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체념
유달이 벌떡 일어나 심각한 표정으로 만류했다.
“이대로 제가 떠나면 정말 큰일 납니다. 복수의 화신이 저놈을 확 덮쳐버리면 진짜 끝장이에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의사들이 진통제를 써도 통하지 않을 거고요, 육신과 영혼이 동시에 무너지며 죽을지도 몰라요. 아니, 100퍼센트 확률로 확실히 죽습니다.”
“잘됐네요. 우리나라 법체계에서는 사형을 시킬 수 없어 불만이었는데. 제가 상상했던 가장 이상적인 최후네요. 빨리 덮치라고 하세요.”
“법을 수호하는 형사님이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죠? 저놈이 죽어버리면 복수의 화신이 된 경찰의 원한은 어떻게 풀어줍니까? 범인이 잡히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 유족은 또 어쩌고요? 형사님이 만족한다고 다가 아니란 말입니다.”
“누가 수사를 중단한다고 했나요? 제가 나가도 수사는 계속 진행될 거에요. 결정적인 증거는 분명 재개발 현장에 있어요.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 경찰이 수사를 중단해도 상관없어요. 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증거를 찾아낼 거에요. 제가 못 할 것 같나요?”
유달은 주눅이 들어 대답했다.
“하,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어서 가요.”
“네······.”
장미란은 유달의 팔을 잡고 반강제로 끌어냈다.
혼자 남겨진 김형식은 홀가분한 기색이 아니다.
그는 더욱 불안해진 표정으로 떠나는 유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장미란이 김형식의 담당 의사에게 말했다.
“최 선생님, 저희 볼일은 끝났습니다.”
“알겠습니다.”
남자 간호사 둘이 뛰어가 김형식을 양쪽에서 부축했다.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는 그는 극도로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유달이 말하는 대로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얼굴에 가득했는데,
스윽.
불안감을 참지 못하고 뒤돌아보는 유달과 눈이 마주쳤다.
어찌 보면 생이별처럼 애틋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곧이어 유달이 긴 한숨과 함께 그를 외면하는 때다.
후앙.
복수의 화신이 김형식을 덮쳤다.
“으아아아악! 내, 내, 내가 죽였어! 내가-!”
그는 바로 실토할 정도로 엄청난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유달과 장미란은 외면한 발길을 다시 되돌리지 않았다.
보안요원까지 달려들어 난리 치는 그를 붙잡아 병원 카트에 태워 응급실로 옮겼다.
카트 위의 김형식이 애타게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으아아악! 제발, 제발, 제발! 내가 죽였다고!”
하지만 유달과 장미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김형식을 실은 카트가 응급실로 들어가자 발걸음을 멈췄다.
장미란이 말했다.
“커피 한 잔 할까요?”
“저놈의 자백부터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칼자루를 우리가 쥐고 있는데, 서두를 필요가 없죠. 나중에 자백을 번복할 수 있으니 확실히 해야 해요.”
“어떻게요?”
“우선은 범행도구를 숨긴 곳부터 알아내고, 그곳에 형사들을 보내 찾아내야죠. 그리고 찾은 증거물을 국과수에 맡겨서 범행을 입증할 DNA가 검출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그런 다음, 저놈을 체포해서 재형이의 원한을 풀어줄 생각이에요.”
“뭐, 맘대로 하십시오.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커피는 미리 마셔둬야겠네요.”
“가게들이 문 닫을 시간이네요. 캔커피 괜찮아요?”
“저는 얻어먹으면서 가리고 따지는 성격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판기가 있는 휴게실로 향했고, 김형식의 처절한 비명은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
이른 새벽.
명진 종합병원 본관 입구.
끼이익.
경찰승합차가 급히 멈추고 형사들이 서둘러 내렸다.
그들은 유리로 된 자동현관문을 통과하여 로비에서 기다리는 장미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파트너인 강세훈 형사가 말했다.
