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경험하지 못한 적.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매니저 사무실.
장미란과 50대 초반의 여인이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중년 여인은 꾸미는 것에 무신경했다.
귀찮아서 자른 듯한 짧은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 유행이 한참 지난 옷을 입고 있었다.
장미란 앞에서 웃는 모습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고, 무릎 위의 핸드백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장미란의 눈치를 살피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식 들었습니다. 경찰 일을 관두셨다고요?”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그보다 상담 치료는 잘 받고 계신 거죠?”
“뭐······ 저야 만날 똑같은 생활이죠.”
초점에서 빗나간 대답이다.
장미란이 중년 여인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아주머니, 몸은 괜찮으신 거예요?”
“죽을병에 걸린들 무슨 상관입니까. 나를 걱정해줄 가족도 남아 있지 않은데요. 형사님 몸은 건강하신 거죠?”
“네, 저는 아주 건강해요.”
“다행이네요. 그동안 형사님이 제 딸아이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잖아요.”
“대한민국 경찰이면 누구나 하는 일이에요. 저만 특별한 게 아니에요.”
“그런데 어쩌다가 그만두신 겁니까?”
“이런저런 일이 있었어요. 갑자기 결정된 건 아니고요. 그동안 쌓였던 것이 어떤 일을 계기로 폭발했다고 할까요.”
중년 여인의 음성이 한층 낮아졌다.
“다시 복귀할 마음은 없으신 거고요.”
“제가 복귀한다고 상부에서 받아 줄 것 같진 않네요.”
“예······.”
중년 여인은 대화하는 내내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쉴새 없이 만지작거리던 무릎 위의 핸드백을 양손으로 꼭 쥐며 물었다.
“그러면 형사님, 제 딸아이의 사건은 포기하신 겁니까?”
순간, 장미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싸늘함이 느껴지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실망이네요.”
“예?”
장미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중년 여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그만둔 거예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장미란이 책상으로 향했다.
거의 정리가 끝난 책상 위에는 철제 파일 보관함이 있다.
특별 주문한 것인지 시중에서 파는 것과 형태가 다르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책꽂이처럼 직사각형 모양이다.
철컥.
그녀는 중앙에 달린 열쇠를 얼었다.
촤라라락.
전면부가 블라인드처럼 말려 올라가고, 빼곡히 꽂혀있는 파일들이 보였다.
장미란은 왼쪽 가장자리, 제일 첫 번째 파일을 꺼내어 돌아왔다.
툭.
그녀는 테이블 위에 파일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저의 첫 번째 미제 사건이에요. 피해자의 가족이 포기하지 않으면, 저도 포기하지 않아요.”
하늘색 파일 표지에는 이름만 적혀 있다.
-윤하영.
“제가 계속 경찰로 있으면 새로운 사건을 맡게 돼요. 게다가 위에서는 권력을 가진 이들의 수사에 적극적이지 않아요. 이제야 홀가분하게 따님들의 사건에 집중할 게 있게 되었네요.”
“형사님······.”
한없이 어두웠던 중년 여인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는 순간이었다.
***
장미란의 사무실을 기웃거리는 유달.
그의 옆으로 송보름이 다가와 붙었다.
“어때요?”
“어떻긴 뭐가 어때? 죽을상이었던 아줌마의 얼굴이 투자자 와 몇 마디 나누더니 상당히 풀어졌네. 신기하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송보름의 추리가 시작되었다.
“사장님, 형사 언니는 자기가 맡은 일은 무슨 수를 써서든 끝내는 성격이잖아요? 포기하지도 않고요.”
“암, 내가 아주 잘 알지.”
유달이 전적으로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저 아주머니는 어떤 사건의 피해자 가족 같아요. 형사 언니가 경찰 관뒀다니까 놀라서 찾아온 거죠. 혹시 사건을 포기한 게 아닌지 불안해서 말이지요.”
“그래서?”
“하지만 형사 언니는 해결 못 한 사건을 몽땅 싸 들고 온 거예요. 바로 저 하늘색 파일이죠. 형사 언니가 끝까지 범인을 잡겠다고 하니까, 저 아주머니가 기뻐하며 안정을 찾은 거죠. 어때요?”
유달은 대단히 흡족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지! 아주 정확하게 흐름을 잘 읽었어. 점은 눈치가 70%야. 아무리 신통력 좋은 무당도 눈치 좋은 점쟁이는 못 당해. 이젠 하산해도 되겠어?”
“뭘요, 사장님이 잘 가르쳐주신 덕분이지요.”
그들이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을 때다.
끼익.
매니저 사무실에서 장미란과 중년 여인이 나왔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싸우는지 알겠다.
“형사님, 어서 받으세요. 어서요!”
“아니에요. 저는 이런 거 못 받아요.”
“진짜 얼마 안 되는 거예요. 그냥 받으세요.”
“안 돼요, 아주머니. 정말 안 돼요.”
그들은 하얀 봉투를 서로에게 떠넘기려 필사적인 몸부림을 펼쳤다.
중년 여인은 힘으로 안 되니 애원하듯 말했다.
