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유언
마물들은 지치지도 않고 뛰어들었다.
후앙.
“커억!”
후앙, 후앙, 후아-!
“크악! 미치겠네······.”
3연타를 허용한 유달이 휘청거리며 밀려났다.
풀썩.
그는 결국 장미란의 발밑에 쓰러졌다.
장미란은 애처로운 마음보다는, 자신이 대신 싸우고 싶은 답답을 느꼈다.
“제발 그만 맞을 수 없어요? 피할 수 없으면 가드 단단히 하고 막으라고요.”
“헉, 헉······ 저놈들은 가드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럼 죽기 살기로 달려들어 한 대라도 때려봐요. 저는 동료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당하기만 하는 꼴은 못 봐요.”
“절 동료로 생각해 주시는 마음은 고마운데······ 제가 때리거나 일방적으로 맞거나, 효과는 똑같습니다.”
“무슨 효과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작전대로 되고 있으니까!”
유달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다시 마물에게 뛰어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
“커억! 빌어먹을······ 어떻게 진짜 한 대도 못 때리냐.”
그는 여지없이 얻어터지는 동네북 신세가 되었다.
장미란은 유달이 했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떤 효과가 있는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효과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백시연은 경악하는 반응을 보였다.
“어,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후웅, 후웅, 후웅!
유달을 공격하는 마물들의 모습이 변했다.
그의 몸을 통과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점점 더 사람의 형상을 닮아 갔다.
마물의 기운이 사라지고 혼령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다.
***
날이 밝기 시작했다.
유달의 ‘생쇼’는 계속 이어졌고, 장미란은 그의 엄청난 체력에 혀를 내둘렀다.
두 시간 넘게 발광에 가까운 격렬한 행동을 멈추지 않으니, 보통 사람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기다리다 지친 그녀가 물었다.
“언제쯤 끝날까요?”
“거의 다 됐습니다.”
마물로 변했던 저수지의 원혼들이 본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그들은 마물일 때와 달리, 초창기 호러 영화의 좀비처럼 움직임이 느렸다.
덕분에 유달은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고, 호각세를 유지하며 싸웠다.
장미란이 독촉했다.
“조금만 서두를 순 없을까요. 잠시 후면 저수지 수색을 위해 경찰이 도착할 거에요.”
그녀의 우려는 지극히 당연했다.
다른 사람들은 유달의 행동을 절대 이해 못 할 것이다.
“답답하기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빨리 몸속에서 신호가 와야 할 텐데······.”
“무슨 신호요?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죠?”
“전 변비 없습니다. 제가 이 상황에 똥 싸는 짓을 하겠습니까······ 오홋, 똥 얘기하니까 바로 신호가 왔습니다.”
유달은 재빨리 장미란에게 손짓했다.
“얼른 내 뒤로 오세요.”
“왜요?”
“저의 몸주신이 화를 낼 것 같습니다. 마물의 기운을 완벽하게 날려버릴 결정적인 한 방이죠. 일반적으로 영적인 존재는 보통 사람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의 몸주신의 기운은 워낙 사나워서 형사님께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어요.”
장미란은 유달이 시키는 대로 그의 등 뒤에 붙어 섰다.
“됐나요?”
“네, 잠시 움직이지 마십시오.”
유달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빛과 목소리는 살벌하게 바뀌었다.
“뭐지? 이 잡것들은······.”
이어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썩 물러가지 못할까!”
순간, 장미란도 이상한 현상을 느꼈다.
휘잉.
그녀의 발밑에서 작은 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온몸을 살랑살랑 어루만져주듯 스치고 지나갔다.
머리카락이 가볍게 휘날리는 정도의 느낌이다.
그러나 원혼들을 향해 몰려가는 기세는 상상을 초월했다.
콰콰콰콰쾅!
천둥 같은 굉음에 원혼들이 귀를 막고,
후화아아앙-!
세상을 집어삼킬 것 같은 광풍이 그들을 덮쳤다.
이는 초대형 태풍이 휘몰아치는 위력이다.
원혼들은 순간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고, 쓰러진 뒤에서 계속 휩쓸려 굴러다녔다.
사르르.
유달의 눈이 다시 감기고,
번쩍!
유달이 놀란 듯 눈뜨는 순간, 미친 듯이 요동치던 광풍의 기운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장미란이 물었다.
“끝났나요?”
유달이 본래의 음성으로 대답했다.
“네, 깔끔하게 끝냈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마무리에 들어가겠습니다. 준비한 거 주시지요.”
유달이 손을 내밀자 장미란이 편의점에서 샀던 물건을 담긴 비닐봉지를 건네주었다.