“장 팀장님, 체포영장 나왔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재형이를 죽인 놈을 체포하러 갑시다.”
그녀는 유달에게도 따라오라는 눈짓을 하고, 김형식을 격리해 놓은 치료실로 향했다.
그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활력 징후를 나타내는 기계 장치를 달고, 숨넘어갈 듯한 격한 신음을 발하며 누워있었다.
한계치에 가까운 진통제를 투여해도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모양이다.
강세훈이 그를 돌보는 의료진에게 말했다.
“체포영장 집행하겠습니다.”
담당 의사와 간호사가 잠시 침대에서 물러났다.
이어 강세훈이 장미란에게 눈짓했다. 가장 고생한 사람이 유종의 미를 거두라는 의미였다.
장미란이 수갑을 빼 들고 다가갔다.
“김형식 씨?”
“네······.”
그는 힘들어도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고통을 끝내고 싶다는 간절함 느껴졌다.
“현 시간부로 당신을 대한민국 경찰 이재형 경위의 살인 혐의로 체포합니다.”
찰칵.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변명할 기회가 있고······.”
그녀가 체포영장 집행을 끝냈을 때 김형식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모니터에 나타나는 그의 활력 징후도 안정적인 수치로 돌아왔다.
장미란이 유달을 구석으로 불러서 물었다.
“재형이의 원한이 풀렸나요?”
“네, 확실히 풀렸습니다. 그런데 왜 승천하지 않고 쭈뼛거리고 있을까요······ 아, 미치겠네······ 걸신보다 더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어요!”
그는 체념하듯 장미란에게 물었다.
“아까 우리가 문병 간 곳이 8층이었나요?”
“재형이의 어머님은 지금 지하 1층에 있어요. 8층 입원실은 다인실이라 애틋한 이별을 나누기 곤란하잖아요. 제가 당직 의사에게 조용한 장소로 옮겨달라고 부탁했어요.”
“치밀하시군요?”
“직업병이라 해두죠. 따라와요.”
장미란은 앞장서 격리 치료실을 나갔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조명이 흐릿한 통로를 걸었다.
“여기에요.”
장미란은 구석진 통로 끝방에 멈춰 섰다.
유달은 음산함마저 드는 주위를 둘러보며 대꾸했다.
“귀신 나오겠는데요?”
“직원들의 출입도 통제된 곳이고, 시끄러울 수도 있다고 보안요원에게 미리 양해도 구해놨어요. 울고 불며 소리쳐도 상관없다는 것이죠. 유달 씨에게는 처음 보는 할머니겠지만 잘 참아봐요.”
“저를 보통 무당과 똑같이 취급하면 곤란하지요. 그때는 제가 선무당 시절이었고, 지금은 그보다 진화된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이어 그는 양발을 어깨넓이로 벌리며 장미란에게 당부했다.
“만약 제가 쓰러지면 카페까지 부탁합니다.”
“걱정 말아요.”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지······.”
유달의 눈에는 이재형의 영혼이 보였다.
원한을 완전히 씻어내지 못했는지 몸 전체가 피범벅이다.
유달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말했다.
“망자의 규칙을 지켜. 어머니하고 접촉 금지. 깨끗한 모습으로, 딱 5분이야.”
그의 허락이 떨어지지 무섭게,
후웅.
이재형의 영혼이 유달의 몸으로 들었다.
호악.
그가 다시 몸 밖으로 나왔을 때는 말끔한 경찰 제복을 입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사르르륵.
그는 복도 벽을 통과하여 어머니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작은 이동식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그는 침대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벽에 등이 닿을 듯 최대한 거리를 두고 어머니를 불렀다.
“엄마······.”
이재형의 떨리는 음성이 고요한 방안에 울려 퍼졌다.
“엄마, 나야······ 잠시 일어나 봐. 엄마, 나라고······.”
거듭된 부름에 그녀가 눈을 떴다.