“제가 너무 죄송해서 이러죠. 제발 받아주세요.”
장미란은 난처한 기색이다.
이내 그녀가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럼, 사주·관상 보고 가세요. 가게 매상 올려주는 게 저를 돕는 거예요. 점괘가 잘 맞으면 홍보도 많이 해주시고요.”
잠시 생각하던 중년 여인은 장미란의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점 한 번 볼까요? 헌데 어떻게 하면 되지요? 저는 이런 곳이 처음이라.”
“우선은 이쪽에 앉으세요.”
장미란은 탁 트인 창가가 아닌 조용한 구석 자리로 그녀를 안내했다.
“음료수는 뭐 드시겠어요?”
“그냥 커피 하죠.”
장미란은 테이블 위 통에서 메모지와 볼펜을 꺼내 그녀 앞에 놓았다.
“여기에 이름하고 사주 적어주시고, 기다리고 있으며 되요.”
“예, 알겠습니다.”
장미란이 일부러 딴 곳을 응시하는 유달에게 다가왔다.
“손님이요.”
이어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최대한 좋은 말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제가 특별히 신경 써 드리죠. 한풀이는 예로부터 무당들의 전공이지요. 필요하면 바로 접신(接神)도 가능합니다.”
유달은 자신만만히 대답했는데, 송보름은 걱정인 표정이다.
“정말 잘 할 수 있겠어요?”
“뭘?”
“의욕이 너무 넘치잖아요? 사장님, 대학 때처럼 신기 남발해서 문제 생기면 어쩌려고요? 적당히 하세요. 천기 어지럽히지 말고요.”
“대마신이 깨어날 징조가 보이면서 천기는 어차피 개판 됐어. 내가 조금 더 어지럽힌다고 무슨 상관일까?”
“예?”
“세계 각지의 무당들이 몰려들어 완전 개판 만들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 쳐서 왕창 어지럽힐 거야.”
“······.”
유달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쳐서 중년 여인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
유달이 중년 여인의 사주가 적힌 메모지를 내려놓았다.
곧이어 본격적인 사주·관상 풀이가 시작되었다.
“인경화 씨?”
“네······.”
“사주가 한 번 바뀌었네요? 원래는 자식운 자체가 없었어요. 하지만 현대의 과학 기술은 사람의 운명도 바꾸어 놓죠. 시험관 아기였나요?”
“네, 여러 번 실패 끝에 얻은 아이였어요. 그리고 하영이가 몹쓸 일당하고 답답한 마음에 찾았던, 용한 점쟁이도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원래 없던 자식이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그, 그런데 팔자에 있던 자식이든, 없던 자식이든······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인데······ 어떻게 쉽게 잊을 수 있겠어요. 아이고, 하영아~.”
울먹이며 말을 잇던 그녀는 결국 대성통곡을 터트렸다.
유달은 난감함을 금치 못했다.
“아니요, 아니요. 저는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시험관 아기를 낳던 입양을 하건 부모자식 사이는 똑같은 천륜이고······ 저기요, 아주머니? 너무 울지만 마시고······.”
툭.
장미란이 유달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냥 속 시원히 울게 두라는 눈치였다.
유달은 그녀가 진정되자 다시 입을 열었다.
“인경화 씨는 남편 복을 타고났네요.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백년해로(百年偕老)할 상이었는데······ 헐, 이게 또 안 좋게 바뀌고 말았네요.”
“크읍······.”
인경화는 울음부터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정말 과분한 남편이었어요. 내가 무슨 복이 있어서 저런 사람을 만났나 했을 정도였어요. 남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성실하게 살았는데, 하영이 억울한 죽음 밝힌다고 애쓰다가 그만······ 아이고, 하영이 아버지~.”
굿 카페는 다시 통곡의 장이 되었다.
말만 하면 울음을 터트리니, 제대로 사주풀이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유달이 작심한 듯 말했다.
“좋습니다. 오늘 한 번 울음바다 만들어 봅시다.”
곧이어 그는 계산대로 시선을 돌렸다.
“보름아!”
“알겠습니다. 사장님.”
송보름은 유달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행동에 나섰다.
우선은 주방에 있는 강성호를 불렀다.
“오빠는 문밖에 나가 있어요. 혹시라도 손님 오면 잠시 기다리라고 하면 돼요.”
“그, 그래······.”
강성호가 밖으로 나가자, 그녀는 카페를 뛰어다니며 창가의 커튼을 치고, 실내조명을 낮췄다.
귀신 나올 듯 어두침침한 분위기가 되었다.
유달이 인경화에게 말했다.
“제가 따님의 영혼을 불러보겠습니다.”
인경화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접신 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정식 굿을 해야 하는데, 과정도 복잡하고 돈도 많이 들지요. 서양의 영매(靈媒)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둥근 탁자에 손잡고 둘러앉아서 ‘오셨나요?’ 하는 거 있지 않습니까? 저를 통해서 따님과 간단히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니까 굿은 따님의 영혼이 빙의하여 직접 대화하는 형식이고, 지금 제가 하려는 건······ 그냥 휴대폰으로 통화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떤 형식이든 상관없어요. 정말 그게 가능하다면 빨리 만나보고 싶네요······.”
