬영 준비를 마쳤다.
“3에 1에 3.”
딱!
연출부 막내가 클래퍼보드, 일명 슬레이트를 치며 잽싸게 빠져나가고,
“액션.”
연출 감독의 사인과 함께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
아침 드라마 촬영 막바지.
“NG, 다시.”
똑같은 장면이 반복되자, 유달은 이미 흥미를 잃었다.
그는 조연출이 마련해준 의자에 앉아 후회하듯 말했다.
“드라마 촬영도 별것 아니네요······.”
“뭘 기대했을까요? 설마 드라마 감독이 유달 씨를 보면서, 배우 할 생각 없냐는 말을 기대한 건 아니겠지요?”
“아쉽지만, 저는 그런 제안이 와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처지입니다.”
“왜요?”
“이모하고 약속했거든요. 사주카페 사장이 저에게는 마지노선입니다. 배우를 하겠다고 하면, 의절 당할 수도 있어요. 그보다, 어째 우리가 더 구경거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네요.”
기분이 아니라 실제 그랬다.
정찬일의 당찬 매니저 때문이다.
그녀는 조폭들이 난입했을 때 사무실에 있었다.
촬영장의 스텝과 배우 매니저들은 유달과 장미란을 고갯짓하며 누구인지 물었고, 그녀는 사무실에서 있던 유달의 활약상을 열심히 설명했다.
유달은 말로 그들을 내쫓았을 뿐인데, 그녀의 설명에는 액션 신이 추가되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경이로운 눈초리로 변해서 유달가 장미란을 다시 쳐다봤던 것이다.
“오케이!”
연출 감독의 허락이 떨어지고 촬영이 종료되었다.
지루함에 몸부림쳤던 유달은 벌떡 일어나 박수까지 쳤다.
촬영을 마친 정찬일이 그들에게 다가오는 때다.
드라마 스텝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우웅.
검은색 고급 외제차량 3대가 촬영하는 곳까지 들어왔기 때문이다.
3대의 차량은 배우들이 연기했던 곳에 일렬로 멈췄다.
철컹, 철컹, 철컹······.
동시에 차 문이 열리고, 경호원들이 먼저 내렸다.
곧이어 가운데 차량의 뒷자리.
최고급 정장을 입은 사내가 내려서는 순간, 정찬일의 인상이 바로 일그러졌다.
유달이 천천히 팔짱 끼며 그에게 물었다.
“저놈은 K, T, S 중에 뭐야?”
“T요······ 태황 그룹의 막내아들 최준기입니다. 분노조절장애가 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최준기는 20대 후반의 나이였다.
그는 연출 감독을 시작으로, 드라마의 스텝하고 배우들과 일일이 악수했다.
속으로는 못마땅할지언정, 그의 악수를 대놓고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가식적인 웃음과 함께 수고한다는 말을 남발했던 최준기는 정찬일 앞에서 표정이 싹 변했다.
“뭐야? 이 쓰레기 새끼는?”
정찬일은 욱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꾹 참았다.
최준기의 입은 더욱더 거칠어졌다.
“이게 광고주에게 인사도 없네? 야, 이 버러지 같은 새끼야, 내가 이 바닥에서 밥 처먹게 참아줬으면 죽은 듯이 지내야지, 어딜 기어올라? 오현아하고 연애설 터트리면 내가 식겁할 줄 알았어? 너 같은 개쓰레기 때문에 우리나라 연예계가 욕을 먹는 거라고, 바로 너, 너, 너, 너 같은 새끼들 말이야······.”
그는 거친 말로는 만족 못 하는 모양이다.
삿대질하는 손가락이 점점 정찬일의 이마로 향했다.
유달이 이들 그냥 두고 볼 리 만무했다.
“스톱! 그 손가락 치우지? 부러지고 싶지 않으면.”
“넌 뭐야?”
유달은 기다렸다는 듯 험악한 말을 쏟아냈다.
“주둥이 닥치고, 손가락 치우라고! 이 엑스엑스 새끼야! 하루종일 여자 따먹을 궁리만 하는 새끼가 어디서 쌍욕질이야? 뒈지게 처맞기 전에 꺼져라, 엉~!”
“허, 허······ 허!”
최준기는 하도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그의 인생에서 들어본 말 중 가장 심한 욕이었다.
그는 말문이 트이자, 바로 옆에 있는 경호원에게 소리쳤다.
“저, 저, 저 새끼 그냥 둘 거야?”
강인한 인상의 경호원이 가볍게 눈짓했다.
그러자 4명의 경호원이 유달을 향해 다가갔다.
모두 체격이 좋다.