“재, 재형아······ 우리 재형이 맞지······.”
기력을 탈진한 그녀는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야왼 손을 힘겹게 들어 내밀 뿐이다.
“맞아, 나야. 엄마 아들 재형이. 그런데 왜 그렇게 누워있어? 얼른 기운 차려야지.”
“재형아, 아이고 불쌍한 우리 재형이······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니?”
“응, 엄마······ 꿈이야. 나도 현실이었으면 좋겠는데, 꿈이야. 그래서 엄마 손도 잡아 줄 수 없네.”
“괜찮아, 엄마는 꿈이라도 좋아. 우리 아들 경찰 되고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산 게 마음에 걸려서······.”
“그건 내 잘못이지. 만날 전화로만 간다고 하고 차일피일 미뤘잖아. 나도 그게 후회가 돼서 엄마한테 나타난 거야. 엄마한테는 정말······ 미안하다는 말밖에 못 하겠다. 장가갈 때까지 키워줬는데 먼저 가서 미안하고, 철없는 며느리와 어린 손자 남겨놓고 떠나서 미안하고······ 무엇보다 엄마한테 고마웠다는 말도 못 하고 떠나서 미안해.”
“재형아······.”
“나는 하늘나라에서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 그곳에서도 경찰 됐다. 살아 있을 땐 세 번이나 떨어졌는데 거기서는 단번에 붙었네.”
이재형의 형체가 점점 흐려졌다.
영원한 이별이 얼마 남지 않은 신호······.
“엄마, 하늘에서 출동 명령 떨어졌어.”
“아이고, 재형아······ 흑흑······.”
결국엔 어머니의 울음이 터졌다.
이재형은 복받치는 감정을 꾹 참고 말을 이었다.
“밥 잘 먹고,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살아. 하늘에서 내가 지켜볼 거야. 충성!”
이재형이 거수경례를 올려붙임과 동시에 그의 몸은 밝은 빛의 포말이 되어 사라졌다.
“재형아, 가지 마!”
어머니의 애타는 절규가 울려 퍼지며, 복도에 서 있던 유달도 쓰러졌다.
@
새벽녘 명동 거리.
굿 카페가 있는 건물 앞에 장미란의 차가 멈췄다.
그녀는 조수석에서 자고 있은 유달을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요. 도착했어요.”
“어우······ 기력이 남아나는 날이 없어······.”
철컥.
조수석 차량 문을 열고 내리는 유달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렸다.
“괜찮겠어요?”
쿵.
유달은 차 문을 닫고, 차량을 반 바퀴 돌아서 운전석의 장미란을 마주 보며 대답했다.
“졸린 거 빼고 다 괜찮습니다.”
“덕분에 미제에 빠질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어요. 개인적으로는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기도 했고요. 상부에 보고서 올려 수사 협조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할게요.”
“말씀은 고맙지만,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더 이상 경찰과 엮이기 싫습니다. 고소 건이 해결되었으니, 저는 그것으로 만족입니다.”
장미란은 장난이 아니라는 듯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FBI는 어때요? 국적과 상관없이 다양한 방면의 전문가를 찾고 있어요. 제가 추천하면 분명 관심을 가질 거에요.”
“역시나 사양입니다. 제가 관련되면 일이 점점 커지는데, FBI와 엮이면 지구라도 구하라는 겁니까? 저는 그냥 사주·관상이나 보면서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알았어요.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해요. 고마웠어요.”
“네, 형사님도 좋은 직장 구하길 바랍니다.”
부르릉.
장미란의 승용차가 떠나자 유달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승강기에 올라,
띵동.
3층에서 내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설 때까지 비몽사몽인 모습이었는데······.
찰칵.
카페 불을 켠 유달은 잠이 확 깨는 반응이다.
“뭐야? 이 잡것들은······?”
불을 켜는 순간, 험악한 사내들이 카페를 점거하고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유달은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정말 쉴 틈을 주지 않는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