또 울음을 터트리려는 그녀에게 유달이 얼른 물었다.
“혹시 따님이 쓰던 물건 있습니까?”
“아니요.”
“그럼, 따님이 자주 만졌거나 애착을 가졌던 물건은요.”
인경화가 핸드백을 내밀며 말했다.
“이것은 하영이가 제 생일 선물로 사준 겁니다.”
“괜찮을 것 같군요.”
유달이 핸드백을 받았다.
그는 양손을 핸드백 위에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차분히 집중하는 모양새였지만, 쉴 새 없이 입을 놀려 떠들어댔다.
“영혼을 특정하여 부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TV에 나오는 영매들은 대부분 흉내만 내는 거죠. 영험함을 타고난 저니까 가능한 거지요······.”
유달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마도 따님이 억울한 죽임을 당했을 겁니다. 운이 좋으면 승천했을 수도 있고, 이승의 미련 때문에 방황하고 있을 수도 있고, 억울함의 무게 때문에 자신을 해친 놈에게 들러붙어 있을 수도 있겠죠. 어느 경우든 상관없습니다. 제가 나섰으니 만사형통이라 할 수 있는데, 왜 이리 대답이 없을까요?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유달의 말이 없어지고, 그의 얼굴에선 굵은 땀이 줄기 되어 흘러내렸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번쩍!
마침내 유달이 눈을 떴다.
땀으로 얼룩진 그의 얼굴엔 어이없는 미소가 감돌았다.
“헐, 나보다 먼저 천기를 어지럽힌 새끼가 있었네?”
그는 이내 고개 돌려 옆자리의 장미란에게 물었다.
“이건 대체 무슨 사건입니까?”
그녀는 인경화의 눈치를 한 번 살피고 속삭이듯 대답했다.
‘여대생이 납치되어 살해당한 사건이에요. 범인은 아직 잡지 못한 상태고요. 무슨 문제 있어요?’
유달도 속삭이는 음성으로 말했다.
‘통화 중입니다.’
‘예?’
‘피해자의 영혼이 누군가와 접신 되어 있다고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중에 자세히 알려드리죠.’
그들이 계속 소곤거리자 인경화가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유달이 재빨리 대답했다.
“아닙니다. 오늘은 제 몸이 좋지 않아서 영매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조만간 따님에게 몹쓸 짓을 한 놈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저, 정말이요?”
“제 점괘는 틀린 적이 없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집에 돌아가셔서 그놈이 잡혔다는 뉴스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아이고, 정말 감사합니다. 형사님도 감사하고요.”
인경화는 연신 고개 숙여 인사하고 출입문으로 향했다.
딸랑딸랑.
그녀가 나가자마자 장미란이 물었다.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장담을 한 거죠?”
“나중에 말씀드리죠. 제가 지금 몸이 좋지 않아서······.”
“그거 둘러댄 말 아니었나요?”
“미래에 벌어질 일을 말한 것이고, 지금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유달은 정말 몸이 좋지 않은 모양인지, 비틀거리며 걸어가 넓은 소파에 누웠다.
그러고는 계산대를 향해 소리쳤다.
“보름아! 헬프~.”
“네, 기다리세요.”
그녀는 재빨리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곧바로 냉장고 문을 열어 얼음팩을 꺼내고, 계산대 서랍의 체온계까지 챙겨서 유달에게 달려왔다.
“그러게, 무리하지 말라니까요”
유달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땀도 계속 흘러내렸다.
송보름은 익숙하게 그의 이마에 얼음팩부터 올리고 체온을 쟀다.
“와~ 43도. 미친 거 아니에요?”
“나도 모르겠다······.”
“뭘 모른다는 거예요?”
“나는 엄마 얼굴을 한 번도 못 봤거든······ 그런데 왜 어머니들의 눈물에 약한 건지······ 경험하지 못한 적이라 그런지 강하네. 대비해도 당해낼 수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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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유달은 쌩쌩하게 기운 차리고 일어났다.
봄 햇볕이 좋은 화창한 날씨,
유달과 장미란은 자동차를 타고 서울 중심부의 대학가 주위를 삥삥 돌았다.
몇 바퀴나 같은 코스를 돌고 나서 유달이 말했다.
“여기가 맞는 것 같습니다.”
장미란은 가까운 곳에 차를 세우고, 둘은 차에서 내렸다.
명성 대학 정문 입구에서 장미란이 물었다.
“이곳에 윤하영 양 살해사건의 범인이 있다는 거죠?”
“그건 모르죠. 저는 그녀의 영혼을 찾는 것이고, 범인은 투자자님이 찾으면 되겠습니다.”
“둘 다 있을 것 같네요. 여기는 윤하영 양이 다녔던 대학교에요.”
“진작 말씀하시지? 괜히 뺑뺑 돌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제 실력을 의심하는 겁니까?”
“······.”
“왜 대답을 하지 않고, 걷기만 하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