태황 그룹에서 뽑은 경호원이니 상당한 실력의 무술 고단자일 것이다.
유달은 기죽지 않았다.
“경호원이 아니라 깡패들이네? 그래 덤벼, 4대1쯤이야 껌이지. 어떤 놈부터 골로 보내줄까?”
스윽.
장미란이 방방 뜨는 유달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강인한 인상의 경호원을 보며 말했다.
“일 크게 만들지 말죠?”
순간, 그는 경호원들을 손짓하여 멈춰 세우며, 그녀에게 물었다.
“어느 회사 소속이지? 낯익은 얼굴 같은데?”
장미란은 태연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지금은 굿 카페 매니저고요······.”
“?”
“그전에는 마포경찰서 경력계 팀장, 또 그전에는 서울 광수대 특수부 팀장, 또 그전에는 FBI에도 있었고······ 우리가 어디서 봤을까요?”
“!”
강인한 인상의 경호원은 즉시 다른 이들을 물렸다.
그러고는 최준기에 다급한 음성으로 말했다.
“본부장님, 오늘은 그냥 물러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때 그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입니다. 여기서 폭력을 쓰게 되면 좋을 게 없습니다.”
“뭐야? 저런 같잖은 여자 때문에 도망치는 꼴을 보이자고? 어이가 없네? 양 부장은 그거밖에 안 되는 사람이야?”
양 부장이란 경호원의 목청이 커졌다.
“본부장님! 제 말 들으십시오. 저 여자는 건들지 않는 게 최선입니다. 돌아가시죠.”
“아, 알았어······.”
양 부장의 강력한 권고에 최준기는 어쩔 수 없이 따르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는 그냥 곱게 돌아가지 않았다.
“너!”
최준기가 정찬일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가장 비참한 인생이 뭔지 철저히 실감하게 해줄게. 나를 건드리는 건 태황 그룹을 건드리는 것과 똑같아. 기대하라고, 이 버러지 같은 새끼야······ 오현아, 그년도 함께 지옥으로 떨어트려 줄 테니까.”
순간,
“선 넘었네······.”
유달의 작은 중얼거림에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여자처럼 변했기 때문이다.
최준기는 이를 모욕적인 장난으로 받아들였다.
“넌 진짜 내가 우습게 보이는 모양이구나? 그래, 너까지 세 연놈 모두 지옥으로 보내줄게.”
“썩을 놈······.”
“!”
최준기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유달의 싸늘한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다.
“여린 목숨에 주삿바늘 꽂아서 죽게 한 게 네놈이구나?”
“무, 무슨 헛소리를······.”
“살려달라는 소리 들었잖아? 잘못했다고 눈물 흘리며 쳐다봤잖아? 제발 그러지 말라고 온몸으로 소리치고, 또 소리쳤는데······ 이놈~!”
철퍼덕.
최준기는 다리가 풀려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너······ 웃었어? 여린 목숨 끊어지는 거 보며 희희낙락 친구 놈들과 웃었다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기대해······ 네놈 명줄 끊기는 순간, 여린 목숨이 널 보고 웃고 있을 거야.”
“으아악, 시발~.”
최준기는 혼비백산하여 차에 올라탔다.
곧바로 경호원들도 황급히 차량에 탑승했고, 3대의 차량이 빠르게 촬영장을 벗어났다.
장미란이 유달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유달이 본래의 목소리로 대꾸했다.
“팩폭 나왔군요?”
“네, 그런 것 같아요.”
유달이 천천히 걷기 시작하며 말했다.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가 먼저 선빵 날리러 갑시다.”
“무슨 선빵이요?”
“그놈이 현아님에게 뭔 짓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놈 가족을 건드릴 겁니다. 놈이 먼저 시작한 일이죠.”
장미란이 확인을 위해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태황 그룹 오너 일가와 싸우겠다는 건가요?”
“일단은 준엄히 경고할 생각입니다. 그래도 말 안 들으면 어쩔 수 없죠. 박살 내는 수밖에.”
장미란은 당혹스러웠다.
“저기요, 유달 씨······ 제가 아는 인맥 다 동원해도 태황 오너 일가를 만나기는 힘들어요. 만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경고하고 박살 내겠다는 거예요?”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방법이요?”
“사업하는 사람치고 점 안 보는 사람 없습니다. 음으로든 양으로든 말이죠. 아마도 태황 오너 일가라면 대단히 유명한 무속인이 붙어있을 겁니다. 그분에게 부탁하면 만남 정도는 주선해주겠지요. 그런데 미란 씨는 등산 좋아하십니까?”
“뜬금없이 등산은 왜요?”
“그분을 만나려면 이모의 도움이 필요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