그는 묵직한 비닐봉지를 머리 위로 추켜들고, 원혼들이 쓰러져 있는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자, 모입시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고, 승천 준비합시다. 삼각김밥도 있고, 캔커피도 있고, 만두하고 족발, 순대, 당연히 술도 있지요.”
유달이 편의점 음식을 땅바닥에 펼쳐놓았다.
그리고 작은 종이컵에 술을 따라 일렬로 늘어놓았다.
곧이어 쓰러져있던 원혼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펼쳐놓은 음식 주위로 모여들었다.
“조촐하더라도 맛있게 드십시오. 경쟁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정말 고생이 많았습니다. 억울하게 숨통 끊긴 비통함도 알고, 남은 식구 걱정되어 발길 떨어지지 않는 심정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망자의 길은 하나뿐이니 어쩌겠습니까. 인간사 백팔번뇌 모두 잊고 부디 극락왕생하십시오. 수고하고 또 수고하셨습니다.”
축원을 마친 유달의 눈에 낯익은 원혼이 눈에 들어왔다.
카페에서 사진으로 봤던 조폭 두목이다.
그는 살아 있을 때의 당당한 체구였는데, 죽은 원혼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굶어 죽은 귀신처럼 피골이 앙상한 노인네였다.
유달은 허겁지겁 음식을 탐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여 내밀었다.
“콜록콜록······ 이게 생전의 마지막 소원이었죠?”
조폭 두목은 낚아채듯 담배를 받았다.
유달은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담배 피우는 그를 보며 말했다.
“당신은 죗값이 무거워 승천하지 못할 겁니다. 기나긴 세월 동안 죗값을 치러야 하는 위로의 선물이지요.”
곧이어 다른 원혼들도 경쟁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콜록콜록, 이 맛도 없는 것에 왜들 환장하는지······ 이왕 돌아가신 김에 금연들 하시지······ 콜록콜록.”
유달은 그들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연신 기침을 해대며 담배에 불을 붙여 전해주었다.
백시연은 이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저런 능력을 지니고 사주카페나 하고 있다고?”
지이잉, 지이잉.
그녀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응, 제임스.”
-어떻게 됐지?
높낮이 없는 중저음의 사내 음성이다.
“사실, 나는 네가 자포자기한 줄 알았어. 전화로 이름만 말해줬을 뿐인데, 무조건 따르라고 말하고 끊었잖아. 사주카페 사장과 어떻게 아는 사이야?”
-결과만 말해.
“마물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어. 골치 아팠던 일 하나가 해결된 거지.”
-우리가 찾는 목표는?
“없었어. 우리의 봉인이 깨졌을 때 도망친 모양이야. 그리고 사주카페 사장의 영적인 능력이 엄청나던데, 어떻게 우리 조직이 모를 수 있지?”
-알 필요가 없었던 거야.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놈이 아니니까. 이제 별장 정리하고 본부로 합류해.
“혹시 만복이란 사람 알아? 사주카페 사장이 계속 묻는데 나중에는 짜증이······ 뭐, 뭐야? 또 먼저 끊었어?”
그녀는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에에엥- 에에엥-.
요란한 사이렌이 울리며 경찰차들이 줄지어 저수지를 향해 올라왔다.
백시연은 바로 자리를 떴다.
그와 동시에 유달도 저수지 물가를 벗어났다.
“제 할 일은 다 끝났습니다. 경찰들이 시신을 발견하면 원혼들은 미련 없이 승천할 겁니다.”
“수고했어요. 저는 수색을 지휘해야 하니까, 차에서 조금 쉬고 있어요.”
“알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졸음이······.”
조금씩 걸음이 느려지던 유달이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풀썩-!
장미란이 깜짝 놀라 그의 몸을 흔들었다.
“왜 그래요? 괜찮아요?”
유달은 점점 기운이 빠지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미치도록 졸린 것뿐입니다. 체력 탈진에 영기 고갈······ 더는 움직이지 못 갈 것 같습니다······ 보름이한테도 전해주세요. 절대 깨우지 말라고······.”
꼴깍.
유달은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
명동 번화가의 굿 카페.
잠에서 깨어난 유달이 사장실에서 나왔다.
그는 잠을 너무 오래 잔 부작용을 겪고 있었다.
떡 지고 눌린 머리에 정신은 몽롱한 상태였고, 허리가 아파 똑바로 걷지도 못했다.
계산대의 송보름이 과장된 목소리도 말했다.
“정말 대단하세요. 어떻게 사람이 이틀을 잘 수가 있어요?”
유달은 치질이라도 걸린 듯 어기적거리며 다가와 계산대에 몸을 기댔다.
“시끄럽고, 물이나 줘······.”
그녀는 시원한 냉수에 얼음까지 넣어 가져왔다.
“여기요.”
벌컥, 벌컥, 벌컥······.
유달은 큰 유리잔에 담긴 물을 한 번도 끊지 않고 모두 들이켰다.
“어우, 시원해!”
유달은 정신이 번쩍 드는 표정이다.
몽롱했던 머리가 맑아지면서 카페에 울리는 뉴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경찰은 시신들이 발견된 저수지를 폭력 조직의 암매장 장소로 추정하고 수사하고 있습니다. 현장에 나가 있는 유병학 기자를 연결해 보겠습니다.
소리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린 유달이 갸웃했다.
“웬 TV가······.”
아무 장식 없이 밋밋했던 벽에 초대형 TV가 달려 있었다.
처음에는 TV의 존재에 의문을 품었다가, 점차 TV 화면에 나오는 뉴스에 관심을 보였다.
-이곳은 암매장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들이 발견된 현장입니다. 보시다시피 제 뒤로는 대대적인 경찰의 수색이 아직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화면 속 기자가 서 있는 장소는 유달이 마물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곳이었다.
송보름도 대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었다.
“요즘 저 사건 때문에 난리도 아니에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시체처럼 실려 온 거예요?”
“배고프니까 밥이나 시켜.”
유달은 말도 꺼내기 싫다는 반응이다.
-경찰은 14구의 시신을 수습하여 국과수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백골 상태의 십대 소녀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유달은 의아했다. 마기를 없앤 원혼은 분명 13기였다.
백골 상태라면 예전에 승천했을 가능성이 컸지만, 왠지 모를 찜찜함이 느껴져다.
띠링.
유달은 신경 쓰지 않으려 TV를 껐다. 세련된 외형의 TV 자체에 집중하자 더욱 멋져 보였다.
“보름아, 저거 몇 인치야?”
“82인치요.”
“최신형 같은데, 엄청 비싸겠네?”
“당연하죠.”
“아무튼, 잘 볼게. 역시 부잣집 딸내미는 씀씀이가 달라.”
송보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무슨 소리예요? 저거 사장님이 샀잖아요. 노트북으로 축구 보는 거 짜증 나서 명품 TV 지른다고 했었잖아요?”
“환장하시겠네? 내가 그럴 돈이 어딨어? 저 TV 혹시 잘못 온 거 아니야?”
“그럴 리 없어요. TV 가져와서 설치했던 기사분들이 분명 사장님 거라고 했다고요?”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강제로 물건 떠넘기는 수법일 수도 있잖아. 나한테 확인하고 받았어야지!”
“사장님이 절대 깨우지 말라고 유언 남겼잖아요?”
“유언이라니! 내가 진짜 죽었냐?”
송보름과 유달이 목청 높여 잘잘못을 따질 때였다.
딸랑딸랑.
장미란이 들어왔다.
유달은 그녀를 손님으로 여기지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저는 보름이를 좀 혼내야 하는데?”
“유달 씨가 관심 있을 만한 소식을 가져왔어요. 그런데 왜 보름이를 혼낸다는 거예요?”
“이 녀석이 정체 모를 초고가의 물건을 덥석 받았지 뭡니까? 나를 파산시키려고 작정했는지······ 무슨 소식인지 말씀해 보시지요?”
“이틀 전 새벽, 김 기자의 집에 원인 모를 큰 화재가 발생했어요.”
“!”
뭔가 뜨끔한 반응을 보였던 유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그놈······ 죽었습니까?”
“아니요. 화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네요.”
“아쉽군요. 그냥 뒈졌으면 내 소송도 끝나는 건데.”
유달은 더는 관심 없다는 듯 송보름을 야단치는 것에 집중했다.
“어쩔 거냐? 부잣집 딸내미. 나는 돈 없으니까, 배송 업체 찾아서 무조건 반품시켜.”
“싫어요. 나도 이제 큰 화면으로 드라마 보고 싶어요.”
“그런 건 너희 집에서 보라고!”
둘의 말싸움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장미란은 그들보다 더욱 크게 목청 높여 자신이 찾아온 진짜 목적을 말했다.
“김 기자 입원한 병원에서 계속 문제가 생겨요.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 사고가 연이어 발생하는데, 왜일까요?”
순간, 보름이가 번쩍 손 들며 고자질했다.
“제가 알아요! 모든 게 사장님 때문이에요.”
“아닙니다. 모함입니다!”
유달의 펄쩍 뛰며 부인했다.
하지만 그의 과장된 반응은 장미란의 의심을 더욱 키웠다.